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49화 (49/153)

〈4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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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궁 무도회 당일.

“어머, 어쩜. 그새 피부가 더 고와 지셨어요.”

“정말 그래요. 백옥같기도 하지.”

“머릿결은 또 어떻고요? 비단처럼 결이 좋으세요.”

윈스턴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조잘 조잘 나를 찬양했다.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게 잘 대하라고 윈스턴 백작이 언질이라도 주었나 보지.’

현재 나는 오랜만에 윈스턴 백작저 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백작이 내 방 출입금지령을 내린 뒤, 나는 보란 듯이 집을 나가 생활 했었다.

그러자, 며칠도 채 버티지 못하고

백작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밖에서 생활한다 고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였 다.

그 이후로 종종 저택에서 잠을 청 하기는 했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윈 스턴 백작과 집사를 상대하는 게 여 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드레스와 수많은 장신구, 치창 일 손들을 가게에서는 도저히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 무도회에 간다는 말을 듣자마 자 백작가 하인들은 눈을 휘둥그렇 게 떴다. 그리곤 곧장 부산스레 나

를 갈고닦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게 벌써 두 시간 전 일이었다.

“이제 머리는 그만 빗어도 되지 않 나?”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사용인이 손사래를 쳤다.

“황궁에 드나드는 귀족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설탕 실타래처럼 곱다고 해요. 아가씨께서도 뒤쳐지시면 안 되죠!”

“조금만 더 견디세요.”

나는 끄응, 신음을 흘렸지만 사용 인들을 말리지는 않았다. 내내 거울 앞에 앉아 있느라 허리가 좀 뻐근하 기는 했지만, 오늘 하루 정돈 이 기 나긴 치장을 감내할 용의가 충분했 다.

몇몇 사용인들이 머리를 만지는 동 안, 다른 사용인이 거대한 드레스 행거를 밀고 들어왔다. 호화로운 드 레스들이 수십 벌 걸려 있었다. ‘아 리엘 윈스턴 시집 잘 보내기’가 지 상최대 목표인 윈스턴 백작답게, 그 는 딸의 치장에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 었다.

“드레스를 산 지 오래되어서, 요즘 유행하는 벨 소매 디자인은 없을 거 예요.”

“미리 쇼핑을 하셨어야 했는데. 아 아, 아쉬워라.”

사용인들이 아쉬움을 토했으나 난 전혀 아쉽지 않았다. 여기 걸린 드 레스들만 해도 충분히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아가씨의 목 라인을 돋보이게 해줄 거예요.”

“그건 색깔이 조금 고전적인걸. 요 즘 유행하는 이 하늘 빛깔 레이스는 어떠세요, 아가씨?”

사용인들이 드레스를 두고 열띤 토 론을 벌였다.

나는 그녀들이 토의하는 동안 보석 함을 살폈다. 함 안에서는 수많은 보석이 앞다투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아쿠아마린.

이걸 다 내다 팔면 확장 공사 자 금에 톡톡히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온갖 보석이 있었지만, 내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 랐다.

“아가씨,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 모렐로 산 루비군요. 백작님 께서 큰 맘 먹고 구매하신 보물이지 요.”

매혹적인 붉은빛이 잡아끌듯 내게 손짓했다.

나는 큼지막한 루비를 가만히 들여 다보았다.

예뻤다. 꼭 누군가의 눈처럼.

‘목걸이는 이걸로 할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결정했다.

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보석 을 선택한 건지는 깊게 고민하지 않 은 채.

“아리엘 아가씨.”

집사가 나를 불렀다.

노집사는 드물게 긴장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에반스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 다.”

벌써?

나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니, 벌써가 아니군. 시곗바늘은 어느새 무도회 시작 시간에 가까워 져 있었다.

세드릭은 에스코트하러 오기로 약 속한 시간보다 정확히 오 분이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가히 완벽에 가까 운 에티켓이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어쩌면 좋아, 아직 팔찌를 완벽히 고르지 못했는데!”

사용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삼십분이나 토론한 끝에 고른 팔 찌잖아. 완벽해. 이제 일어날게.”

“안 돼요, 아가씨! 아직 뒷머리의 컬이 완벽히 잡히지 않았는데!”

나는 사용인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

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꽤 그럴듯했 다. 여러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완성 한 외관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벌꿀을 부은 것 같은 머리카락은 촉촉히 동백유를 입어 한층 윤기가 흘렀다. 조명에 반사되어 옅게 반짝 거리는 피부는 오늘따라 더 매끄러 워 보였다. 목걸이에 자잘하게 달린 에메랄드는 청록색 홍채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드레스, 팔찌, 코사지와 머리장식. 어느 하나 정성 들이지 않은 게 없 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그 리 화려하다는 황궁 한가운데에서도

그리 이질적이진 않을 것 같았다.

슬쩍 거울을 돌아보는 동안 집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알아. 잠깐만.”

나는 화장대 위에 고이 모셔 놓았 던 향수병을 쥐었다.

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크리스털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하인들이 안 그 래도 궁금했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 으로 향수병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볍게 병을 돌리곤, 손목에

한 번. 그리고 머리카락에 한 번 분 사했다.

‘향이 강한 편이니까 이 정도면 되 겠지.’

막 뿌린 향수 입자가 은은히 피부 에 스며들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 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간 아까워서 제대로 맡아 보지도 못했던 향이 내 기분을 황홀히 끌어올렸다.

‘이거지.’

나는 흡족히 미소 짓곤 도로 눈을 떴다.

사용인들이 몽롱한 얼굴을 하곤 나 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런 향은 처음 맡아 봐 요……

나는 흐뭇함을 숨기지 못하고 입가 를 움찔거렸다.

처음 맡아볼 만도 했다.〈파도가 전한 유리병〉은 향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직 제도에선 유 행한 적 없는 색채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꽃향기, 나무향기가 나는 향수는 널리 퍼졌지만 이 향수처럼 바닷바 람의 짭쪼름함을 더한 향은 없었다.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 데, 잘 먹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런. 오 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 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끌어올리 곤 계단을 내려갔다.

저 멀리, 현관 근처에서 세드릭의 형체가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살며시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정 안 가는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

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익숙한 사람 이 그리웠나 보다.

나를 발견한 세드릭이 기대 서 있 던 몸을 바로 폈다. 그가 계단을 내 려오는 내게 빙그레 미소를 보냈다.

“좋은 저녁입니다. 레이디.”

“네, 좋은 저녁……?

세드릭을 똑바로 바라본 나는 말꼬 리를 흐렸다.

조금 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을 보고 자화자찬했었는데, 몽땅 취 소다.

누군가 간밤에 공작님을 통째로 성 수에 담갔다 뺀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잘난 미모인데, 피부가 더욱 반짝반짝해져 있었다. 금빛 견 장으로 장식된 청록색 코트가 피부 처럼 잘 어울렸다. 명화 속 초상화 를 통째로 끄집어낸 것 같았다.

“레이디?”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완벽한 각도의 턱선이 조금 더 드러 났다.

나는 멍하니 세드릭의 턱선을 훑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 죄송해요. 잠깐 목이 잠겨서.”

나는 큼큼 기침하는 시늉을 했다. 세드릭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늦은 오후라 그런 지 날이 좀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 리신 거 아닙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 다.

설마 또 저번처럼 이마에 손을 대

려고?

그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 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뇨,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 하지 마세요.”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세드릭이 싱겁다는 듯 픽 웃었다. 미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젠 슬슬 정신 차리자.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하며 말 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가 볼까 요.”

“좋습니다.”

세드릭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에스코트는 마차 앞에서만 해 도 되는 거 아닌가. 잠깐 그런 생각 이 들었지만, 나는 곧 얌전히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가까워진 그에게서 옅은 상록수 향 이 났다.

쑤 쏘 쓰

처음으로 방문한 황궁은 엄청났다.

“세상에, 다이아몬드를 통째로 녹 여 발랐나.”

이렇게밖에 묘사하지 못하는 내 표 현력이 안타까울 정도로.

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기둥 장 식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드릭이 픽 웃었다.

“선선대 황제의 사치가 엄청나기는 했죠/

폐하도 아니고 황제라니! 나는 나 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세드릭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들 동물원 구경 이라도 온 듯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 보고만 있었으니까.

“……얼굴이 좀 따갑네요.”

“레이디의 미모가 눈부셔서 그런가 봅니다.”

세드릭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세드릭 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세드릭이 나 를 마주봐오는 바람에 얼른 시선을 도로 돌려야 했다. 미남은 심장에 해롭다던데,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드릭이 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 데.”

뭐야. 왜 가까워지는 거야.

나는 몸을 굳힌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이 몸을

굽혀 귓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향수, 바꾸셨습니까?”

“네에. 일주일 동안 조향실에 틀어 박혀서 개발한 거예요.”

“아. 그때.”

그때를 떠올리는지 세드릭이 미묘 하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레이디께서 일주일 동안 고생하신 덕분인지, 향이 매력적이군요.”

흐음. 매력적이라. 나는 팔짱을 꼈 다.

리나의 폭포 같은 미사여구에 익숙 해져서 그런가, 이 정도 칭찬은 이 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귓가에서 피 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을 비치는 해변가를 맨발로 걷 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저녁노을의 찬란함과 바닷가의 고요함을 그대로 담은 향이군요. 향으로 이런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기가 그지없 습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방금 뭐라고?

장난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곤 대답했다.

“흐, 흠. 감사해요.”

“그래서.”

세드릭이 또 슬쩍 가까워졌다.

그래서라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변가, 걸어본 적 있습니까? 맨

발로.”

낮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세드릭을 돌아보 았다. 그는 매력적인 미소가 짙게 깔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그 뜬금없 는 질문에 대답했다.

“해변가는 보통 신발을 벗고 걷지 않나요? 모래 들어가잖아요.”

“……그렇군요.”

세드릭이 어쩐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싱겁기는. 어깨를 으쓱일 때, 어디 선가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와 5황자께서 드십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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