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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5화 (55/153)

〈55 화〉

“그게 뭔가요?”

“앗, 아가씨, 모르세요? 요즘 엄청 인기 좋은 마법이에요! 그 마법을 걸면 외모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 정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요. 그 게 꼭 자정과 함께 마법이 풀리던 동화랑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 이에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이곳에도

비슷한 동화가 있나 보구나. 순간 다른 생각으로 흐르려던 사고회로를 리나가 잡아끌었다.

“하루 종일 염색을 하든, 머리를 자르든, 문신을 하든, 어떤 파격적인 짓을 해도 자정만 지나면 원상복구 가 되는 거죠. 잠시 일탈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외모를 바꾸고 싶은데 어울릴지 몰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찾는 마법이에요!”

리나의 설명을 듣자, 나조차도 혹 할 정도였다. 확실히 매력적인 마법 이었다.

“그래? 그렇게 좋은 마법이 있는데 왜 나는 여태 몰랐지?”

“가격이 엄청 비싸다고 들었어요. 하루짜리 일회용 마법으로 사용하기 엔 지나치게 비싸다던데요?”

“그럼 매그너스가 그 비싼 마법을 손님들에게 공짜로 뿌리고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아가씨.”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매일 같이 매그너스 뷰티 살롱 앞에 줄지어 선 손님들이 단번에 이해 가는 순간이

었다.

“잘나가는 사업가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재력가인 줄은 몰랐네.”

나는 혀를 내둘렀다. 리나가 걱정 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는 픽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리나. 매그너 스도 옆구리에 금광을 수십 개 낀 게 아닌 이상 자본력엔 한계가 있을 거야. 저런 출혈 이벤트를 언제까지 고 감행할 순 없겠지.”

“그렇겠죠, 아가씨?”

“응. 우린 그냥 우리 할 일이나 하 면 돼.”

유입되는 손님이 줄어든 건 사실이 지만, 단골손님까지 끊긴 건 아니었 다. 오늘 역시 몇 낯익은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 주었다. 그거면 됐다.

“음, 한가해진 김에 새 향수 연구 나 시작해 볼까/’

“또 일주일 동안 두문불출하시려고 요, 아가씨?”

“하하, 아니야. 이번엔 안 그럴게.”

겁먹은 리나를 달래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향실에 들어섰다. 그리 고 오랜만에 진득하니 조향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저녁식 사를 할 시간이었다. 나는 크게 기 지개를 켰다.

식사하러 내려가지 않으면 리나가 에른과 단둘이 마주 본 채로 저녁을 먹어야했다. 리나를 위해서라도 굶 을 순 없었다.

똑, 똑.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절도 있

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이 아니 라 지팡이 끝으로 두드린 듯한.

손님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손……,”

어라.

내 입이 그대로 닫혔다.

나는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며 눈꺼 풀을 세차게 깜빡거렸다.

5황자 전하?”

“좋은 저녁이오, 레이디 아리엘.”

아제키안이 유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더없이 자연스레 내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황족답다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 해야 할지. 그 누구도 자신의 앞길을 막 을 수 없다는 듯 당당한 몸짓이었 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아제키안이 주 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음. 작고 귀여운 공간이로군.”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내 가게는 굳이 말하자면 고풍스럽고 우아한 편이었다. 귀여운 인테리어를 추구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작지도 않고 말이야.’

“호오. 저 소녀가 그대의 하인인 가?”

아제키안이 리나를 가리키며 물었 다. 리나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내 가 5황자 전하라고 부른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리나가 삐걱거리며 간

신히 예를 차렸다. 아제키안이 그 뒤통수를 마뜩잖게 쳐다보며 말했 다.

“하인 한 명이라니,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열악한 환경이군.”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황자 전 하.”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아 제키안이 천천히 가게 안을 거닐었 다.

“향수병이

흐음. 크리스털이

아니군? 다른 보석도 아니고.”

아제키안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나 는 아제키안의 뒷모습에 대고 기막 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희대의 금수저 조향사도 아니 고, 어떻게 일일이 크리스털을 깎아 향수병을 만드냐? 하여간 이래서 있 는 놈들은…… 까지 생각했을 때였 다. 아제키안이 홱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그대처럼 뛰어난 인재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썩고 있다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군.”

아제키안이 낮게 목소리를 깔고 말 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지 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썩고 있다 고?

나는 황당한 나머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넋을 놓았다. 그런 내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아제키안이 자 비로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사실,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라네.”

“……제안,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어떤가, 레이디 아리엘. 좀 더 광활한 장소에서 한껏 그대의 빛나는 날개를 펼쳐보는 것은?”

빛나는…… 뭐요?

나는 순간 예의도 잊고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아제키안을 올려다보았다. 이 심상치 않은 어휘. 순간, 예전 가면무도회에서 만났던 한 영식이 떠올라 절로 몸이 떨려왔다.

아제키안은 내 경악 어린 얼굴을 또 제멋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 가 흐뭇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 놀랄 것 없네. 훌륭한 재능 을 지닌 장인에겐 훌륭한 후원자가 붙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한 아제키안이 내게로 슬 쩍 허리를 숙이곤 속삭였다.

“특히 그대처럼 아름다운 레이디에 게라면.”

“ 헙.”

리나가 혀를 씹었는지 숨죽여 끙끙 거렸다. 아제키안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재

차 물었다.

“좀 더 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대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는 이야 기네.”

투자.

그 단어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 이 있었다. 나는 아제키안의 표정을 살폈다. 이 사람은 내가 누구에게 투자를 받았는지 모르는 걸까?

뭐, 반드시 한 사람에게만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황자 의 투자’라는 건 분명 매력적인 단

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꺼림칙 한 기분이 들었다.

황궁 무도회에서 아제키안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아제키안과 세드릭이 대면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척 보기에도 둘은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제키안 쪽에서 세드릭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순수한 의도로 내게 접 근하는 것 같지 않은데.’

수상한 냄새가 났다. 아주 의심스

럽고 미심쩍은 냄새가.

나는 이 뜻밖의 제안에 대해 간단 히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소한의 확인은 해 보 기로 했다.

“투자해주시는 대신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겠죠, 황자 전하?”

“간단하오. 나는 그대가 내 사업체 의 수석 조향사가 되기를 바라오.”

“황자 전하의 가게라면……

아제키안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씩 웃으며 어딘가로 손가락을 뻗

었다. 그의 손가락이 호화찬란한 매 그너스의 뷰티 살롱을 가리키고 있 었다.

‘……황족의 후원을 받는다는 소문 이 사실이었군.’

역시, 매그너스가 아무리 사업가라 고는 해도, 삽시간에 저런 재력을 쏟아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며칠 전 매그너스가 내뱉었 던 ‘한 베]’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수석 조향사,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이곳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가 되었든 정확히 그 배를 임금으로 지 급할 것이오. 최상의 연구 환경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제키안이 또 내게 은근히 허리를 숙였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살 거렸다.

“앞으로 그대가 내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

아제키안이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 다. 입꼬리의 각도를 미리 계산이라 도 한 듯 아주 완벽한 미소였다.

빙그레 웃는 아제키안은 분명 아름 다웠다. 나는 내 심미안의 감상을 순순히 인정했다. 불공평하지만 이 나라 황족의 핏줄에는 잘난 미모까 지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긴 하지만, 그 럼에도 미남의 미인계는 확실히 파 괴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덤덤히 눈을 깜빡거렸다.

‘요즘 눈이 좀 높아졌거든.’

나는 태연하게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분한 제안, 무척이나 감사드립 니다, 황자 전하.”

내 인사에 황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줄 알 았다는 듯 그가 매끄럽게 웃었다. 웃음에선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가 지고 마는 권력자의 권태로움이 느 껴 졌다.

나는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공하오나, 저는 지금 제 가게에 무척이나 애착을 갖고 있습 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는 것은 제 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랍니다, 전하. 하지만 제안은 감사했습니다.”

나는 치맛단을 잡아 살짝 무릎을 굽히면서까지 예를 차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감히 황 족인 나를 무시해!’라고 성을 내진 않겠지? 순간 오래전 읽었던 여러 막장 소설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막장 소설 속이고, 여 긴 현실인걸. 게다가 원작〈그대 곁 에서 안식을〉은 막장도가 그리 높 지도 않았다.

……아마도? 내가 본 곳까지는.

나는 내심 불안을 숨기며 미소를 지으며 아제키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내 정중한 미소에 금이 가고 말았 다.

막장 소설 당첨?’

아제키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주 좋지 않았다.

그는 충격받은 듯 크게 뜨인 눈으 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와락 미간 을 구겼다. 그리고 기가차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하.”

기어이 헛웃음까지 내뱉었다.

나는 미소 지은 그대로 굳었다. 이 렇게 대놓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 을 티 내는 황자님께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하지? 어…… 일단 달래야 하나?

“황자 전하?”

내가 애써 정중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운을 띄웠을 때였다.

아제키안이 팍삭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군. 레이디에게는 나의 재력도, 인맥도 명예도 그 어떤 것 도 필요치 않다는 거군.”

나는 사회성을 닥닥 긁어모아 공손 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황자 전 하. 저 역시 황자 전하의 후원을 받 는다면 무척 영광이겠으나, 저만의 가게를 차리겠다는 제 꿈이……

“ 하.”

아제키안이 내 말을 끊고 헛웃음을 쳤다.

“그냥 솔직히 말하시오, 레이디. 나 보다 쓸만한 동앗줄을 이미 구했다 고. 그대 눈에는 내가 옮겨 탈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것 아니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내가 열심히 설명을 했잖아.

내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갔다.

이 인간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 잖아!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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