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내가 세드릭의 힘을 믿고 저를 무 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물론, 이 피해망상 가득한 5황자 전하보다야 세드릭과 훨씬 친한 것 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내가 세드릭의 편인 건 아니었 다. 5황자의 편은 더더욱 아니었고.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그 사실을 설명해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제키안이 선수 를 쳤다.
“그대의 뜻은 잘 알겠소. 이렇게 노골적으로 거절을 당한 건 처음이 야. 후후…… 재미있군.”
아제키안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곤 픽픽 웃었다. 순정만화 남주 인공도 하지 않을 제스처에 소름이 돋았다.
손을 뗀 아제키안이 똑바로 나를 마주보았다.
“좋소, 레이디. 지조와 절개는 레이 디의 덕목 중에 하나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그대를 더 높이 사게 되는 군.”
아제키안이 주절거렸다. 그의 얼굴 에서 노여움은 사라졌지만, 아무래 도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 너고 있는 듯했다.
“황자 전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 만 제 뜻은……『
“아니, 괜찮소. 구태여 변명할 필요 없소.”
아제키안이 내 입술 위로 제 검지 를 들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입을 다물고 멍하니 5황자를 올려다보았 다.
눈이 마주친 아제키안이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차피 그대는 곧 내 품으로 떨어 지게 될 테니.”
나는 입을 다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걸 뭐라고 해석했는지 아제키안 이 더 짙게 웃고는, 홱 등을 돌렸 다. 화려한 망토가 영화의 한 장면 처럼 펄럭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소. 조만간 또 보지, 레이디, 아니 아리 엘 양.”
아제키안이 멋지게 가라앉은 목소 리로 말했다.
문 앞에서 에른을 맞닥뜨린 아제키 안이 잠시 흠칫 굳었다. 투구 쓴 에 른과 의미 없는 눈싸움을 잠시 벌인
그는 가게 문을 열고 퇴장했다. 마 지막으로 내게 씨익 눈웃음을 날리 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아.”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지끈지끈 울 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세상에, 얼 른 레몬티를 타 드릴게요.”
리나가 고맙게도 얼른 내가 좋아하 는 차를 내주었다. 그녀가 내 귓가
에 속닥거렸다.
“저, 아가씨. 황족분들은 다 저런 말투를 쓰시나요?”
“아니, 아마 아닐걸.”
일단 황후는 평범하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했었다. 황족이 전부 아 제키안 같았더라면 이 나라의 미래 가 심히 걱정스러웠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리나, 오이 피클 남아 있어?”
“아, 네! 드릴까요, 아가씨?”
“응. 이왕이면 제일 시큼하게 절여 진 걸로.”
나는 의자에 늘어진 채 오이 피클 을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 #
“세상에, 오늘도 인파가 엄청나요.”
창밖을 내다본 리나가 질린 듯 혀 를 내둘렀다.
매그너스의 뷰티 살롱이 개업한 지
벌써 석 달째.
옆집에서는 오늘도 화려한 팡파레 소리가 울려퍼졌다. 잘 차려입은 호 객꾼의 호객소리, 우르르 몰려든 손 님들의 발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소란 속에서 잠자코 차를 홀 짝였다.
“신경 쓰지 마, 리나. 당분간은 계 속 저럴 테니까.”
“그게 언제까지일까요? 벌써 석 달 째인데.”
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어
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마 한두 달쯤은 더 저러 지 않을까?”
확실히는 모르겠다. 대충 던져본 수치였다. 아무리 황자와 매그너스 남작의 합동 작전이라고는 해도, 지 금 상태를 계속 유지하다보면 언젠 가 자금력에 한계가 올 테니까.
지금 ‘매그너스의 뷰티 살롱’은 아 주 대단했다. 말 그대로 황금을 공 기 중에 흩뿌리고 있는 수준이었다.
유리구두의 마법을 계속해서 무료
로 선사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걸 핏하면 신제품으로 나온 향수를 무 료로 나눠주었다.
매일같이 화려한 팡파레와 미남 미 녀 호객꾼으로 시선을 끄는 것도 잊 지 않았다.
“역시 한두 달은 더 걸리겠죠……?”
리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눈이 한적한 가게 안을 걱정스레 살 폈다.
나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리나. 정말 괜찮대도. 장사를 하려 면 이 정도 역경은 각오해야지!”
리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 었다.
지금도 단골 손님들은 계속해서 내 가게를 찾아주고 있었다. 난 그것으 로 족했다.
딸랑-
그때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듯 가 게 종이 울렸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 다.
“멜리사 님! 어서 오세요.”
“레이디 아리엘. 좋은 오후예요.”
멜리사가 양산을 접으며 함박웃음 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방문이 기꺼웠다. 매 상을 올려주기도 했지만, 한가로운 오후를 흥미롭게 만들어줄 가십거리 를 여럿 안고 와주었으니까.
빰바밤!
팡파레가 또 한차례 울렸다. 창밖 을 내다본 멜리사가 살풋 눈가를 찡 그렸다.
“오늘도 요란하네요.”
“네에, 그렇죠.”
“매그너스 남작이 저렇게까지 나올 줄이야치사하게 차양을 칠 때 부터 알아봤어요. 주변 상권을 다 죽이기로 아주 작정했나 보군요.”
“으음, 아마 그런 모양이에요. 하지 만 전 괜찮답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나를 멜리사가 걱정스러운 눈 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상체를 바 짝 가까이 당겨 앉았다.
“레이디의 가게니, 곧 회복세에 오 르겠지요. 하지만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면요?”
“시기를 앞당긴다뇨?”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멜리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역시 인맥이 최고죠. 레이디 아리엘. 혹시 단골 손님 중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가 있을까요? ……아.”
멜리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레이디 샤를로트와 친분이 있으시 죠?”
“음, 네. 하지만 샤를로트 양은 지 금 남쪽 섬으로 휴가 갔어요.”
그녀의 말대로 샤를로트를 가게로 초대하면 저번처럼 반짝 손님이 늘 어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샤를로트가 휴가 중이지 않 았더라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을 터 였다. 그녀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청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멜리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가 옅게 웃으며 찻물을 머금을 때였다.
“아차, 그렇지. 샤를로트 양 이야기 를 하니 생각이 나네요.”
멜리사가 짝 손뼉을 쳤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빛이 초롱초 롱 빛나고 있었다.
“봄의 제전!”
“……네?”
나는 찻물을 꿀꺽 넘기며 고갤 갸 웃했다.
멜리사가 상체를 내게로 바싹 가까 이 당겼다. 그리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닥거렸다.
“곧 3월이잖아요?”
“그런데요?”
“앙리에타 후작 부인께서 ‘봄의 제
전’을 주최하실 때가 다 되었다는 거죠!”
“……봄의 제전이요?”
나는 그 웅장한 단어에 눈을 끔뻑 였다. 멜리사가 설마 모르냐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봄의 제전. 앙리에타 제노스 후작 부인께서 매년 개최하시는 사교계 최대 행사 말이에요!”
앙리에타 제노스.
그 이름에 그제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앙리에타 제노스는 샤를로트의 어 머니 되시는 분이었다. 사교계의 여 왕이라 불리는 딸을 길러낸 어머니 답게 그녀 역시 사교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봄의 제전이란, 제노스 후 작 부인이 벌써 십수 년째 매년 개 최하고 있는 거대한 파티를 말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자만 출입 이 가능하다는 것.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봄의 제전 은 다름아닌 을 한 해 레이디들이 우상처럼 따를 ‘올해의 색깔’을 지 정하는 자리였으니까.
“……아하.”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손가 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벤트가 있었 지요.”
“내로라하는 사교계 인사들은 몽땅 참여할 거예요. 게다가 금남구역! 매그너스 남작이 쫄래쫄래 따라와 방해 공작을 펼칠 수도 없지요!”
멜리사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핵심만을 콕콕 짚는 지. 역시 괜히 잘나가는 기자가 아 닌 모양이었다.
나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당분간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개업하고 나서부터 근 일 년 가까 이 폭풍처럼 달려왔더니, 지치는 것 도 사실이라, 매그너스와 아제키안 이 선사한 불황이 사실 그리 꺼려지 지만도 않았다.
손님 없는 한가로운 시간도 나름대
로 장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굴러들어와 손까지 흔들어대는데 구태여 못 본 척 할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요, 멜리사 양.”
나는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 했다.
“마침 어젯밤에 연구를 마친 신제 품이 있는데. 괜찮다면 한 병 가져 가시겠어요?”
“신제품이 라니!”
멜리사가 벌떡 일어났다.
“기꺼이요, 레이디! 어디서 시향해 볼 수 있죠?”
신난 멜리사가 쾌활한 발걸음으로 가게를 휘저었다.
나는 그녀를 뒤따르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 아이디어들이 차곡차곡 줄지 어 짜맞춰졌다.
‘음, 이거
잘만 하면 잭팟일지도.
그것도 엄청, 큰 잭팟.
나는 흘낏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거대한 매그너스의 거대한 아성을 바라보았다.
‘내 2호점 오픈의 꿈.’
당분간은 정신건강을 위해 잊고 있 으려 했는데.
나는 오랜만에 그 빛나는 꿈이 현 실이 되는 광경을 다시 한번 머릿속 으로 떠올려 보았다.
노보 쑤
“되는 거 맞나?”
나는 수정구를 톡톡 두드렸다. 통 신용 수정구는 여전히 내 얼굴만을 비추고 있었다.
“리나, 이거 고장난 거 아냐?”
“설마요! 마탑에서 보증서도 제대 로 끊어줬다고요!”
“마탑이 불량품을 팔았을 리는 없
고
근데 왜 먹통이지?”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수정구 앞으 로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순 간이 었다.
삐 빗.
[어머나!]
수정구 가득 샤를로트의 얼굴이 떠 올랐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샤를로트가 눈을 토끼처럼 떴다. 나는 얼른 뒤로 물 러나서 흠흠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