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화〉
세드릭의 말엔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먼저, 우리는 반갑다고 차 한 잔 할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리에 없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돌아가질 않고, 올 때까지 기 다렸다니…… 무척 이상했다.
나는 개중 가장 이상한 지점을 짚 었다.
“바쁘신 분께서 기약없이 저를 기 다리셨다고요? 차를 얻어 마시려고 요? ……아닉시아 향에 문제가 있었 던 건 아니고요?”
“글쎄요, 솔직히 상태가 조금 안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세드릭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 는 문득 나와 그의 거리가 몹시 가 깝다는 것을 깨닫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인지 이제는 꽤 괜찮아진 것 같군요.”
“’이제는’ 이라니…… 정말 몸이 안 좋으셨던 거예요? 잠깐 들어갔다 가 가실래요? 향수도 지금 바로 새 걸 만들어드릴……/
“아뇨. 됐습니다. 서른세 시간이나 내리 잘 정도로 피곤한 분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마저 쉬십시오.”
세드릭이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 리로 말했다.
“그럼 가겠습니다.”
“……진짜 그냥 가셔도 괜찮으세
요?”
비록 새벽부터 남의 계단을 점령한 불청객이긴 하지만, 빈손으로 돌려 보내려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세드릭이 정중히 묵례했다. 정말 이대로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멍하 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 그렇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계시겠죠? 다음 주 일요 일. 황궁 무도회.”
아직 유효한 제안이었구나. 그거.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묵례한 뒤 등을 돌렸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서 묘하
게 상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멀어져가는 세드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난 데없이 나타난 세드릭 에반스. 그리 고 그와 나누었던 실없는 대화들.
멍하니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다가, 세드릭이 무도회 초청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 설마.’
혹시,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 겠지만.
‘아직도 향의 효력이 다하지 않았 다면?’
에이. 역시 그럴 리가.
나는 실없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 다.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다.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찌르르르.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잠든 거리가 깨어나고 있었다. 하나 둘 거리의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여는 것 이 보였다.
“하암.”
나는 무심코 하품을 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벽, 머릿속이 아직도 조금은 혼몽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세드릭의 뒷모습 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게 문을 밀자, 딸랑, 맑은 은종 소리가 나를 반겼다.
쓰 쏘
한가로운 휴일.
나는 노천 카페에 앉아 얼음 동동 띄운 꽃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깊은 바닷물처럼 시원스러운 색깔이 찻잔 속을 일렁였다.
그걸 바라보던 나는 탁,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정했어!”
내 맞은편에서 수를 놓던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요, 아가씨?”
“새로운 향수의 이름. 완벽한 게 떠올랐어!”
“와아, 정말요? 제게도 귀띔해주세 요!”
리나가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흠, 흠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파도가 전한 유리병〉.”
“오……
리나가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예뻐요. 서정적이에요! 향이랑도 너무 잘 어울리고요. 꼭 바닷바람 맞으며 해변가를 거닐듯 시원스러운 향이잖아요?”
리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했 다.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이며. 절로 뿌듯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치? 잘 어울리는 것 같지?”
“네. 지금 계절이랑도 딱 맞고요. 완벽해요!”
여름의 기운이 짙어지는 무렵. 이
바다 내음 가득한 향수를 개시하기 에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허브를 선물 해 준 제이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 고 있는데, 누군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저어, 아리엘 님. 실례지만, 어쩌 다가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또래의 아가씨가 빨개진 얼굴로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마 몇 번인
가 내 가게에 들른 손님인 것 같았 다.
나는 재빨리 활짝 접객용 미소를 얼굴에 걸쳤다.
“실례는요. 어쩐 일이신가요?”
“그게, ‘새 향수’란 단어를 문득 들 어서요. 혹시 언제쯤 첫 판매를 하 실지 귀띔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사가고 싶어요!”
“ 아.”
나는 미안함에 눈썹을 늘어뜨렸다.
“죄송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답니다. 사실 판매를 할지 말지도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어요.”
정식 판매를 하기엔, 주재료인 트 레아의 양이 너무 적었다.
더 많은 양을 구해보려고 노력하곤 있지만…… 워낙 희귀한 허브인 탓 에, 필요한 양만큼 구할 수 있을지 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가씨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 신제품이 나오나 싶어 기뻤 는데 안타깝네요. 저, 말씀드린 김
에…… 아리엘 님의 향수, 언제나 잘 사용하고 있어요! 저희 살롱 사 람들은 전부 다 아리엘 님 향수만 쓴답니다.”
“어머, 감사해요. 기쁜 이야기네 요.”
나는 수줍게 웃었다.
요즈음 입소문이 많이 났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가 장 많은 오후 시간대에는 접객이 힘 들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이러다 더 넓은 가게로 이사를 가 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침 옆 가게가 비어 있던데, 그쪽 건물까지 확장 공사를 하려면 자금 이 얼마나……,
그런 꿈에 한껏 부풀어 있을 때였 다.
“아리엘 윈스턴 님 되십니까?”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 입은 시종이 내 이름을 불렀다.
눈에 익은 정복이었다. 시종의 견 장에 찍혀 있는 가문의 문장을 본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제가 맞습니다만. 무슨 일인가 요?”
“안녕하십니까, 아리엘 님.”
시종이 꾸벅 정중히 묵례했다.
그리곤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황 금빛으로 빛나는 손바닥 크기의 카 드였다.
“이걸 전달해드리라는 주인님의 명 령이 있었습니다.”
“주인님이라면 어떤…… 아니. 뻔 한 물음이겠군요.”
물으나마나였다.
나는 세드릭 에반스의 시종을 향해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바로 답장해야 하나 요?”
“아니오. 전달만 해 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황금빛 카드를 앞뒤로 살폈 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카드였 다. 두껍고 빳빳했으며, 좋은 향기가
났다.
‘우디 계열이네. 꽤 품질 높은 향 이잖아.’
깊은 나무 향에 이끌려, 하마터면 카드에 코를 묻을 뻔했다. 나는 가 까스로 여기가 밖이란 것을 떠올리 곤 얌전히 카드를 개봉했다.
“어머나, 아가씨!”
카드를 알아본 리나가 놀란 목소리 로 말했다.
“황실에서 온 카드네요!”
주변 사람들 몇몇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리나 가 합,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입 을 가렸다.
카드의 내용은 단순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있었지 만,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곧 열릴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 는.
“아가씨, 아가씨. 그거 맞죠? 성 엘레이스의 축일 기념 황실 무도회
요!”
리나가 상체를 내게 가까이하곤 속 닥속닥 물었다.
“일 년 중 신년제 다음으로 대대적 인 황실 행사잖아요! 신년제 행사가 규모는 더 크지만, 모두에게 황궁을 개방하는 신년제와는 달리 성 엘레 이스의 축일에는 직접 황후님께 초 대받은 극소수의 귀족들만 참석이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건 금시초문이었다. 세드릭이 내 게 건넨 말이라곤 그냥, 무도회에 함께 참석해 달라. 그게 전부였으니 까.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이니만큼 호화로우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 보다 더 중요한 행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낯선 것을 만지듯 초대장을 만 지작거렸다.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다녀오셔 서 꼭 이것저것 이야기해주셔야 해 요?”
“으응? 무슨 소리야, 리나도 함께 가야지. 넌 내 하나뿐인 개인 시종
이잖아. 네가 아니면 누가 날 수행 해 주겠어?”
“어? 정말요? 저도 참석할 수 있 을까요?”
리나가 눈에 별을 박았다.
“그럼. 당연하지.”
“저어, 레이디. 지나가다 본의 아니 게 이야기를 듣고 말았습니다만.”
모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든 나는 그제야 주변에 앉 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 은 루퍼스 켄드릭입니다. 유서 깊은 켄드릭 남작가의 장자로서, 레이디 의 파트너로 손색이 없을……
“잠깐, 잠깐. 자네는 잠깐 빠져 있 게. 레이디 윈스턴!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황제 폐하의 오랜 우군인 리 마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이게 다 뭐야.
영식들이 내게로 몰려들었다. 제각 기 스스로의 장점을 뽐내는데, 여러
명이 동시에 이야기하는 바람에 제 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영식들의 말 을 끊었다.
“실례지만, 여러분. 제겐 이미 파트 너가 있습니다.”
“ 엑?”
“그렇습니까?”
세드릭의 시종이 내게 동의하듯 근 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식들이 탄 식 했다.
“ 아쉽군요.”
“혹시 파트너께서 불참하게 되시면 제가 레이디를 모시고 싶습니다.”
몇 영식들이 포기하지 않고 내게 명함을 건넸다. 예의상 웃으며 명함 들을 받고 나서야 영식들이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리나가 속닥거렸다.
“어머, 우습네요, 아가씨. 아가씨께 초대장이 있다고 홀랑 얻어타려 하 다니.”
“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는 흔
하지 않으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문제는, 이렇게 귀한 기회를 얻었 음에도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황궁에서 만날 수 있는 고급 인맥 들, 물론 좋지.
하지만 나는 정치에 뜻이 있는 것 도 아니었고, 크게 사업을 벌릴 생 각도 없었기에 황궁 무도회라고 해 서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아냐, 생각을 고쳐먹어보자.’
나는 처음 무도회에 참가하던 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내게는 몹시도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샤를로트에게 향수 영업하 기’가 그것이었지.
비록 스케일은 커졌지만 황궁 무도 회 역시 똑같은 무도회였다. 또 그 때와 같은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었다.
‘마침 자랑하고 싶은 향수도 있고.’
나는 이제 얼음이 다 녹은 꽃차를 내려다보았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빛깔이 향수〈파도가 전한 유리병〉 을 떠올리게 했다.
“좋아. 꿈은 크게 가지랬어.”
나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래, 좋아. 황궁을 찾은 귀족들에 게 향수를 영업해보자.
혹시 알아? 황족이라도 한 명쯤 넘어올지.
리나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네? 무슨 꿈이요?”
“아무것도 아냐. 리나, 팬케이크 더 먹을래?”
“네!”
나는 활짝 웃으며 벌꿀 얹은 팬케 이크를 더 주문했다.
황족을 고객으로 모실 수만 있다면 야, 이까짓 팬케이크 열 장이고 스 무 장이고 매일매일 사줄 수 있지. 나는 황족이라는 이름의 큰손에게 향수를 마구 팔아치우는 상상을 하 며 방긋 웃었다.
산들바람이 살랑이는 어느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