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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4화 (54/153)

〈54 화〉

“반의반 값이라니, 그러면 뭐가 남 기는 하나요? 다 같이 죽어 보자는 거야, 뭐야?”

기막힌 듯 리나가 혼잣말로 투덜거 렸다.

점원이 혼잣말을 해도 될 만큼 지 금 내 가게엔 손님이 없었다. 정확 히 말하면, 점심 시간부터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 전에도 간신히

두 명 정도만이 가게를 찾았을 뿐이 다. 가게 문을 연 이래 이런 불황은 처음이었다.

딸깍이며 찻잔을 내려놓자 리나가 움찔 어깨를 굳히며 나를 돌아보았 다. 나는 나를 걱정하는 리나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손님이 계속 없네. 혹시 손님 오 면 내가 응대할 테니 리나는 잠깐 올라가서 쉬고 있을래?”

“어유! 아뇨! 어떻게 그래요! 지금 잠깐 없는 거지 곧 잔뜩 몰려올 텐 데요!”

리나가 애써 긍정적으로 외쳤다.

글쎄…… 내 생각엔 당분간은 계속 이 상태일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옆집 에서 저런 대출혈 이벤트를 벌이는 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고, 실 제로 딱히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못내 궁금하긴 했다. ‘뷰티 살롱’이란 건 너무 애매한 이름이었 다. 구체적으로 뭘 팔고 있는 건지 도 궁금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법사의 선물이란 게 대체 뭐

야?”

나는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중 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 잣말이었다.

그걸 용케 들은 리나가 심각한 얼 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가씨. 선물이 라니, 너무 애매한 단어예요. 대체 뭘까요? 아니, 아니지. 이런 식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상술인 게 분명해요!”

리나가 현혹되지 않으려는 듯 제 양 뺨을 착 쳤다. 나는 리나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그치만 궁금하기는 하다. 그렇 지?”

“네? 아, 네, 사실 조금은……,”

“흐음, 슬쩍 보고 올까.”

내 중얼거림에 리나가 토끼눈을 떴 다. 그리곤 곧 비장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가씨께서 궁금하시다면 제가 염

탐해 볼게요!”

“응? 아냐, 아냐. 저쪽에선 리나 얼굴도 알잖아. 네가 들렀다는 걸 매그너스가 알게 되면 골탕먹이려 들지도 몰라.”

어린 리나에게 설마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우리 이웃님께선 그리 성숙 한 인간은 아니니 만약의 경우를 배 제할 수 없었다.

리나를 보낼 순 없고, 나 역시 직 접 가긴 그렇고.

“우리 얼굴이 다 팔려서 곤란하네.

흐음, 심부름꾼이라도 고용해봐야 하나? 믿을 만한 심부름꾼이 있으려 나.”

에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 까. 아냐, 경쟁자 분석은 중요한 거 잖아. 두 개의 상념이 번갈아 가며 떠오를 때였다.

“아가씨.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낮은 미성이 들렸다.

뜻밖의 방향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 는 고개를 돌렸다. 에른이 언제나처

럼 완벽한 기사 복장을 한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에른 경이 다녀오시겠다고요?”

“예. 저들이 제 얼굴은 모르니까 요.”

“어…… 아마 알 텐데요?”

이 거리에서 에른처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사 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매그너스는 백 미터 밖에서도 에른 을 알아볼 게 분명했다.

“모릅니다, 아가씨. 아가씨 곁에 머 문 이후 밖에서 얼굴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에른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 이라고? 그 말인즉……,

내가 생각을 잇기도 전에 에른이 순순히 투구에 손을 댔다. 커다란 금속성 투구가 매끄럽게 위로 들렸 다.

헉. 옆에서 리나가 숨을 집어삼키 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못박힌

듯 갑옷과 분리되는 투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우리의 반응과 대비되도록, 에른은 너무나 손쉽게 쑥 투구를 벗 었다. 그 사이로 짙은 금발이 반짝 거렸다. 나는 입을 벌렸다.

‘에른 경은 금발이었어!’

그와 처음 만난 이후로, 몇 달 만 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피부는 기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뽀얗고 깨끗했 다. 내내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도

땀방울 하나 없이 보송한 피부는 경 이로울 정도였다.

눈은 또 어떻고. 갈색 홍채는 헤이 즐넛처럼 따스한 빛깔을 띠고 그 위 를 긴 속눈썹이……,

잠깐. 지금 뭘 하는 거야, 나.

나는 얼른 에른의 얼굴을 샅샅이 훑던 시선을 거뒀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넋 놓고 쳐다봤네.

흠, 흠, 헛기침을 한 내가 말했다.

“오랜만에 벗으니까 시원하시죠? 앞으로도 그냥 벗고 다니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신원이 드러나

지 않는 편이 아가씨를 호위하는 데 에 더 도움이 됩니다. 갑옷에 경량 화 마법이 걸려 있어 그리 무겁지도 않고요.”

에른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 다. 반짝이는 금발이 고갯짓과 함께 흔들리는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나는 투구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 도 답답해 보였던 저 투구가 미모 봉인구였다고 생각하니 몹시 괘씸했 다. 곧 정신 차리고 친절한 미소를 띤 내가 말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에른 경. 갑옷

대신 평범한 남자 옷이 필요할 텐데 새로 사야할 것 같아요. 리나, 근처 에 남자 옷가게가 혹시 있는지 아 니?”

“네? 아! 네, 넷! 남자 옷가게요!”

리나가 깜짝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 며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목소리가 컸 나?

에른 역시 놀란 눈으로 리나를 쳐 다보았다.

놀란 눈이라니. 내내 투구를 쓰고 있을 땐 몰랐는데, 역시 감정이 있

는 사람이 맞았구나. 그때 리나가 외쳤다.

“바로 이 근처에 있어요! 제가 다 녀 올까요?!”

“으, 응. 그래주면 고마울 것 같아. 에른 경, 옷 수치가 어떻게 되세 요?”

에른이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대강 말해주었다. 그걸 받아 적는 리나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음, 그럴 만도 하지.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늘 배경 소품처럼 녹아들

어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절로 박 수가 쳐질 만큼의 미남이었다니.

게다가 세드릭에게 단련된 나조차 도 놀랄 정도니 리나가 동요할 만도 했다.

‘……음, 그래도 좀 걱정되긴 하 네.’

나는 와들와들 떨며 자꾸만 자기 손에 펜을 긋는 리나를 보며 생각했 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에 른을 평범한 행인으로 변장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좀 지나치게 잘생긴 행인이기는 했지만.

“자세한 것까지 홅으실 필요는 없 어요. 그냥 대충 주력 상품이 뭔지, 그리고 대체 마법사의 선물이라는 게 뭔지 그 정도만 알아봐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 조곤조곤한 설명에 에른이 고개 를 끄덕였다. 몹시 믿음직스러운 모 습이 었다.

‘이런 인재를 무료로 빌려주고 계

신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감사 합니다.’

나는 속으로 감사 인사를 되뇌었 다. 다음에 만나면 꼭 전해줘야지-

에른이 뒷문으로 가게를 빠져나갔 다. 그리곤 태연스레 행인의 물결에 녹아들었다. 나와 리나는 나란히 창 문에 코를 붙인 채 그 광경을 숨죽 여 지켜보았다.

고깔모자를 쓴 호객꾼이 에른을 발 견하곤 신이 나서 손짓했다.

“거기, 금발 미남 손님!”

에른이 천연덕스레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연기력에 찬탄의 박수를 보냈다. 검술만 뛰어난 게 아니었나 보다.

곧 에른은 호객꾼의 손길에 이끌려 빨려들듯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나 와 리나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 정시 켰다.

적막한 가게 속에서 초침 소리만이 똑딱똑딱 울렸다.

에른을 기다리며 창밖에 빼꼼히 얼 굴을 내밀고 있는 신세에 진한 회의 감이 들려던 찰나, 드디어 에른이 옆 가게에서 나왔다.

나와 리나는 가게 문 앞에서 에른 을 맞이했다.

“에른 경! 어땠어요?”

“들키지는 않으셨나요?”

“예. 의심을 하는 눈치는 전혀 아 니었습니다.”

에른이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로 품속의 물건을 늘어놓았다. 적진에서 구입해온 물건들이었다. 나는 얼른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 향수뿐만 아니라, 향기가 나는 펜과 손수건,

방향제 꾸러미, 입욕제 등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오호.”

나는 향기나는 깃펜을 바라보며 고 개를 끄덕였다. 실용품에 향을 접목 시켜 판매할 생각은 못했었는데, 이 렇게 보니 꽤 괜찮은 시도처럼 보였 다.

물론 향수 전문인 내 가게에서 따 라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이디어 자 체는 흥미로웠다.

그나저나 향은 어떠려나. 향기가

나는 깃펜을 코에 가져다 댄 나는 문득 몸을 굳혔다.

‘ 응?’

나는 다시 한번 코를 킁킁거렸다.

틀림없었다. 내가 향기를 착각할 리는 없으니까.

깃펜 위로 코를 묻은 채 나는 고 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내 이상반응을 느꼈는지 리나가 속 닥거렸다. 나는 리나에게 깃펜을 건 넸다.

깃펜을 킁킁거리던 리나가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이건.〈장미 정원〉이잖아요!”

리나가 정확히 향수의 다. 나는 순간 다른 걸 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니 리나의 후각 역시 모양이었다.

이름을 외쳤 잊고 흐뭇하 함께 일하다 꽤 예민해진

리나가 꾹 주먹 쥐었다.

“너무 똑같은데요! 물론 원조의 홀 륭함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요!”

“아냐. 이 정도면…… 같은 제품이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걸.”

나는 깃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 다.

〈장미 정원〉은 내 가게의 향수 중 가장 판매량이 높은 제품 중 하나였 다.

황홀한 장미향은 연인에게 어필하 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았 고, 낭만적인 기분에 젖고 싶은 사

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나는 이틀을 꼬박 바쳐 그 향기를 만들어냈었다. 그런데 이 깃펜에서 나는 향기는 바로 그 향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그냥 비슷한 정도가 아니 었다. 이 정도면……,

“거의 재료를 분석해서 복제한 수 준인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놀랍지 도 않았다. 매그너스가 또 매그너스 다운 짓을 저질렀을 뿐이다.

‘남의 아류작이나 만들어서야 성공 할 수 없을 텐데.’

아무래도 우리 이웃님께서는 아직 나만큼 재능 있는 조향사를 고용하 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뭐, 힘든 일 이기는 하지.

나는 깃펜을 내려놓고 다른 물건들 을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은 것도 몇 가지 있었지만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난 그쯤에서 적진의 물건들 을 밀어놓고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 었다.

“에른 경. 그래서 그 ‘마법사의 선 물’이란 건 뭐였어요?”

“아. 그것은.”

에른의 얼굴에 처음으로 그늘이 졌 다.

나와 리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에른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그 ‘선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엄청 난 건가?

“선물은 통칭 ‘유리구두의 마법’이 라 불리는 마법을 지칭하는 것이었 습니다.”

“헉!”

리나가 입을 가로막았다. 나는 어 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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