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윈스턴 영 애.”
“오랜만이네요, 남작님. 그날 무도 회 이후론 처음이에요.”
나는 부러 무도회를 언급했다. 그 러자, 매그너스가 찬바람이라도 맞 은 듯 몸을 움츠렸다. 곧바로 오만 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아직도 그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또 내게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다니. 민들레처럼 꿋꿋한 사 람이라고 칭찬해줘야 할까.
“윈스턴 영애, 난 다른 건 몰라도 영애의 교양만큼은 믿었습니다. 잘 교육받은 레이디시니까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다짜고짜 신고부터 하다니. 윈스 턴 백작께선 이웃사촌간의 사소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라고 가 르치셨나 보군요?”
이웃사촌. 재밌는 단어네. 나는 싱 긋 웃었다.
“이웃사촌이라.”
“틀린 말입니까? 공교롭게도 나란 히 건물을 쓰게 되었으니, 이제 우 린 이웃이 된 거죠. ‘네 이웃을 사 랑하라’라는 격언을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영얘?”
“그렇군요. 이웃사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나는 내 이웃사촌을 향해 활짝 미
소 지었다.
“이웃님, 그럼 차양을 거둬 주시겠 어요? 제 가게에 그늘이 드리워져서 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이웃님. 이 차양은 내 뷰티 살롱 디 자인의 핵심 중 핵심이어서요. 이웃 님께서 부디 양해해주시면 좋겠습니 다.”
“그러시군요. 이웃님의 뜻은 잘 알 았어요. 저어, 황실 공무원 여러 분?”
나는 공무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 였다. 매그너스가 콰직 이마를 구기 곤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타협할 의지가 조금도 없으시군 요, 이웃님?”
“사실 그래요. 억만금을 주셔도 제 가게에 그늘지는 꼴은 못 보거든 요.”
지금도 후원의 꽃들이 햇빛을 받지 못해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다. 그 생각을 하자 새삼 짜증이 치밀어올 랐지만 나는 겉으론 차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매그너스가 팔짱을 꼈다.
“그래서, 기어코 제 건물을 건드리 겠단 겁니까?”
“남작님께서 손수 차양을 철거해주 지 않으신다면, 그러는 수밖에요.”
“차양은 제 살롱의 핵심적인 디자 인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안타깝네요. 그늘도 제가 원하는 가게의 디자인이 아니어서요.”
매그너스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이웃끼리 배려는 덕목이거늘, 뭐 영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윈스턴 영애와 선의의 경쟁을 펼쳐보려 했 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저 역시 아쉽게 되었어요. 그럼 합의는 실패군요.”
나는 공무원들을 향해 안타까운 표 정으로 엑스자를 그어 보였다. 협상 결렬이란 뜻이었다. 공무원들이 알 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 시 마도기계를 가동했다. 위잉, 살벌 한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군요. 후회하실 텐데요, 윈스턴 영애.”
매그너스가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 다.
“저와 잘 지내셔야 할 겁니다. 머 지않아 한 배를 타게 될지도 모르니 까요.”
“한 배?”
“흐음,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요. 몹 시 유감스러운 만남이었습니……
“잠시만요. 매그너스 남작님?”
제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매그 너스가 순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 렸다.
멜리사가 번쩍이는 눈으로 다가왔 다.
“본의 아니게 엿들어서 죄송합니 다. 아, 제 이름은 ‘제국 일간지’의 수석 기자 멜리사 제논이라고 합니 다.”
“……기자?”
매그너스가 경계 어린 눈으로 멜리 사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악수를
무시당한 멜리사는 어깨를 으쓱이곤 손을 거뒀다.
“뷰티 살롱의 주인 되시죠? 듣기로 는 레이디 아리엘의 일조권을 침해 했다가 공무 집행을 당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맞으신가요?”
“……원하는 게 뭐요?”
“강제 철거를 당하는 중이신 것 같 은데 지금 심경이 어떠신가요? 일조 권은 고의로 침해하신 건가요?”
멜리사가 질문 공세를 쏟아냈다.
나는 속으로 풋 웃었다. 멜리사 제
논은 황궁 무도회에서 사귄 손님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젊었지만 이 제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인 제국 일간지의 수 석 기자였다. 비록 다른 귀족의 파 트너로 참여한 거긴 하지만, 황궁 무도회에 초청받았을 정도니 그녀의 영향력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팠다.
매그너스가 불쾌한 얼굴로 팩 고개 를 돌렸다.
“대답하지 않겠소! 날 취재하고 싶 다면 정식으로 면담 요청을 한 뒤 찾아오시오!”
“이 질문에만 대답해 주세요. 방금
레이디 아리엘과 선의의 경쟁을 관 두겠다고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그 건 레이디 아리엘에 대한 선전포고 로 해석해도 될까요?”
“무단 취재에 응하지 않겠소! 정식 으로 다시 찾아오시오!”
매그너스가 성을 내며 발걸음을 옮 겼다. 무척이나 보폭이 빠른 퇴장이 었다.
멜리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돌 아보았다.
“아쉽군요. 듣던 대로 까칠하신 분
이네요.”
“남작님께서 좀 그런 면이 있어요. 멜리사 님께서 이해해 주세요.”
나는 생긋 웃었다. 그때 요란한 소 리가 들렸다. 공무원들이 든 기계 아래 매그너스의 차양이 힘없이 무 너지고 있었다. 멜리사가 눈을 빛냈 다.
“이건 놓칠 수 없는 장면인데. 찍 어도 되겠죠, 레이디?”
“물론이에요.”
나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허락했 다. 내 가게는 아니지만.
‘그나저나, 한 배라니?’
매그너스가 흘렸던 의미심장한 단 어가 떠올랐다.
그건 무슨 이야기였을까.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위이잉, 마도기계 소리 를 배경음악으로 삼으며 나는 불쾌 한 예감에 미간을 좁혔다.
쏘 #
“하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커피잔을 수거하던 시종도, 서류를 분류하던 비서도, 보좌관 리키온도 깜짝 놀라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돌 아보았다.
세드릭이 눈꼬리에 웃음을 매달곤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가 고개를 내 저었다.
“역시 재밌게 사시는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
리키온이 조심스레 다가가 세드릭이 내려놓은 신문 위로 고개를 들이밀 었다.
신문엔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려 있 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요즘 폰타 매그너스가 오픈 준비 중이라는 뷰 티 살롱이었다. 거기 설치된 차양을 황실 공무원들이 거침없이 제거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 웃으신 건가? 황당한 광경이긴 한데……/
고개를 갸웃거린 리키온은 곧 사진 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사진이
포커스를 잡지 않은 외곽. 뷰티 살 롱의 옆 가게에 난 창문에서, 한 레 이디가 턱을 괸 채 옆집의 난리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야.”
리키온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 다. 사진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야 정황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리키 온이 보기에 이 차양 철거 사건의 주동자는 바로 저 흐릿하게 찍힌 레 이디였다.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키온이 피식 웃었다.
“윈스턴 영애께선 역시 화끈하시군 요. 매그너스가 그분 옆건물을 사들 였다기에 조금 걱정했는데, 개업도 하기 전 경쟁자의 건물 차양을 톱으 로 썰어버리시다니요.”
“레이디와는 적이 되지 말아야겠 어.”
세드릭이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 리로 말했다.
리키온은 그 목소리에 서린 희미한 애정을 놓치지 않았다. 계약 연인을 질색팔색하던 과거는 잊으신 건지,
지금 그는 확실히 아리엘에게 호감 을 갖고 있었다. 역시 남녀관계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리키 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전하. 폰타 매그너스 남작 말입니다.”
리키온의 말에, 세드릭이 커피를 마시며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새로운 투자자를 얻었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투자자?”
“예. 헛소문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들리는 바로는, 그 투자 자가 황실과 얽혀 있다더군요.”
흐음.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는 문득 지난 황궁 무도회 때의 그리 유쾌하지 않던 광경을 떠올렸 다.
지나치게 아리엘에게 가까이 다가 가 있던 아제키안과, 그를 피해 한 껏 허리를 뒤로 휘고 있던 아리엘.
“리키온.”
“예!”
“소문은 필요 없다.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와.”
“예, 전하!”
리키온이 큰 소리로 명령을 받들었 다.
세드릭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신문 속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쏘 쑤 노
여느때처럼 가게에 출근한 나는,
무심코 옆집을 쳐다보았다가 곧 멍 하니 입을 벌렸다.
‘……저게 뭐야?’
나는 기막힌 얼굴로 매그너스의 뷰 티 살롱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건물은 호화롭긴 해도 그럭저럭 거리에 녹아들어 있 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장 좀 보태 서 작은 성 수준으로 화려했다.
‘무슨 리모델링을 이런 속도로 해?’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귀여운 벽 돌집이었던 건물이 눈 깜짝할 새 작 은 성으로 탈바꿈하다니. 아무리 마 도기계들을 동원했다곤 해도 이건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아니, 지금 리모델링 속도에 감탄 할 때가 아니지.
지나다니는 행인들 역시 나처럼 충 격 받은 얼굴로 뷰티 살롱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오픈 전부터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건물에 이 정도로 투자했으니, 마
케팅도 공격적으로 할 테지.’
나는 다시 내 가게를 바라보았다.
가게의 외관은 훌륭했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데다가 아기자기한 매력 까지 있었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내 눈에는 정말 그랬다.
하지만 역시, 작은 성 수준의 건물 옆에 있으니 왜소해 보이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뱉곤 어깨를 으 쓱였다.
‘뭐, 괜히 신경 써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제품이다. 내가 신 경 써야할 것은 내가 만드는 향수, 그것 외엔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 들고 오픈 준비를 위해 가게로 들어 갔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가을 날씨가 화창한 사월의 어느 주말, 매그너스의 뷰티 살롱은 화려 히 막을 올렸다.
빠밤빰!
“ 엄마야!”
거대한 팡파레 소리에 리나가 깜짝 놀라 귀를 막았다. 나는 슬쩍 창밖 으로 옆집을 내다보았다.
“어서 오세요! 지금 방문하시면 개 장 기념으로 모든 제품이 반의반 값! 게다가 특별히 모신 마법사님의 선물까지 받으실 수 있답니다!”
화려한 고깔모자를 쓴 호객꾼이 발 랄하게 외쳤다. 파격적인 내용에 행 인들이 자석에 이끌린 듯 옆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 요.”
리나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