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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9화 (59/153)

〈59 화〉

호보소

“아리엘 님!”

깜짝이야.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목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 의 보좌관, 리키온이 함박웃음을 지 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 다! 전하를 뵈러 오신 거지요?”

“네에. 혹시, 전하께선 지금 바쁘신 가요?”

“마침 쉬고 계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금방 소식을 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리키온이 바람처럼 사 라졌다. 곧 나는 세드릭의 집무실이 있는 이 층으로 안내되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자 리키온이 다시 나타났다. 조금 곤란해 보이는 얼굴

이었다.

“저, 아리엘 님. 정말 죄송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 까?”

“왜요? 아…… 혹시 전하께서 시간 이 안 되시나요?”

역시 너무 다짜고짜 쳐들어온 게 문제 였나.

리키온이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일단 이리 로 모시겠습니다.”

리키온이 나를 이 층에 있는 응접 실로 안내했다. 사용인들이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이미 제이나의 저택 에서 쿠키를 많이 먹은 나는 쿠키의 끝만 조금 똑똑 끊어 먹었다.

잠시 뒤 리키온이 응접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전하께선 곧 오실 겁니다!”

말과는 달리 리키온은 여전히 곤혹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곤란한

걸까? 세드릭을 만나면 일단 사과부 터 하고, 바쁘다면 다음에 다시 찾 아오겠다고 이 야기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기다리게 했 군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드릭이 보였 다. 언제나처럼 오늘 역시 빈틈없는 정복 차림이었다. 빈틈없는 잘생김 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안녕하세요, 전하. 불쑥 찾아뵈었 는데 실례가 아니었길…… 어라?”

“……왜 그러십니까?”

세드릭이 불안한 표정을 했다. 나 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리 켰다.

“머리가 뻗치셨는데요.”

“아니, 거기가 아니고요. 좀 더 옆 에…… 잠시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까치발을 들 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허락을 구 하듯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세드릭은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나를 제지하진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자유분방한 까만 머리카락 몇 올을 가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 들었다.

“아, 금방 가라앉네요. 그런데요, 전하.”

네?”

“옆얼굴에 쿠션 자국이 있으세요.”

세드릭이 말없이 제 뺨을 쓸어내렸 다. 오돌토돌한 자국이 느껴졌는지 세드릭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전하, 낮잠 주무셨군요.”

에반스 공작은 뇌물조차 찌르기 힘 들 정도로 바쁘다 했던가. 제이나의 말을 떠올린 나는 풋 웃음을 흘렸 다.

뭐, 반가운 일이기는 했다. 세드릭 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담 조향사로 서 기꺼운 일이었으니까.

“적절한 낮잠은 건강에 크게 도움 이 된다더군요. 정말 잘하셨어요.”

“……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여 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체념한 얼굴로 세드릭이 물었다. 나는 결국 다 비워버린 쿠키 그릇을 가리켰다.

“네! 간식도 먹었고요.”

“그러셨군요. 음, 불안한 예감이 드 는데. 레이디께서 이렇게 급히 저를 찾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 그게.”

흠, 흠.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했어. 나는 간 볼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 기로 했다.

“사실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전 하.”

“뭡니까? 투자금도 부담스럽다며

절반만 똑 떼어 가져가신 레이디께 서 제게 요청하실 일이 있다니. 궁 금해서 참을 수가 없군요.”

“……요새 도시 라이넬. 전하께서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세드릭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길 들었다는 표 정이었다.

“네. 맞습니다.”

“저,, 세드릭 레이너 리히트 에반스 공작 전하.”

갑작스러운 풀네임에 세드릭이 당 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길고 긴 이름을 끝까지 읊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세일라로 가는 다리 통행을 허가 해 주세요.”

“……여행이라도 가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제게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이 언제든지 제 이름을 대시면 되 는데요.”

“아뇨, 전하! 제가 가려는 게 아니 에요. 길베르트 상단에 허가를 내려 주세요.”

“길베르트 상단?”

세드릭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상단은 왜…… 레이디, 세일라에 향수 수출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아뇨.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기는 하네요. 하지만 아니에요. 급하게 들 여올 물건이 있는데, 이번 달 안에 는 제도에 도착해야 하거든요. 그러 려면 빙 돌지 않고 라이넬의 다리를 이용해야만 해요.”

나는 계속해서 세드릭을 설득했다.

“허가해주신다면 제 사업에 크나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정말 계획대로만 된다면 전하의 투자금도 금세 갚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세드릭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레이디, 무슨 계획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음. 재밌는 계획이요. 듣고 싶으세 요?”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세드릭이 곧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닙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훌륭한 계획이겠지요. 좋습니다. 길 베르트 상단을 이번 달 통행 가능 상단 목록에 올려두도록 지시하죠.”

시원스러운 대답!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입가 에 번졌다. 나는 세드릭의 이런 면 이 참 좋았다. 화끈할 땐 세상 누구 보다도 화끈하다는 점!

“감사합니다, 전하!”

“별일도 아닌데 민망하군요. 나중 에 결과나 알려주십시오. 레이디의 그 ‘계획’에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 면 기쁠 테니까.”

“물론이죠. 아주 세세히 보고서를 작성해 전달해드릴게요. 마침 2분기 사업 경과 보고서를 작성할 시기군 요?”

세드릭이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미간을 주무르며 물었 다.

“그런 사업 용어들은 어디서 배우 시는 겁니까?”

“음, 어쩌다 보니 여기저기서?”

“예……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딱딱한 서면보단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가 훨씬 전달이 잘 된다는 거.”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아, 나는 곤혹스러운 눈으로 다 비 운 쿠키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공작저의 호화로운 요리는 꽤 매력

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쿠키를 너무 많이 먹어 버렸는데 요.”

“소화가 잘 되도록 샐러드부터 준 비하라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겠군.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늘 벌 써 두 가지의 중대사를 해결했으니, 식사 정도는 느긋하게 해도 될 듯했 다.

고개를 끄덕이자 세드릭이 만족스

럽게 웃었다.

“더 부탁하실 건 없습니까?”

“더, 요?”

“네.”

세드릭이 아주 선선한 투로 말했 다. 말만 하면 웬만한 것 정도는 흔 쾌히 들어주겠다는 듯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들어주신 부탁으로 충분해 요. 그 이상은……/

아니. 잠깐만.

내 입이 뚝 멎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나를 세드릭이 빤 히 쳐다보았다. 그가 얼른 말해보라 는 듯 재촉했다.

“뭡니까?”

“음, 그게.”

물어볼까?

아니, 그냥 관둘까. 아무리 세드릭 이라도 그런 것까지 알지는 못할 것

같은데.

하지만 슬쩍 물어본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피 를 잡지 못했다. 세드릭이 한쪽 눈 썹을 들어올렸다.

“무슨 대단한 부탁이기에 이렇게까 지 뜸을 들이십니까? 기대 되는데 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하 아, 실은 오는 길에 레이너 백화점 엘 들렀거든요.”

“그러셨습니까?”

세드릭이 여상한 투로 끄덕였다. 나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 다.

“그곳에서 굉장히 예쁜 목걸이를 하나 봤는데…… 전시 중이라 지금 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달 말까진 구매할 수 있을 거 라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혹시 확 실한 날짜를 알 수 있을까 해서요. 다음 달 1일까진 갖고 싶거든요.”

“목걸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네에, 색깔이 딱 제가 원하던 거

여서에이, 아니에요. 역시 전하 께 여쭐 일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사업체는 물론 도시도 여럿 소유하 고 있는 세드릭이, 산하 백화점 하 나에서 벌어지는 전시 날짜까지 알 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머쓱 하게 웃어 보였다.

“잊어주세요, 전하.”

“아닙니다. 알아보죠.”

“그러실 필요 없어요! 번거로우시 잖아요. 제 것이 될 물건이면 어련 히 저한테 오겠죠, 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굉장히, 정 말 엄청나게 마음에 드는 목걸이기 는 했지만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사용인이 식사 준비가 되었 다고 알려왔다.

“식사하러 가시죠! 전하.”

마치 내가 집주인이라도 된 듯 그 렇게 외치자, 세드릭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앞장서서 복도를 걸었 다. 이곳도 몇 번 찾아왔더니 이제 는 퍽 익숙했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넓어서 길 잃기 십상이라고 투덜댔 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는 꽤 즐거웠다.

낮잠을 푹 즐겨서 그런가, 세드릭 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느슨했다. 그 는 내 우스갯소리에 꽤 자주 웃어주 었다.

아니, 아닌가. 어쩌면 낮잠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세 드릭 에반스는 어느 순간부터 다양 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웃긴 말을 하면 웃고, 헛소리 를 하면 미간을 찡그렸다. 나를 놀 릴 때면 짓궂은 표정도 지었고, 반 대로 놀림 받을 때면 곤혹스러운 얼

굴도 했다.

예전엔 무표정 아니면 비웃는 표 정, 두 개밖에 짓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뭘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닳겠는 데요.”

너무 빤히 쳐다봤나.

눈이 마주친 세드릭이 제 뺨을 매 만지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 다.

“그냥요.”

“그냥이 어딨습니까.”

“진짜 그냥 쳐다봤는데요.”

식당을 지키고 있던 사용인 몇몇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음, 공작과 백작 영애가 나누기에 너무 체통 없 는 대화이기는 했지.

나는 흠, 헛기침을 하곤 다시 교양 있는 레이디로 돌아갔다. 공작가의 요리는 오늘도 입속에서 살살 녹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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