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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46화 (46/153)

〈46 화〉

입을 벌린 함 속에서, 짙고 짙은 향기가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새벽바람처럼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향이었다. 동시에 밤바다처럼 아득 하고 잔잔한 향이었다.

땅거미 지는 해변가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맨발로 사각거리며 모래사 장을 밟고, 코끝으론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이 감도는 듯한 기분이.

‘ 앗.’

잠시 뒤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함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허리를 폈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향이란 향은 거의 다 맡아 봤다고 자부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난생

처음이었다.

제이나가 껄껄 웃었다.

“마음에 드셨소? 생각보다 더 극적 인 반응이군!”

내 얼굴이 더 빨개졌다. 놀리려는 건 아니었는지 제이나가 손을 내저 었다.

“좋아하시는 것 같아 뿌듯하오. 역 시 내가 선물 하나는 잘 고른다니 까.”

제이나가 자화자찬하며 고개를 끄 덕 거렸다.

“트레아라는 이름의 허브요. 서방 에서만 귀히 나는 것이지.”

트레아.

나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이름에 서부터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둔감한 나도 이 허브의 향이 무척 매력적이라는 건 알겠더군. 거래하 는 상단주가 애지중지 아끼던 걸 강 탈하다시피 뺏어왔지.”

강탈?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제이 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석을 몇 개쯤 먹여주니 잠잠해 지더군.”

보석 몇 개, 라니……,

별 거 아닌 듯한 대답에 나는 멍 하니 함 속에 놓인 트레아를 내려다 보았다.

과연 이 허브가 보석 몇 개의 값 어치를 할까?

‘분명한 건-’

나는 홀린 눈으로 함에 손을 가져 다댔다.

분명한 건, 나였다면 보석을 한 보 따리로 던져 준대도 이것과 맞바꾸 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었다.

쏘 쏘 쏘

“아가씨

에른이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함은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뇨, 고맙지만 괜찮아요.”

나는 단번에 친절을 거절했다.

그리곤 품안의 함을 더 꼭 끌어안 았다.

함 또한 굉장한 고급품인지, 그 아 름답던 트레아의 향기가 전혀 흘러 나오지 않았다.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에른이 또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내 모습이 신기한 듯했다.

“네. 굉장히요.”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레엘리우스의 향을 처음 맡았을 때 도, 굉장히 황홀한 경험이었지만, 트 레아만큼이나 강렬하지는 않았다.

이 허브는 시원한 향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걸맞은 허브였다.

“에른 경도 아까 옆에 있었으니 향

을 맡아봤죠? 어땠어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에른이 즉답했다.

“좋았습니다.”

그게 다야?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에른의 투구 를 쳐다보았다. 에른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았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그 두꺼운 투구 때문에 향이 제대로 안 와닿은 게 분명해요. 살짝 벗어 보는 건 어때 요?”

“그건 곤란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벗어 봐 요.”

“안 됩니다, 아가씨.”

“십 초만! 딱 투구만요.”

“정말 안 됩니다.”

에른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마차가 가게 앞에 도착했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 렇게까지 완고할 줄이야.

“아가씨! 백작님은 만나고 오신 거 죠? 어떠셨어요?”

리나가 마중 나와 재잘거렸다.

나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뭐랄까…… 최고였어.”

“네에?”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융숭한 대접을 받으셨나 봐 요?”

“응…… 제이나 님께선 정말 멋지 신 분이야.”

나는 함을 더 가득 끌어안으며 말 했다.

리나는 수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 았다. 그리곤 에른에게 속닥거렸다.

“혹시 술을 드셨나요?”

“한 모금도 안 드셨습니다.”

나는 둘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클로즈 시간 뒤였기 때문에 안엔 손님이 없었다.

나는 리나를 돌아보곤 비장한 표정 을 지었다.

“ 리나.”

“네, 아가씨.”

리나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린

결심을 리나에게 털어놓았다.

“당분간 가게는 리나가 맡아줬으면 해.”

“아! 쉬시려고요, 아가씨? 하긴 그 간 쉬지 않고 달려오셨으니 휴식 시 간이 필요하실만도 해요. 걱정 마세 요. 가게는 제가 잘 운영할게요!”

리나가 믿음직스레 외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네? 그럼요?”

“앞으로 며칠 동안 조향실에 틀어 박혀 있을 생각이야.”

“네? 혹시 신제품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새로운 향수를 만드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요!”

나는 함을 쓰다듬었다. 복실복실한 강아지를 만지듯.

“끝내주는 재료가 들어왔거든.”

“네에?”

“당장 이 아이를 샅샅이 해체해서 알아내고 싶어.”

리나가 아연한 얼굴로 나와 함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에른에게 속삭였다.

“정말 술 안 드신 거 맞아요?”

“우유만 드셨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둘의 대화를 못 들 은 척 한 뒤, 환히 함박웃음을 걸쳤 다.

“그러니까, 리나. 앞으로 며칠간은 날 찾지 말아줘!”

“아가씨, 진심이세요……?”

“응! 일 떠맡겨서 미안해. 이번 주 주급은 두 배로 넣어줄게!”

“아니, 가게 보는 거야 어렵지도 않으니 괜찮지만요……

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 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 을 했다.

“그럼, 나는 오늘부터 조향실로 출 근할게. 부탁해!”

“네, 네에……!”

리나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함을 끌어안은 채 사뿐사뿐 조향실로 향했다.

# # 보

하루가 지났다.

나는 트레아의 향기를 작은 플라스 크들에 나눠 담고 낱낱이 분석했다.

둘째 날엔 눈물을 머금고 잎사귀 하나를 뜯어 압착했다. 증류도 해 보고, 냉침도 해 봤다. 트레아의 향 을 가장 온전히 분리해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했다.

셋째 날엔 꽃집으로 출동했다. 온 갖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트레아와 어울릴 만한 향을 하나하나 맡아보 며 궁리했다.

넷째 날엔 온전히 조향실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다섯째 날도, 여섯째 날도 마찬가 지였다.

그리고 일곱번째 날, 땅거미가 졌 을 때쯤이었다.

“됐…… 다

나는 스르르 의자 위에서 허물어졌 다.

오르간 위에 놓인 플라스크 안에 선, 깊은 푸른빛의 액체가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색을 멍하니 바 라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쩌면 좋아.’

색깔까지 완벽해.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동동거 렸다.

꼬박 일주일을 들이부은 끝에, 드

디어 완성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손꼽을 역작을!

‘이게 뿌듯함이란 감정인가.’

자식이 어느새 대학을 졸업해 학사 모를 안겨줘도 이렇게까지 뿌듯함이 차오를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여태 느껴본 적 없는 흐뭇함 과 뿌듯함, 보람찬 감정에 가득히 심취했다.

‘코가 맹맹해지긴 했지만.’

일주일이나 코를 혹사시킨 덕에, 지금 내 코는 감기에라도 걸린 듯 둔감해진 상태였다.

뭐, 이 정도야 하룻밤 푹 자고 나 면 멀쩡해질 테니까. 역작의 대가라 기엔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었다.

“끄으으.”

나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잠을 안 잔 지 몇 시간째더라?

적어도 만 하루가 넘은 건 분명했 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을 때가 딱 지금처럼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

으니까.

그걸 깨닫고 나자 갑자기 밀물처럼 피로가 쏟아졌다.

‘좀 무리하긴 했지.’

그제야 지난 일주일이 파노라마처 럼 스쳐지나갔다.

리나가 식판을 들고 와 걱정스레 쳐다보던 것. 이불 빨래를 보송히 해 두었으니 제발 잠 좀 푹 주무시 라고 사정하던 것. 에른까지 찾아와 서 영양제를 주고 갔던 것.

나는 고개를 돌려 책상을 쳐다보았

다. 일주일 동안 쌓인 편지들이 많 았다.

어디 보자. 이건 살롱 초대장. 이 건 무도회 초대장. 이건 샤를로트의 안부 편지. 이건 윈스턴 백작이 보 낸 편지.

‘ 음?’

나는 마지막 편지를 잠시 쳐다보았 다. 웬일로 백작이 편지를 다?

하긴, 일주일 가까이 저택에 들르 지 않았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 편 지 안엔 일단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

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집을 나가랄 땐 언제고. 나는 코웃 음을 쳤다.

‘윈스턴 백작은 몰라도 샤를로트에 겐 답장을 해야지.’

일주일이나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 까.

하지만 그 전에……,

‘잠부터 좀 잘래.’

나는 눈을 비볐다. 일주일분의 피 로가 한꺼번에 덮쳐온 듯 피곤했다.

자러 가기 전 나는 푸른빛 액체가 든 플라스크를 사랑스레 쓰다듬었 다. 그리곤 준비해 둔 용기로 조심 조심 옮겨 담았다. 그런 뒤에야 찌 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조향실 문을 열자, 마침 앞을 지나 고 있던 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 아가씨!”

깜짝이야. 리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드디어 나오셨군요! 작업은 끝나 셨나요?”

“응, 그럼. 이제 끝이야. 완성했 어!”

“와아, 드디어! 너무 고생 많으셨 어요!”

“리나한테도 시향을 시켜주고 싶은 데…… 지금 너무 졸리네.”

“헉, 얼른 주무셔야죠! 앗, 아니지. 아예 좋은 호텔을 빌려서 푹 쉬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응? 호텔?”

의외의 제안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여긴 아무래도 번화가라 조금 시끄럽잖아요. 지금만 해도 아래층 에 손님이 많이 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랫층에서 손님들이 떠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었 다.

손님이 많이 찾아주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고요한 휴식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럴까?”

“네! 아무 방해 받지 말고 푹 쉬고

오셔요.”

고급 호텔에서, 아무런 방해도 없 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라……,

무척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결국 나는 리나의 제안을 받아들였 다.

“그럼 하루만 더 가게 부탁할게.

정말 고마워, 리나.”

“뭘요. 어서 다녀오셔요.”

나는 예쁘게 웃는 리나를 와락 끌 어안았다.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이 세계로 떨어진 뒤 가장 큰 행운은 이 애를 만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수행하겠습니다. 아가씨.”

가게 문을 나서자, 대기하던 에른 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나는 에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쩐지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 갑네요.”

“실제로도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하긴, 내가 좀 오래 틀어박혀 있긴 했지.

나는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근처에 푹 쉴 만한 호텔이 있을까 요? 이 근처를 잘 몰라서요.”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에른에게 모든 걸 맡기고 편 안히 마차 뒷좌석에 실려 갔다. 덜 컹이는 마차 안에서도 하마터면 꾸 벅 잠이 들 뻔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호텔은 고풍스러 우면서도 우아했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거대한 침대 위 에 엎어졌다.

“하아, 살 것 같다……;

구름결처럼 푹신한 침대가 온몸을 감싸안았다.

여기가 지상낙원이구나. 나는 옷만 간신히 가운으로 갈아입고는 세수도 안 하고 다시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죽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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