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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8화 (58/153)

〈58 화〉

호 # 쏘

“가게로 돌아가십니까, 아가씨?”

마차로 나를 에스코트하며 에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엔 에반스 공작저로 부 탁해요.”

에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 다.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약속도 하지 않 고 고위 귀족의 저택에 쳐들어가다 니. 참 파란만장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수해야 했다. 빛나는 미 래를 위해서라면.

내 결연한 표정을 쳐다본 에른이 곧 묵묵히 마차 문을 열었다.

에반스 공작저로 가는 길목에서 마 차는 고급 상점가에 접어들었다. 나 는 창문 너머로 멍하니 시선을 던져 세련되고 우아한 가게들을 구경했

다.

그러던 와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남의 집에 빈 손으로 찾아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특히나 부탁을 하러 갈 때에는 더 더욱.

제이나의 저택에도 고급 과실주를 한 병 안고 갔었다. 이번 역시에도 선물…… 음,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 물이 필요했다.

“잠시 여기서 멈춰줘요!”

곧 마차가 부드럽게 정지했다.

마침 마차가 멈춘 곳 또한 호화롭 고 거대한 백화점 앞이었다. 보석을 녹인 뒤 벽돌에 붓칠이라도 한 건지 대단히 번쩍거리는 건물이었다.

‘……이런 데선 뭘 사도 어마어마 하게 비싸겠구만.’

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약간 의 투자는 감수 해야했다.

나는 큰맘 먹고 백화점 안으로 발

을 디뎠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기꺼이 모시 겠습…… 어, 어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발견한 직원이 반듯하게 인사를 건네…… 려다가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직원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 주치자 어깨를 움찔한 직원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한 접객용 미 소를 띠었다.

음,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잘 교육받은 직원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백화점을 구경했다. 볼 거리가 어찌나 많은지, 목적지도 잊고 아이 쇼핑으로 한바탕 시간을 때울 뻔했다.

한창 제도 최고의 장인이 한땀한땀 만들었다는 레이스 장갑을 들여다보 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이게 아니지. 저는 선물할 만 한 물건을 보러 왔어요.”

“선물을 하시려는군요. 상대분의 성별과 나이대가 어떻게 되시는지 요?”

“남자고, 저보다 서너살 많아요. 이 십대 후반 정도 되겠네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직원들이 재빠 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곤 환하 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손님. 최상급으로 준 비해드릴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 요.”

아니, 최상급일 것까지는……으

마음 같아서는 직원을 붙잡고 싶었 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나는 입 을 다물었다.

‘그냥 인사치레 선물일 뿐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싼 걸로 추천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갈등하는 사이 직원들이 나를 어딘 가로 안내했다. 굉장히 비밀스럽고 특별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특별 우수 고객 전용 룸이랍니다, 손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 요.”

특별 우수 고객? 나는 멍청히 눈 을 끔뻑거렸다.

여기는 원래부터 처음 방문하는 손 님을 이렇게 융숭하게 대접하나?

괜찮은 전략이기는 했다. 나부터 벌써 혹해서 다음에도 이용하고 싶 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고 있었으 니까.

‘역시 장사의 기본은 손님을 받드 는 마음가짐이야.’

초보 사업가인 나는 오늘도 장사의 철학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그러던 중 직원들이 줄지어 들어와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사파이어가 박힌 시계. 척 봐도 어 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가죽 장갑. 끝부분에 큼지박한 보석을 박아넣은 만년필까지!

‘이, 이런 건 인사치레 선물이 아 니잖아.’

남의 집에 갈 때마다 이런 걸 선 물해야 한다면 금세 가산을 탕진할 거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직원들을 올려다보았 다.

“저어. 죄송하지만 이것들은 제가 원하는 게 아닌데요.”

직원들의 눈빛이 눈에 띄게 굳었 다. 그중 제일 연차가 높아 보이는 직원이 얼른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 다.

“저희가 미숙했습니다, 손님. 부디 원하시는 물품을 말씀해 주세요. 이 번에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 다.”

나는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사파이 어 시계를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 남의 집 찾아갈 때 가장 무난한 선물.

“휴지…… 는 역시 좀 그렇고. 음, 과일 바구니라거나?”

“……예?”

아니지, 아무리 비싼 과일을 욱여 넣어도 공작 전하의 성에 차지 않겠 지? 나는 고심 끝에 덧붙였다.

“아니…… 괜찮은 와인 한 병이 좋 겠어요.”

“아! 물론입니다, 손님.”

과일 바구니, 그리고 특히 휴지라 는 단어에서 눈에 띄게 흔들린 직원 의 표정이 그저]야 원래대로 돌아왔 다.

곧 돌아온 직원들은 이번에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와인들을 내밀 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개중에는 나 름대로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 역시 존재했다. 나는 가까스로 식은땀을 훔치며 그것으로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 배 송하실 주소는 에반스 공작저로 하 시겠습니까?”

응? 나는 놀란 눈으로 직원을 바 라보았다.

내가 세드릭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 을 어떻게 알았지?

‘아까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하고.’

세드릭에게 줄 만한 선물을 머리

싸매고 고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름이 튀어나왔을 수도 있었다.

나는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저었 다.

“아뇨, 직접 들고 갈게요. 포장만 부탁드려요.”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 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백화점 내부를 살짝 구경했다. 이곳은 보석 과 장신구들을 선보이는 층인지, 시 선을 돌리는 곳마다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야, 굉장하네. 이런 건 얼마나 할까.’

나는 큼지막한 루비가 박힌 팔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 팔목에 달 고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손목에 상가 한 채를 얹고 다니는 기분이 라, 궁금하긴 했다.

한창 보석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 다.

진열대 너머로 거대한 유리 상자가 보였다. 그 안엔 단 하나의 목걸이

만이 전시되어 있었다.

‘와, 얼마나 비싼 물건이기에 저렇 게 따로 모셔놨을까.’

절로 호기심이 들었다. 나는 홀린 듯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 넣 지 못하더라도 비싸고 예쁜 물건 구 경하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 상자 앞에 선 순간-

나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와아.”

나도 모르게 그런 감탄사가 흘러나 왔다.

목걸이 한가운데에 박힌 연한 자수 정이 자석처럼 시선을 끌어당겼다. 큼지막한 연자수정은 무척이나 아름 다웠다. 아이리스 꽃잎 안쪽의 여린 색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빛깔. 가만 히 보고만 있어도 어디선가 꽃내음 이 흘러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 정 도였다.

‘봄의 제전에 이 목걸이를 걸고 간 다면.’

안 봐도 환상적인 시너지가 예상되 었다. 내 계획을 이루기도 훨씬 수 월해질 것 같았다. 그만큼 이 목걸 이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비싸 겠지?’

나는 자신감 없는 눈빛으로 유리상 자를 훑었다. 어딘가 붙어있을 가격 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격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마침 직원이 슬며시 내게로

다가왔다.

“그 상품이 마음에 드십니까, 손 님?”

“예, 그러네요. 그런데 가격표가 보 이지 않아서요.”

“아, 보고 계신 목걸이는 현재 판 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시 중이어 서요.”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전시는 언제 끝나나요? 언제부터

구매할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당장은 종료 예정이 없답니다.”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예약 명단에 올려 드릴까요, 손 님?”

“예! 부탁드려요. 저, 그런데, 혹시 저 말고도 경쟁자가 있나요?”

내가 넌지시 묻자 직원이 미소 지 으며 고개를 저었다.

“몇 분 계시기는 하지만, 전시가 끝나는 대로 손님께 먼저 연락드리 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과연 봄의 제전이 시작하기 전에 전시가 끝날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설령 끝난 뒤라고 해도 꼭 소장하고 싶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그때쯤 포장이 모두 끝났다. 나는 대단히 아름다운 포장지에 감싸인 와인을 한아름 안아들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아가씨.”

에른에게 금방 빼앗겼지만.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서비스 정신이 참 투철한 백화점이었다. 절로 재방문 의사가 샘솟았다.

‘이름이 뭐지?’

밖으로 나온 나는 그제야 백화점 간판을 쳐다보았다. 유려한 필체의 간판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레이너 백화점?’

레이너, 레이너라.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한참동안 간판을 노려보았다. 에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아니, 저 간판 말이에요. 레이너 백화점이라. 레이너, 레이너…… 어 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아서요.”

에른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레이너는 주인님의 미들 네임 중 하나입니다.”

“네?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세드릭의 풀 네임이 분명……,

“……세드릭 레이너 리히트 에반

유、”

처음으로 세드릭의 풀네임을 읊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백화점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거, 전하 건물이었어요?”

“예. 알고 들어가신 줄 알았습니다 만.”

아니, 몰랐지! 알았으면 세드릭의 선물을 여기서 사진 않았을 거다.

으악, 내가 덜 비싼 선물들로 보여 달라고 한 것도 세드릭 귀에 들어가 는 거 아냐?

‘안 돼!’

나는 몰려오는 수치심에 휘청거렸 다.

아니, 아니야. 프로 정신이 투철해 보이는 직원들이었어. 손님의 일거 수일투족을 제 고용주에게 보고하진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 며 레이너 백화점으로부터 멀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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