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화〉
새 지저귀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 다.
몸을 뒤척이자 폭신한 이불이 내 몸을 받쳤다. 극상의 부드러운 감촉 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호텔 최고야
여기서 쉬기로 한 건 최고의 결정 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리나가 좋아 하는 꽃이라도 사들고 가야지.
나는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 침까지 푹 잤더니 쌓인 피로가 몽땅 풀린 듯했다. 몸이 무척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해가 이제 막 고 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구나.’
생각보다 짧게 잔 모양이었다. 하
루 종일 잘 줄 알았더니.
나는 가볍게 씻고 머리를 빗은 뒤,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왔다. 지 배인이 반가이 나를 맞았다.
“일어나셨습니까? 레이디. 어제 하 루 종일 보이지 않으셔서 걱정했습 니다.”
“네? 하루 종일이라니요?”
“어제 저녁 뷔페에도 나오시지 않 고, 노크를 해도 응답이 없으셔서 요.”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강한 불안을 느끼며 오늘의 날짜를 물었다.
지배인이 상쾌하게 답했다.
“3월 14일입니다, 레이디.”
맙소사.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믿기 힘든 진실이 뒤통수를 때렸 다.
나는 무려 꼬박 만 하루하고도 반 나절을 꿈나라에서 보낸 것이다.
‘세상에. 리나가 엄청 걱정했겠다!’
나는 서둘러 마차를 불렀다.
다행히 호텔과 가게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곧 마차가 가 게 앞에 멈춰섰다.
‘리나는 아직 자고 있으려나?’
혹시 모르니 조용히 들어가야겠어.
나는 조심조심 마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에른이 내 손을 붙잡아 주 었다.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내 가게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밝은 베이지색
외벽이 새벽 이슬을 맞아 반짝였다.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튼 순간이었 다.
나는 강한 데자뷰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뭐지.’
그렇게 오래 자 놓고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나는 아연한 눈으로 내 가게 앞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가게까지 이어지는 계단 의 위를.
“이제야 오십니까?”
낮게 잠긴 볼멘소리가 들렸다. 붉 은 시선이 불만스레 나를 마주보았 다.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에게 시 선을 던졌다.
남의 계단을 점령한 주제에 투덜거 리기까지 하는 불청객이 몸을 일으 켰다.
“ 전하?’’
황망함을 가득 담아 내가 먼저 입 을 뗐다.
몸을 일으킨 세드릭이 바지를 대충 털며 대답했다.
“네.”
그 깔끔한 대답에 나는 되려 말문 을 잃고 말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 를 흔들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신 건가 요?”
물음과 동시에 데자뷰가 일었다. 그래, 한 달 전에도 같은 질문을 던 쳤었지.
세드릭은 그때와 똑같이 뻔뻔한 얼 굴로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를요?”
“한 사람밖에 더 있습니까?”
쓸데없는 걸 다 묻는다는 듯한 말 투였다.
나는 뒷목이 당기는 것을 느끼며 재차 물었다.
“이 새벽부터 계단에 앉아서 절 기 다리고 계셨다고요? 말도 안 돼. 지 금 저 놀리시는 거죠?”
공사가 다망하실 세드릭 에반스 공 작님께서 한가로이 일개 조향사를 기다렸을 리 없었다. 정말 내게 급 한 용건이 있었던 거라면 시종을 보 냈겠지.
세드릭이 성큼 내 앞으로 가까워졌 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가 물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무, 무얼요?”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겁니까? 가 게조차 내팽개치고.”
내팽개쳤다니.
나는 너무한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 다.
“내팽개쳤다뇨. 휴식을 잠깐 취하 고 온 거예요.”
“서른 세 시간 동안이나 말입니
까?”
……서른 세 시간?
나는 그의 구체적인 대답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서른 세 시간? 아, 하긴 가게를 떠난 게 그저께고, 지금은 이틀 뒤 새벽이니까 그 정도 되었으려나
나는 손가락을 동원해 시간을 계산 하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세드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
다.
“사용인조차도 걱정하더군요.”
“아, 리나가요? 역시 그랬군요. 그 럼 먼저 리나한테 안부부터 전해야 겠……
“잘 겁니다. 지금은.”
아, 하긴. 그렇겠다. 나는 불 꺼진 가게 창을 올려다보며 납득했다.
“에른조차도 레이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서른 세 시간 전이라고 하고, 호텔 룸 문을 멋대로 열어젖힐 수도
없고. 딱히 침입자의 흔적은 없고.”
세드릭이 굳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어쩐지 추궁받는 느낌 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도대체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잠을 잤어요.”
“……네?”
세드릭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 졌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 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곤 재차 말했
다.
“수면을 취했다니까요. 꼬박 잤어 요.”
“무슨…… 그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잠만 잤는걸요.”
“서른 세 시간을?”
“네에. 안 믿으시는 거예요?”
세드릭은 마치 희귀한 멸종위기 동 물을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에 오히려 당당히 말했다.
“제가 전하께 뭐하러 이런 걸로 거 짓을 고하겠어요?”
그러자 세드릭의 표정이 서서히 색 을 바꿨다.
그가 기묘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 았다.
“아픈 겁니까?”
“ 네?”
“몸에 문제가 있으면 간혹 그렇게 잠이 쏟아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기면증일지도…… 최근 감염된 적은 없습니까? 유해물질에 노출됐던 경 험이라든가……/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병 같은 거 없어요. 전 멀쩡해요. 어제 하루 종일 잠만 잔 건 요즘 과로한 탓이었고요!”
“과로라니.”
세드릭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의 손바닥이 내게로 가까워 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따스한 체온이 내 이마를 덮었 다.
“도대체 얼마나 과로를 했길래 사 람이 잠을 그렇게 코끼리처럼 잡니 까?”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짓과 는 달리, 말의 내용은 그렇지 못했 다.
나는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피곤하면 하루 정도는 몰아 잘 수 도 있죠. 전하께선 그런 적 없으세 요? 잠 줄여 가며 일하는 날도 많 으실 거 아녜요. ”
“전 쪽잠을 잡니다.”
간단명료한 답에 나는 말문을 잃었 다.
그러다가 일찍 죽어요, 이 사람아. 나폴레옹이 단명한 이유도 모르나?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세드 릭이 다른 세계의 황제에 대해 알
리가 없었기에 나는 입술만 달싹거 렸다.
“열이 좀 있는 것도 같은데.”
“방금 일어나서 그래요.”
세드릭이 여전히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네, 정말 멀쩡하다니까요.”
“제깍제깍 대답하시는 걸 보면 그 래 보이기는 하는데……
세드릭이 고심하는 듯 나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기가 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 리곤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고 있 는 세드릭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었다. 하지 만……,
세드릭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머 리와 머리가 가까워지며 자연스럽게 내 몸이 굳어져 갔다.
그의 한숨이 이마 위에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했습니다.”
묘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나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림자에 가려, 세드릭이 정확히 어 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이마를 덮고 있는 따스 한 감촉과 머리 위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그가 어떤 표정 을 짓고 있을지 짐작케 했다.
나는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 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괜스레 간
지럽던 기분이 한결 가셨다.
역시 새벽은 위험한 시간이다. 쉽 게 감상적이 되어버리니까.
“ 전하?”
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제야 나는 세드릭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고개를 한참 꺾어야 하긴 했지만.
“괜찮으세요? ……혹시 향수가 모 자라셨나요?”
일주일 동안 조향실에 틀어박혀 있 긴 했지만, 해야할 일조차 잊은 건 아니 었다.
에른에게 미리 제조해 둔 아닉시아 향수를 기한 내에 세드릭에게 전해 달라 부탁해 둔 터였다.
에른이 일처리를 허술히 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걱정 어린 내 시선을 알아챈 걸까.
세드릭이 픽 미소를 지었다.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뭐, 어떻게 보면 저는 전하의
의사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광증을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뿐이니 의사라고 볼 수도 있지.
내 표현이 재미있었는지, 세드릭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의사?”
“따지자면 그런 역할 아닌가요, 저.
……아니면 말고요.”
“아뇨. 맞는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끄 덕 거렸다.
“레이디가 바로 제 주치의였군요.”
“네? 아뇨, 주치의까지는 아니 고……,”
“제도 내의 어떤 의사나 신관도 손 조차 대지 못한 광증을 레이디가 완 화시켜 주셨는데 주치의가 아니면 뭡니까?”
“조향사요. 조향사.”
나는 황당함을 누르며 서둘러 정정 했다.
비유 한 번 잘못했다가 졸지에 공 작가 주치의로 취직하게 생겼네.
뭐, 어쩌면 가게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지금으로선 그 편이 더 나으려 나. 관심은 없지만 말이다.
얼른 정정하자 세드릭이 웃음을 터 뜨렸다.
“아하하.”
말 그대로, 내 앞에서 대놓고.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 다보았다.
눈꼬리까지 접힌 채로 시원하게 웃 는 모습이…… 솔직히 보기 싫은 모 습은 아니었다. 사실 액자 속에 박
제해서 벽에 걸어 놓고 싶은 모습이 긴 했다. ‘미남의 박장대소’같은 제 목을 지어서.
나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물었다.
“꼭두새벽부터 제 가게 앞에 앉아 계셨던 이유나 말씀해 주시죠, 전 하.”
“ 아.”
그제야 세드릭이 웃음을 멈췄다.
그는 여전히 짙게 웃음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걱정했다고.”
“네?”
“제도로 귀환한 김에 차나 얻어먹 을까 싶어 가게에 들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으니. 오기가 생겨서 좀 더 기다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