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대놓고 뒷걸음질 칠 수는 없었기에 허리만 살짝 틀었다.
“예,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
“호오, 몹시 매력적이군.”
기분 탓일까?
황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깊
었다. 꼭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듯 이.
아제키안이 더 가까이 고개를 숙였 다. 나는 내 허리의 유연성을 시험 하며 더욱 허리의 각도를 틀었다.
이젠 정말 한 뼘 거리로 가까워진 아제키안이 속삭였다.
“레이디, 어떻소? 나와 함께 이곳 을 나가지 않겠소?”
“……예‘?”
“멀지 않은 곳에 내 궁이 있다오. 그곳에서 보이는 야경이 정말 아름 다운데.”
아제키안이 그렇게 말하며 매력적 으로 씨익 웃었다.
나는 멍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 설마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수작 걸고 있는 건 가?
‘내 착각 아니지?’
나는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나와 아제키안을 바라보며 수 군대고 있었다. 아주 재미난 가십거 리를 발견한 듯 하나같이 눈이 흥미
로 반짝거렸다.
나는 다시 아제키안을 올려다보았 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 아니, 이젠 솔직히 좀 느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첫눈에 반했다?
그런 낭만적인 가능성은 일단 제외 하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남은 이유는, 이 황자가 내 게 접근해서 뭔가 얻어갈 게 있다는 것뿐인데. 내가 황족에게 이득이 될
만한 걸 갖고 있던가?
‘돈은 아니고. 명예도 아닐 테고. ……인맥?’
그나마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 다.
내 고객들 중 제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조차 황족이 가진 인맥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 외에 또 있던가? 내가 가진 특 별한 인맥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파트너를 못 구했나, 아제키안?”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커 다란 손길이 내 휘어진 허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렇다고 내 파트너를 탐내면 안 되지.”
꺄아아!
주변에서 그런 환성이 들린 것 같
았다.
익숙한 체취에 안도감이 밀려들어 왔다. 고개를 돌리자, 미소를 짓고 있는 세드릭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반갑게 느껴졌다.
간신히 아제키안의 눈빛 공격에서 벗어난 나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섰 다.
에반스 경.”
머리 위에서 사나운 눈빛이 오갔 다. 아제키안이 이를 한 번 악물곤, 곧 애써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이야기를 좀 나눴을 뿐입니 다. 이렇게 부인의 외도를 목격한 남편처럼 달려오실 줄은 몰랐는데 요.”
“기왕 하는 비유, 곤경에 빠진 부 인을 보고 달려온 남편이라고 해주 지 그러나. 내 눈엔 레이디께서 몹 시 곤란해 보이셔서 말이지.”
“하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답지 않으십니다. 외숙.”
외숙?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그가 내 게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친 세 드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보냈다. 그 리곤 다시 아제키안을 노려보았다.
“내 파트너와 나는 이만 실례하 지.”
‘내 파트너’에 묘한 강세가 들어간 목소리였다. 세 드릭은 아제 키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웃 었다.
“가시죠. 레이디.”
“아…… 음, 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아제키안이 내게 말했다.
“또 뵙겠습니다, 레이디 아리엘.”
아제키안의 시선이 진득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흥미와 흥분으로 가득 찬 군중들의 시선 역시.
허.’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게 도대체 다 무슨 상황이람.
# # 쏘
순식간에 홀을 빠져나온 나는 세드 릭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전하.”
“죄송합니다. 갑자기 자리를 비워 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레 이디도 모시고 갔을 텐데.”
“아뇨, 그게 아니라. 5황자 전하 말이에요.”
세드릭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불쾌한 빛을 띠었다.
“그자가 레이디께 무례를 저질렀습 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느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좀 가까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무례까 지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황족인데, 그렇게 막 하대하셔도 되는 건가요?”
그러자 세드릭이 진심으로 의아하 다는 듯 되물었다.
“황족? 이름 끝에 벨레르를 달았다 고 저런 핏덩이도 대우해줘야 합니 까?”
“어…… 그렇죠. 신분제 사회니까 요?”
물론 세드릭의 신분도 까마득하게 높기는 하지만. 그래도 따지자면 황
족이 더 위에 있지 않나.
세드릭이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신분으로도, 지위로도, 핏줄로도 제가 우위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흐 음…… 그나저나.”
세드릭의 목소리가 갑자기 은근해 졌다.
“혹시 절 걱정하시는 겁니까?”
“ 예?”
“제가 황족모독죄로 끌려가지는 않
을까 걱정하신 것 아닙니까?”
“예? 아뇨. 전혀 아닌데요, 전하.”
내 코가 석잔데 누가 누굴 걱정해. 그냥 괜찮은 건가 싶었을 뿐이다.
내 해명에 세드릭이 빙글빙글 웃었 다.
“아니시군요.”
“네.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정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불쾌하 셨을 텐데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것 이 좋을 것 같아서요.”
흐음, 왜인진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배려가 흘러넘치시네.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모두 홀 에 모여 있는 건지 복도엔 가끔 시 종이 오갈 뿐 아무도 없었다. 마치 떠들썩한 아래층이 다른 세계라도 되는 듯이 아스라이하게 느껴졌다.
“이곳입니다.”
세드릭이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 자, 널찍한 야외 정원이 한눈에 들 어 왔다.
와아.”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희귀한 꽃도 가득했다.
“앗, 백과사전에서만 봤던 허브!”
길쭉한 보라색 풀을 발견한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얼른 허브 곁으로 다가간 나는 무릎을 굽혀 쪼그리고 앉았다.
“이런 향이었구나.”
풀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한껏 숨 을 들이마시자, 상상만 해 보았던 향기가 전해져왔다. 풋풋하면서도 알싸한. 왜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허 브라고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 다.
“마음에 드십니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 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 리도.
나는 고개를 돌리곤 활짝 미소 지 었다.
“맡아 보실래요?”
세드릭이 선선히 무릎을 꿇고 앉았 다. 정원의 돌길에 세드릭의 정장 입은 무릎이 닿았다.
나는 세드릭이 허리를 숙여 허브 위로 고개 묻는 광경을 잠시 감상했 다. 반쯤 저문 저녁노을이 반듯한 이마와 콧날을 타고 흘렀다.
두 눈이 똑바로 달린 인간으로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눈을 떼
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광경인 건 확 실했으니까.
그렇게 액자 바깥에 선 듯 눈앞의 미남을 감상하고 있을 때.
“음, 확실히.”
세드릭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녁노을이 역광을 만들었다. 노을 빛마저 장식해주는 남주인공의 미모 에 나는 세차게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갑자기 고개를 돌리시면 감 상하던 사람 놀라잖아요.
내 당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
이 유유히 감상을 뱉었다.
“독특한 것 같긴 하군요. 톡 쏘는 느낌이.”
“그렇죠?”
나는 순간 당황했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똑같은 감 상을 들으니 반가웠다.
“박하 같으면서도 겨자 같기도 하 고, 되게 묘하지 않아요? 비누로 만 들어도 굉장히 매력적일 것 같아요. 아니면 손수건에 살짝만 뿌린다거
나
맞아, 손수건에 뿌리면 확실히 매 력적이겠네.
수첩을 가져오지 못했기에 나는 머 릿속으로 열심히 메모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네! 무척요. 왜 여태 맡아보지 못 했을까?”
억울할 정도다.
한참 허브에 코를 묻고 있던 나는, 문득 세드릭이 나를 구경하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말도 없이 가만 히.
……너무 풀어져 있었나? 나는 살 짝 헛기침을 했다.
“음, 바람도 실컷 쐬었으니 이제 슬슬.”
“들어가자고요?”
세드릭이 내 뒷말을 대신 받았다. 나는 고갤 끄덕였다. 사람이 빠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아직 영업다운
영업을 한 번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자 세드릭이 뜻밖의 말을 내뱉 었다.
“조금만 더 있자고 하면요?”
“……어? 네?”
“그럼, 투정이라고 하실겁니까?”
단어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금 투정이라고 한 거 맞아?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사선으로 기 울였다. 그리곤 정말 서운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당치도 않은 연기였으나, 역광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의 얼굴이 기 가 막히게 처연해 보였다.
“조금…… 더 있을까요?”
나는 결국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 었다. 여태 세드릭의 외모에 감탄은 했어도 휘둘린 적은 없었는데. 저 처연한 표정 앞에선 어쩔 수 없었 다. 처음으로 백기를 든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왜 더 있자고 하는거 지? 따로 해야할 말이라도 있는 건 가. 아, 혹시?’
세드릭이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머지않아 쩍 금 이 갔다.
“혹시 제게 은밀히 따로 하실 말씀 이 있으신가요?”
은밀히 전할 말이라면, 역시 그건 가?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혹시 가게의 이번 분기 현황이 궁 금하신가요, 전하? 걱정 마세요. 나
중에 수치를 보여드리면 아시겠지만 벌써 손익분기점에 훌쩍 다다랐고, 투자금도 머지않아……,”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세드릭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그렇죠. 갑자기 일 이야기를 하면 전하께서도 싫으시겠죠. 죄송 해요.”
순순히 사과하자 세드릭이 의외라
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짧게 반성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야외 정원에까지 굳이 나 와 일 이야기를 하려 할까.
자타공인 일 중독자인 세드릭 에반 스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탁 트인 정원을 내다보며 말했 다.
“경치가 끝내주게 좋네요. 일은 됐 고, 경치 구경이나 해요, 저희.”
“이제 말이 통하는군요. 레이디.”
세드릭이 씩 웃었다.
훌쩍 몸을 일으킨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얌전히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