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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7화 (57/153)

〈57 화〉

“오랜만이에요, 샤를로트 양.”

[정말요! 몇 달 만인가?]

샤를로트가 수정구 너머에서 활짝 웃었다. 남쪽 섬으로 휴양을 갔다더 니, 그새 피부가 구운 토스트처럼 그을어 있었다.

“제도엔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에

요?”

[흐음, 슬슬 올라가야 할 것 같긴 해요.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성화시 거든요. 이번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 겠다고 하니 어찌나 서운해하시던 지』

샤를로트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나는 ‘파티’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

“파티라면, 혹시 ‘봄의 제전’ 말씀 이신가요?”

[네에. 한가롭게 휴양이나 즐기다

가 사람 복작복작한 파티장에 들락 거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서요. 올해는 불참하려고요.]

“어머, 아쉽네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초대장을 받았거든요.”

[어라, 참석하시게요?]

“네.”

샤를로트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 양께서 참석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네요. 웬만 한 사교계 인사들은 대부분 참석할

거예요. 아리엘 양이 향수를 영업하 기 좋은 자리죠.]

나는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파티에 참석하려는 내 의도를 샤를 로트가 정확히 짚어버렸다. 뭐, 그보 다 조금 더 깊고 음험한 속내가 숨 어 있긴 하지만.

[아리엘 양이 메이 퀸으로 선발된 다면 정말 멋질 텐데!]

메이 퀸.

봄의 제전은 한껏 차려입은 레이디

들이 서로의 맵시를 자랑하는 자리 였다.

개중 가장 눈부시다고 여겨지는 레 이디는 파티 끝 무렵에 메이 퀸이라 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메이 퀸이 입은 드레스 의 색깔이 곧 그 해를 대표하는 색 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게요. 그러면 정말 신날 텐데 요.”

나는 음험한 속내를 감추고 순수하 게 웃었다.

샤를로트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 을 했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오히려 아리엘 양에게 투표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저와 당신이 친하다는 걸 알고 계시니까요. 형평성을 굉장히 의식하는 분이거든요.]

“그렇군요.”

[으음, 대신 팁을 좀 알려 드릴게 요.]

샤를로트가 슬쩍 수정구로 가까이 다가왔다. 장미꽃잎 같은 입술이 속

닥거 렸다.

[일단, 흔한 색이나 작년에 선발되 었던 색을 입고 온 레이디는 뽑히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속으로 같은 색을 유행시킬 순 없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파스텔톤보다는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색깔을 추천할게요. 파 격적인 색 있잖아요. 으음, 피처럼 검붉은 색이라든가?]

샤를로트는 그 뒤로도 몇 가지 팁 을 전수해 주었다. 나는 열심히 머 릿속으로 메모했다. 강렬한 색이되 너무 난해하지는 않을 것. 그 대목 에는 별표도 쳤다.

“정말 고마워요, 샤를로트.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뭘요. 그런데 아리엘, 향수 영업보 다 메이 퀸을 노리고 있는 것 같네 요?]

“하하. 의외인가요?”

[음, 솔직히, 네. 사교계엔 별 관심

없었잖아요. 향수 영업할 때만 빼고 요.]

나는 대답 대신 허허 웃었다. 역시 샤를로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삐빗. 그때 수정구가 새된 소리로 울었다.

[어머. 마력이 다 떨어졌나봐요. 다 음에 또 연락할게요. 아리엘, 화이팅 이에요!]

“고마워요!”

우린 허겁지겁 인사를 마쳤다. 곧

통신이 끊기고, 수정구는 다시 내 얼굴만을 비췄다.

“리나, 내일은 하루 종일 휴업을 걸어야겠어.”

“네? 쉬시려고요?”

“음, 아니. 반대야. 엄청 바쁠 거거 든 ”

봄의 제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들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리스트를 작성하며 찻물을 마저 홀짝였다.

쏘 쓰 누

다음날 오전, 나는 휴업 팻말을 내 걸고 에른을 돌아보았다.

“길베르트 백작저로 갈 거예요. 같 이 가실 거죠?”

“……길베르트 백작저 말씀이십니 까.”

에른이 드물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끄덕였다.

“네. 길베르트 대상단의 상단주인 제이나 길베르트 님의 저택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에른은 더 묻지 않고 충실히 나를 에스코트했다. 머지않아 백작저에 도착한 우리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백작님께서 곧 내려오실 겁니다.”

백작가는 나를 꽤 융숭히 대접했 다. 나는 사용인이 내온 비싸 보이 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곧 제이나 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대외용 미소 를 걸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이렇게 오전 부터 찾아뵈어 결례가 아닌가 염려 스럽네요.”

“아닐세, 영애. 오히려 직접 여기까 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 가웠으니까.”

제이나의 뒤로 커다란 사냥개 셋이 조르르 따라 들어왔다. 그중 한 마

리가 내게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 다.

“오, 이제 날 알아보는구나?”

사냥개가 내 손바닥 위로 제 머리 를 마구 부볐다.

“명색이 사냥갠데 저렇게 칠렐레 해서야.”

제이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 만 그 표정은 흐뭇해 보였다.

“그래, 점심도 지나기 전에 찾아온 걸 보면 급한 용건인 것 같은데. 단 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지 그러 오?”

“아, 그럴까요, 제이나 님. 그러면 사양 않고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 습니다.”

대본은 완벽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글자를 그대로 읊었다.

“이번에 길베르트 상단이 모나크

왕국에 다녀올 거라고 들었어요. 마 침 제게 그 근처에 있는 세일라의

특산품이 무척 필요해서요.”

“호오. 저번의 그 허브 말이오? 라 일락이었던가?”

“아닙니다, 제이나 님. 아이리스 염 료예요.”

“아이리스?”

제이나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이리스는 이 제국에서 무척 희귀 한 꽃이었다. 게다가 아이리스는 중 요한 용도로 쓰이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청자색 염료였다.

아이리스로는 짙은 청색과 보라색 이 섞인 오묘한 빛깔의 염료를 만들

어낼 수 있었다.

청자색은 아름답기는 하나, 값이 꽤 나가는 편이라 그리 자주 보이는 색상은 아니었다.

“좋소, 무리는 아니지. 얼마나 가져 오면 되겠소?”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감사해요, 백작님. 오천만 비스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기간은 이번 달까지로 부 탁드려요.”

“오천만 비스…… 음?”

제이나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오천만 비스라고 말씀드렸어요, 백작님.”

“……그만한 양을 영애께서 직접 사시겠다는 건 아닐 테고.”

제이나가 미간을 꾹 누르더니 진지 한 얼굴로 다시 나를 마주보았다.

“지금 내게 투자를 제안하는 거요, 레이디?”

“그렇습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화가 빨리 통하는 백작님이 었다.

“오천만 비스어치의 염료 모두, 남 김없이 팔리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이것…… 참.”

제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인 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내막이 궁금

해지는군.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요? 영애.”

됐어!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제이나는 일단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그거면 반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상인이었 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며 곧장 내쫓 겼을 테니까.

나는 활짝 웃으며 떡밥을 던졌다.

“’봄의 제전’이라고 아시나요, 제이 나 님?”

“봄의 제전이라면…… 유명한 사교

행사 아니오? 그런 것엔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그게 아이리스 염료 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나는 살짝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리곤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라도 하 듯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이나의 표정 이 시시각각 변했다.

의아함, 황당함, 그리고 놀라움으 로.

“……레이디는 정말, 뭐랄까.”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제이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음, 그래. 대범하시군. 그 나이라곤 믿기지 않 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그 나이라 가능한 용 기인가. 제이나가 혼잣말처럼 중얼 거리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백작님. 한 달 안에 온 제도의 레이디들이 백작님께 찾

아와 염료를 팔아달라고 호소하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하나? 집사.”

제이나가 소파에 푹 몸을 기대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가 끄응, 침 음을 흘렸다.

“내륙 지방에서는 아이리스 꽃잎을 향신료로 사용한다지요. 만약 이 손 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더라도, 내륙 지방에 재고를 팔아치울 수 있 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 큰 손해 는 아니지요.”

“흠.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 군.”

“하지만, 주인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음?”

집사가 낮은 목소리로 제이나에게 속삭였다. 제이나의 미간이 눈에 띄 게 찌푸려졌다.

“……이런, 레이디. 안 좋은 소식이 군.”

나는 불안한 예감을 삼키며 물었

다.

“왜 그러시나요?”

“모나크와 세일라가 지리적으로 가 깝기는 하지만, 중간을 큰 협곡이 가로막고 있어. 그 협곡을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 하나를 건너야만 하 네.”

……음. 불안한 예감이 점점 더 짙 어진다.

나는 애써 웃음으로 표정을 감추며 귀를 세웠다.

“다리를 이용하지 않으려면 모나크 왕국을 빙 돌아가야만 하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레이디께서 부탁한 이 번 달까지 돌아오지 못할 게요.”

“백작님, 다리를 이용하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있지.”

제이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리는 우리 제국의 요새 도시 가 점령하고 있소. 여느 요새 도시 들이 그렇듯 그곳 역시 보통 도시보 다는 경비가 삼엄하지. 상단이 통과

하려면 미리 통행 신청을 해 두어야 만 하네.”

“그 말씀은, 지금은 통행 신청 기 간이……/

“지났지. 으음, 사실 다른 때였다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 오.”

제이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집사 가 얼른 그녀의 손에 궐련을 쥐어주 었다.

궐련을 입에 머금은 제이나가 비딱 해진 발음으로 말했다.

“보통 추가금을 얹어주면 기간이 좀 지났어도 통행을 허가해주는 경 우가 많았거든. 하지만.”

“하지만……?”

“요새 도시의 주인이 바뀐 뒤로 그 게 어려워졌다네.”

“……주인이 누구이기에요?”

내로라하는 대상 제이나 길베르트 가 뇌물로 굴복시키지 못할 인간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이름을 들은 뒤 제이나를 구 슬릴 생각이었다. 제아무리 그 사람 이라 한들 제이나 님의 부탁을 거절

하진 못할 거라고 바람을 넣으려 했 다.

그러나, 궐련 연기와 함께 제이나 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 에반스.”

후, 제이나가 궐련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 럼 입을 벌렸다.

“뇌물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 야. 세드릭 에반스, 그 바쁜 공작 전하께는 연락조차 넣기 힘들거든.”

“연락을 받아야 뇌물을 주지 않겠 소? 영애?”

“……그, 그렇죠. 하하.”

“그러니 이번 부탁은 아쉽게도 들 어주지 못하게 됐소. 안타깝군. 영애 가 호언장담하길래 나도 사실 그 결 과가 궁금했었는데 말이오. 한 달만 더 여유가 있었어도……『

“백작님.”

나는 눈을 내리깔곤 다짐하듯 한숨 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제이나를 마주보았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어요.”

“……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네.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고 올 테니까요.”

제이나와 집사가 서로를 마주보았 다.

두 사람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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