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화〉
정원엔 다양한 꽃들이 많았다. 신 기한 것은, 화려하고 값비싼 꽃들보 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담스런 들꽃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세드릭 은 그것이 전부 황후의 취향이라고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 까? 제 할머님께서 화훼 농장이 취 미셨다고.”
“아, 네! 알로나 농장을 가꾸셨다 고 하셨죠!”
알로나로만 이루어진 농장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뛰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자, 세드릭이 웃 었다.
“네. 누님께서 할머님의 취향을 그 대로 물려받으셨죠.”
“아, 그러셨…… 군요……?”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세드
릭은 5황자의 외숙부. 그렇다는 건……? 곧 간단한 결론이 나왔다.
‘세드릭의 누님은 황후 폐하!’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어쩐지 황후가 세드릭을 너무 스스 럼없이 대한다 싶었다. 스스럼없는 정도가 아니라, 정이 뚝뚝 흘러넘쳤 지!
“왜 그러십니까?”
세드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공작에, 황가의 외척에. 새삼 당신 이 온갖 좋은 설정이란 설정은 다 몰빵받은 남주라는 생각이 들어서 요, 라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람이 시원 해서요.”
세드릭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그 가 난간을 향해 나아가더니 내게 손 짓했다.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완전히 지
기 전에 얼른 오십시오.”
“아, 네.”
나는 황급히 세드릭의 옆으로 갔 다. 시선을 멀리 던지자, 오묘한 보 랏빛으로 물든 황혼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나는 숨도 잠시 멈추고 그 아 름다움을 구경했다.
그러고 있자니 절로 올라오는 말이 있었다. 나는 세드릭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생긋 웃었다.
“데려와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세드릭이 쿡쿡 웃고는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요.”
그 미소에 나는 문득, 새삼스레 무 언가를 깨달았다.
‘파트너 초청, 결국 취소하지 않았 네.’
당연히 취소할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면 레엘리우스 향의 효과 가 사라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
런데도 나는 여전히 세드릭과 이 자 리에 있다.
한 번 건넨 초청을 거두기 힘들다 는 건 안다. 세드릭이 그 정도로 매 너 없는 신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 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과는 별개로 어 쩐지 피부가 조금쯤은 간질거렸다.
뭐, 아무튼.
나는 괜한 상념을 지우고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쾅, 쾅!
굉음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으응, 리나, 나 오늘은 삼십 분만 더 잘게……/
쾅, 쾅, 쾅!
“하암…… 너무 졸려서 그래. 어제 나 자정 넘어서 들어왔잖아……/
어제는 광란의 밤이었지.
황후의 무도회에서 나는 영애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신나게 담소를 나 누며 향수 영업했다.
세드릭은 중간에 급한 일이 생겼다 며 자리를 비웠다. 조금 아쉽긴 했 지만, 어쩌면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향수 영업에만 온 정신을 다할 수 있었으니까. 내일 꼭 내 가게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한 고객님도 다섯이 넘었다.
아무튼. 열심히 일했으니까 삼십 분 정도는 늦잠 자도 되잖아! 그렇 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쾅, 쾅, 쾅, 쾅!
“세상에, 문 부서지겠다! 나갈게,
나갈게!”
언제부터 리나가 이렇게 과격해졌 담!
투덜대며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이건 문을 두드리 는 소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내게 친절하고 다정한, 세상에서 제일 상 냥한 소녀인 리나가 이럴 리 없었 다.
그럼?
나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쾅
또 굉음이 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창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눈앞의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내 옆집이 헐리고 있는 건데?
“리나! 리나!”
나는 헐레벌떡 아래층으로 내려갔 다. 차를 따르고 있던 리나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리나, 옆집이 헐리고 있어! 내 미 래의 2호점이!”
나는 다시 창문에 달라붙었다. 거 대한 마도기계가 거침없이 건물을 때려부수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 는 것 같았다.
내 계획이! 자금을 모아 옆집을 사 들이고 이 가게와 합치겠다던 야심 찬 계획이!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아가씨. 옆건
물은 분명 계속 주인이 없는 상태라 고 했잖아요? 그새 누가 매입을 했 나봐요!”
“대체 누가!”
나는 창문을 긁으며 슬피 외쳤다. 리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거기까진 알아보지 못했어 요, 아가씨. 너무 심려치 마세요. 옆 집에 좋은 상가가 들어오면, 그쪽 손님이 자연스레 이쪽으로 유입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나는 리나의 말을 듣고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기 로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보름 뒤.
눈 깜짝할 새 새로 지어진 옆집에, ‘뷰티 살롱’이라는 간판이 붙은 걸 목격한 순간.
그리고 그 간판 옆에 몹시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 간.
“하, 하하.”
나는 기가 막혀 허탈한 웃음을 뱉
을 수밖에 없었다.
부초 쓰
“아가씨!”
리나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후원에서 꽃향기를 맡고 있던 나는 허리를 폈다.
“왜 그래?”
“옆 가게에서 차양을 치고 있어요! 엄청 커다란 차양을요!”
“ 차양?”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이건 직접 보셔야 해요!”
리나가 나를 재촉했다.
후원을 빠져나와 가게 앞에 선 나 는, 옆 가게를 보자마자 헛웃음을 지었다. 리나의 말이 맞았다. 코끼리 도 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차양 이 옆 가게에 설치되고 있었다.
“저 차양 때문에 우리 가게에 그늘 이 지고 있어요! 이건 그거 아닌가 요? 그, 이름이 뭐더라?”
“일조권 침해입니다.”
에른이 덧붙이자, 리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거요!”
나는 거대한 차양을 올려다보며 생 각에 잠겼다. 햇빛이 사라지니 내 가게가 한순간에 칙칙해 보이기는 했다.
확실히 리나가 펄펄 뛸 만했다. 안 그래도 옆건물은 이전에 비해 지나 치게 높고 거대해진 상태였다. 거기 차양까지 설치하니 우리 가게는 옆 에 딸린 구멍가게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그늘이 지면 후원에 핀 꽃 들이 햇빛을 못 받잖아.”
“그렇죠! 꽃들이 다 시들어버릴 거 예요! 아가씨, 제가 가서 말해볼까 요?”
리나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 를 말렸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아가씨!”
“이런 문제는 자고로 법에 맡겨야 하는 법이거든.”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리나에게 펜과 종이를 부탁했다. 쓱쓱 메모를 한 나는 에른에게 말했다.
“에른 경, 토지청에 다녀와야겠어 요.”
“수행하겠습니다.”
마차를 타러 나온 나는, 한창 공사 중인 옆 건물 앞에서 낯익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옆 건물의 주인이자, ‘매그너스 뷰티 살롱’의 주인 폰타 매그너스였다.
날 발견한 매그너스가 몸을 움찔 굳혔다. 여기서도 보일 만큼 크게.
그러나 매그너스는 곧 고개를 탈탈 흔들곤 어깨를 크게 부풀렸다.
“조금 더 높게! 더 크게 지어 주시 오!”
“하지만 매그너스 님, 이미 마무리 되어가는 상태라……/
“어허! 최선을 다해보라는 이야기 요!”
매그너스가 쩌렁쩌렁 외쳤다. 나를 의식하는 듯 아주 크고 우렁찬 목소 리였다.
‘생각보다 재기가 빠른데?’
그날, 꼬리 말고 달아나던 모습으 로 미루어 보아 최소 몇 달은 잠잠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그
너스는 내 생각보다 더 강단 있는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규모.
나는 거의 다 지어진 건물을 흘긋 쳐다보았다. 건물은 지나치게 화려 하고 거대했다. 매그너스가 꽤 잘나 가는 사업가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자금력이 대단했었나?
“자, 자! 이 세논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지어 봅시다!”
매그너스가 짝짝 박수를 치며 인부 들을 독려했다.
“거, 좀 비키시오!”
마도기계를 운전 중인 인부가 매그 너스에게 짜증스레 손짓했다. 하지 만 매그너스는 건축 감독 놀이에 푹 빠져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재밌게도 노는군.’
나는 픽 한숨을 쉬곤 마차 위에 올라탔다.
보 쏘 누
다음날.
황궁 무도회에서 사귄 손님과 여유 롭게 티타임을 즐기던 중, 리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가씨! 옆집에 사람들이 찾아왔 어요!”
흐음. 나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 았다.
역시 황실 공무원들. 일처리 하난 빨랐다.
나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 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실 정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마도 기계를 들고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시작하지.”
“예!”
공무원들이 각자 든 마도기계가 우 웅거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살벌하 게 생긴 톱이 차양 지지대를 향해 날을 세웠다.
“잠깐, 잠깐!”
매그너스가 달려나왔다. 그가 공무 원들 앞에서 위협적으로 뒷짐을 졌 다.
“지금 뭣들하는 것이오?”
“공무를 수행중입니다만. 비키십시 오. 다칩니다.”
“아니! 못 비키네! 내 건물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먼저 밝히게!”
공무원 중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 는 자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일조권 침해로 신고가 들어왔습니 다. 확인해보니 이 정도로 거대한 차양을 설치하는 것은 노골적인 일 조권 침해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즉 시 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신고? ……하!”
매그너스가 크게 헛웃음을 뱉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직접 담판을 짓 고 올 테니. 그동안 내 건물엔 손가 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살벌히 외친 매그너스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쿵!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멜리사 님.”
“오, 천천히 볼일 보세요!”
멜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는 티타임을 방해받아 불쾌하다 기보다는 뜻밖의 사건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시죠?”
문을 열자 매그너스의 얼굴이 정면 으로 보였다. 나와 마주한 매그너스 가 순간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곧 아 무렇지 않은 척 턱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