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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0화 (50/153)

〈50 화〉

웃고, 속닥이고, 우릴 구경하며 수 군대던 사람들이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회 홀의 끝자락, 단상 너머의 문 이 열렸다. 그 사이로 황금색 드레 스를 입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화한 인상의, 세월이 곱게 내려 앉은 얼굴.

저분이 이 나라의 황후이시구나.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감탄을 내

뱉었다.

황후는 자신의 아들, 5황자의 에스 코트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5황자 역시 황족답게 번쩍이는 금 빛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외탁을 한 건지, 황후를 닮은 얼굴이 제법 번 듯했다.

“저분들이 황족이시군요.”

레어 몬스터를 만난 것처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세드릭이 나를 당겼다.

“가죠.”

“네? 어딜요?”

“ 인사하러요.”

“네에?”

저 사람들과 일대일로 인사를 하자 고?

안 돼! 나는 발에 힘을 주었다.

세드릭 에반스야 초장부터 얽혔으 니 그렇다 치지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황족은 내게 연예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걸로 충분해. 인사까지 하고 싶진 않다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내게 세드릭이 답답한 듯 말했다.

“얼른 인사를 해치워야 조용한 곳 으로 장소를 옮길 수 있지 않겠습니 까.”

“그럴 필요 없어요. 전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요!”

“좀 오십시오.”

결국 나는 세드릭에게 끌려 황후와 5황자에게로 다가가야 했다.

두 황족 근처엔 이미 사람들이 바 글바글 몰려 있었다. 그러나 나와

세드릭이 지나가자 금세 널찍한 공 간이 생겼다.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만 면에 미소를 걸쳤다.

“에반스 경. 어서 오시오.”

와, 나는 나직이 감탄했다. 황후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근엄함과 기품이 흘러넘쳤기 때문이었다.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소. 황궁에 얼굴 좀 자주 비춰 주시지 않고. 오 랜만에 보니 무척 반갑구려.”

황후는 놀랍게도 세드릭에게 굉장 히 친밀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세 드릭 역시 자연스레 황후의 말을 받 았다.

“격조했습니다, 폐하. 요즘 조금 경 황이 없었어서. 죄송합니다.”

경황 없는 사람이 남의 가게 앞에 서 새벽까지 감시를?

나는 절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렀다. 황후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영애께서 경이 초청한 파트너 인가?”

헉, 연예인이 내 존재를 궁금해한 다.

나는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었다. 황후의 압도적인 기품이 나를 더 긴 장하게 했다. 나 지금 예법대로 서 있는 거 맞아?

황후가 은은히 미소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개를 해주시겠소, 에반스 경?”

세드릭이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 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 이쪽은.”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리엘 윈스턴. 윈스턴 백작가의 독녀 입니다.”

“호오.”

황후가 슬며시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에서 짓궂은 빛이 스쳤

다.

“경과 윈스턴 양은 어떤 사이인 가?”

“지 인입니다.”

세드릭이 더없이 담백한 대답을 뱉 었다. 황후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지인이든 무엇이든, 경이 파트너 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이구려.”

“파트너 없이는 출입하지 못한다고 못박지 않으셨습니까.”

“그랬기는 했지만.”

황후가 부채를 펄럭거렸다.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회장 공기가 상쾌하구려.”

황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의아하다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 다.

‘어라.’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코를 움찔 거리는 황후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 다.

그러고 보니, 황족에게 향수 영업 을 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이곳 에 온 거였지.

어쩌면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살며시,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쥘부채를 꺼냈다. 그리곤 만면에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정말 그렇네요, 황후 폐하. 오늘 날이 좋아 더욱 그런가 봅니다.”

간단한 말로 황후의 시선을 빼앗으 며 나는 부채를 살살 부쳤다. 건방 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물론 바람의 각도는 완벽히 계산한 채였다.

몇 초 후, 황후가 살짝 눈썹을 들 어올렸다.

“호오.”

먹혀들었나?

나는 설렘을 감추며 더 활짝 웃었 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후가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말했다.

“이제 보니, 회장이 아니라 윈스턴 영애에게서 나는 향기였군?”

만세!

나는 십 분의 일 쯤 걸려든 물고 기…… 아니. 황후 폐하를 향해 수 줍은 미소를 날렸다.

“제게 서요?”

“그렇소, 영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작년엔가 서방왕국 아난다에서 선 물로 보냈던…… 그 허브. 이름이 무엇이더라? 그 허브의 향을 닮았 어.”

설마 트레아를 말하는 건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향수에 든 재료가 몇 갠데. 트레아를 콕 집어 맞춘다고?

“아제키안, 이리 와 보거라. 네가

나 대신 기억해내다오.”

황후가 5황자를 손짓해 불렀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5황자 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황후보다 먼저 나를 훑었다.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어 째서인지 옅은 소름이 등골을 내달 렸다.

내게 짧게 시선을 던진 5황자가 황후를 바라보았다.

금세 예의 바른 아들의 얼굴이 된 5황자가 이리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니.”

“작년 즈음 아난다에서 들어온 선 물 목록 말이다. 거기 귀한 허브도 한 종류 있었지 않니?”

“그랬죠. 트레아였던가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황후가 손뼉을 쳤다.

그녀가 온화한 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쪽에 조예가 없어 잘 모르지만, 무척이나 귀한 허브라지? 그에 걸맞게 굉장히 매력적인 향이

났었는데. 윈스턴 영애에게서 꼭 그 때 맡았던 향과 비슷한 향이 나는 군. 아니, 그보다도 한층 더 깊고 우아한 향이구려.”

“과찬이십니다, 폐하.”

나는 부끄러운 듯 뺨을 감쌌다. 그 리곤 몹시 수줍은 미소를 걸쳤다.

그런 나를 세드릭이 신기한 것을 보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뭐, 왜, 뭐.’

나는 세드릭을 향해서도 방긋 웃어

주었다.

영업 뛰는 사람 처음 봐?

“괜찮다면 어디서 구한 향인지 물 어도 되겠소?”

“ 아.”

콩닥콩닥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기회가 온 것이었 다.

나는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곤 내 가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리엘의 향기 살롱이라는 가 게……/

“황후 폐하. 로웰 대신이 급히 폐 하를 찾습니다.”

……인데, 사실은 부끄럽지만 제가 운영하고 있답니다.

라는 뒷말이 무참히 잘렸다.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대신이 황후에 게 급보를 전했다. 황후의 눈빛이 굳었다.

“이런.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해야

겠소, 윈스턴 영애. 에반스 경.”

“아…… 무, 물론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잃지 않 았지만, 마음이 마분지처럼 찢어졌 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서 끊기다니!

나는 죄 없는 대신을 살짝 원망스 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급한 일인듯, 대신은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때 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피눈물을 삼키며 드레스 자락

을 들어올렸다.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었습 니다, 폐하.”

“곧 찾아뵙겠습니다.”

나와 세드릭이 차례로 황후에게 인 사를 건넸다.

그런 우리를 쳐다본 황후가 몹시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곤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윈스턴 영애, 혹 황궁 나들이를

하고 싶다면 에반스 경에게 부탁하 시오, 그는 자유 출입증을 지니고 있으니.”

예법에 맞지 않게 황당한 표정이 튀어나올 뻔했다. 뜬금없는 이야기 를 한 황후가 대신을 따라 멀어져갔 다.

나는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못 내 아쉬움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 았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몽땅 내게로

쏠려 있었다.

“저 영애께서는……/

“황후 폐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걸까요?”

나를 두고 속닥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호기심, 경계가 가득 어린 목소리들이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나는 사교계에선 햇병아리나 마찬 가지였으니까. 이제 막 황궁에 첫 발을 들인 햇병아리 중의 햇병아리.

그런 내가 대뜸 황후와 안면을 텄

으니, 호기심이 쏠리는 것 역시 당 연했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반짝였다.

‘기회는 끝나지 않았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후라는 대어를 눈앞에서 놓치긴 했지만, 실망하고 좌절할 틈이 없었 다.

여기 이렇게 수많은 잠재 고객님들 이 계셨으니까.

금세 열의가 차올랐다.

“저어, 전하?”

세드릭에게 잠깐 고객님들과 담소 를 나누고 오겠다고 이야기하려던 때였다.

세드릭의 시종이 다가오더니 무언 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미 간을 구겼다.

“레이디. 곧 돌아오겠습니다.”

“아, 네. 다녀오세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적어도 다섯 명의 잠재 고객에게 영업을 성공하 겠다는 포부를 새기면서.

세드릭이 떠나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흘끔거리며 수군 거리는 무리들이 이곳저곳 보였다.

어디부터 들러 볼까. 역시 가장 가 까운 곳부터가 낫겠지?

마음을 정하고 발걸음을 떼려는 순 간이 었다.

“안녕하시오, 레이디 윈스턴.”

낯선 목소리가 접근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움찔 놀랐다.

어느새 5황자 아제키안이 성큼 내 뒤로 다가와 있었다.

“……황자 전하.”

나는 놀람을 감추고 예를 갖췄다. 아제키안이 씨익 웃었다.

“레이디께서는 조향이 취미라는 소 문을 들었소.”

‘취미’가 아니라 생업이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기로 했다.

“친우 중에 향기 마니아들이 몇 있 는데. 내가 레이디에게 그들을 좀 소개해주면 어떻겠소? 내 친우들이 라면 좋은 고객이 될 것 같은데.”

황자의 인맥!

솔직히 혹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고 점잖게 웃으며 말했 다.

“새로운 분들이 제 가게를 방문해 주시는 건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흐음, 좋소. 곧 자리를 마련해 보

도록 하지. 그나저나

아제키안이 내게로 슬며시 허리를 숙였다.

“이게 그 유명한 트레아의 향기 요?”

너무 가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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