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공작님?!’
세드릭이 손바닥을 펼쳐 그녀를 막 았다.
‘거기 있어.’
‘괘, 괜찮으세요……? 다치신 것 같은데!’
‘안 다쳤어.’
대답과는 달리 세드릭은 또 한 번 거칠게 숨을 뱉었다. 리나가 발을 동동거 렸다.
‘저,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당장 의사를-’
‘향수, 있어?’
‘네, 네?’
‘아닉시아…… 아니. 갖고 있을 리 가 없지.’
세드릭이 자조했다.
까드득.
벽을 짚은 세드릭의 손톱 끝이 벽 돌을 긁어내렸다. 리나의 심장이 덜 컥 내려앉았다.
‘어, 어떡하지.’
많이 편찮으신가 봐.
리나가 임시 붕대로 쓰기 위해 치 맛단을 찢으려던 순간이었다.
세드릭이 단검을 치켜들었다.
‘헉!’
리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망설임 없이 제 허벅지에 검날을 꽂은 세드릭이 다시 단검을 뽑아냈 다. 새빨간 피가 울컥 솟구쳤다.
‘고, 고, 공작님
리나는 멍청히 같은 단어만 더듬거 렸다.
너무 놀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젖히더니 짙은 한 숨을 내쉬었다.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어째서인지 그는 아까보다 한결 편 안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약간 틀어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을 열었다.
‘리나 아스웰. 방금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특히 네 주인에게는.
그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은밀하 고 매혹적이었다.
리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쓰 쑤 쑤
“후우우……/
나들이 드레스를 차려입은 영애가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예요.”
영애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한 사흘은 푹 잔 것처럼 산뜻해졌 어. 향기 하나만으로 이런 일이 가 능하다니! 여태 손해 보며 살아온 기분이에요.”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에 아낌이 없는 손님은 그녀 역시 싫지 않았다.
“한 병 주세요. 아니, 세 병 주세 요. 몸에만 뿌릴 게 아니라, 방 전 체에 방향제처럼 뿌려야겠어.”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 손님이 시향한 향수는 재료 때 문에 값이 많이 나가는 편이었다. 그걸 방향제로 쓰겠다니, 재력이 상 당한 손님이 틀림없었다.
한참 향수를 포장하고 있는데 손님 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레이디 윈스턴. 그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말씀이신가요?”
“아니, 글쎄. 매그너스 남작이 가게 를 철수한다지 뭐예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이 부채를 팔랑거리며 호들갑 을 떨었다.
“그, 얼마 전에 열었던 향수 가게 말이에요. 꽤 규모가 크길래 작정했 나보다 했는데, 이렇게 빨리 문을 닫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정말 철수를 한다던가요?”
“네에, 그렇다니까요. 믿을 만한 정 보통에게서 들은 정보예요.”
‘ 호오.’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이야기이 기는 하네.
설마 그날 창피당한 것 때문에 가 게를 접는 건가? 그렇게까지 배짱이 없는 인간이었던가.
그때 혼자 느긋이 시향하고 있던 다른 손님이 끼어들었다.
“제가 들은 소식은 좀 달라요.”
“어머, 그래요?”
나들이복을 입은 영애가 호기심을 보였다.
짙은 정장을 걸친 손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닫는 게 아니라, 확장 공사를 한다던데요?”
“네에?”
나들이복 영애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 역시 조금 놀랐다. 동시에 감탄 했다.
‘역시 그렇게까지 배짱없는 좀팽이 는 아니었군.’
하긴,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내게 시비를 걸 정도니 그 정도 담 은 있겠지.
“그런데 가게 주인이 바뀔 거라는 소문이 돌더군요.”
짙은 정장을 걸친 영애의 말에 나 들이복 영애가 귀를 쫑긋 세웠다.
“호오?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요?”
“흐음, 글쎄요. 소문이 전부 맞다 면, 매그너스 남작이 가게를 팔아치
웠고, 새로 사들인 누군가가 확장 공사를 진행하는 걸지도요?”
“어머. 그게 사실이라면 새로운 주 인은 상당한 재력가일텐데. 대체 누 굴까?”
나도 슬며시 호기심이 들었다.
매그너스의 가게는 처음 개장할 때 부터 커다란 편이었다. 내 가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넓었 다.
그 가게를 더 확장한다니. 매그너 스가 가게를 팔았든, 안 팔았든 흥 미로운 이야기긴 했다.
‘거기서 더 커지면 거의 백화점 규 모 아닌가?’
뭐, 어차피 아직은 뜬소문일 뿐이 니까. 신경 써 봐야 머리만 아플 뿐 이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하던 일에 집 중하기 시작했다.
딸랑.
그때, 은종이 울렸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걸치며 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잘
차려입은 영애도, 꾸밈에 관심 많은 신사도 아니었다.
이국적인 옷차림을 한 소년이 정중 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윈스턴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어떻게 찾아오셨나 요?”
“길베르트 백작님께서 찾으십니 다.”
“길베르트 백작님이 저를요?”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길베르트 상단의 주인인 제이나가
나를 찾다니? 무슨 일이지.
“예. 바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나는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길베르트 백작이라는 이름을 들은 손님들의 눈이 나보다 더 동그래져 있었다.
“어서 가 보셔요, 레이디!”
“그래요. 백작님께서 부르실 정도 면 급한 일이신가 본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님들에 게 양해를 구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잠시 가게를 비 울게요. 리나! 나 없는 동안 가게 잘 부탁해.”
“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리나가 든든히 외쳤다.
나는 이국적인 소년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엔 소년이 타고 온 듯한 마차가 서 있었다.
‘엄청 크네.’
내가 여태껏 타본 마차 중 제일 호화로운 건 세드릭의 것이었다.
이 마차는 그에 비하지는 못했지 만, 대신 크기로 승부하려는 듯 무 척이나 거대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마차를 흘끔거렸다. 나는 에른의 에 스코트를 받아 그 거대한 마차에 간 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물었다.
“제이나 님께서 무슨 일로 저를 부
르시는 건가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 지만 영애께 드릴 선물이 있다고 말 씀하신 걸로 봐서는 좋은 일이 아닐 까 싶습니다.”
선물?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길베르트 대상단의 상단주가 건네 는 선물이라. 기대가 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재차 물었다.
“여정에서 막 돌아오셨나 봐요? 길 베르트 상단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거든요.”
“예. 지금 막 제도에 도착하셨습니 다.”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다니.
도대체 어떤 선물이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제도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머지않아 마차가 상단의 막사촌에 도달했다. 상단주의 마차가 지나치 자 막사 사이를 지나다니던 상인들
이 모두 정중히 물러서 길을 만들었 다.
가장 거대한 막사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들어가 보십시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나는 막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막사 문을 젖히자마자, 엄청난 냄 새가 내 코를 찔렀다.
“ 0 ”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굉장한 냄새였다. 온갖 이국적이고 독특한 향신료가 한 데 뒤섞인 냄 새.
강렬한 향에 머리가 순식간에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오! 어서 오시오, 윈스턴 영애!”
제이나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았 다.
그녀의 얼굴은 그새 더 탔는지 전 보다도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나는 간단히 예를 차려 인사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여정은 평안 하셨는지요?”
“으음, 평안과는 거리가 멀었지. 하 지만 무척 즐거운 여정이었소. 절반 은 영애의 덕이었지!”
“제 덕이라면……/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기 울였다.
제이나가 껄껄 웃어젖혔다.
“스케론 녀석들을 그렇게 손쉽게 잡아본 건 처음이었소. 지긋지긋한 놈들. 아주 혼쭐을 내 주었다오!”
설마했는데 역시였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스케론 사냥에 성공하셨군요. 축 하드립니다.”
“하하, 모두 영애의 덕분이오. 영애 가 준 향수를 뿌리니 정말 체취가 귀신처럼 사라지질 않겠소? 마치 내 자신이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지.”
“비유가 재미나시네요.”
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제이나가 호탕하게 마주 웃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신이 나 보였다.
“올해 수확철엔 내 영지민들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지. 그간 그놈 들이 내 영지 작물을 망친 걸 생각 하면 씨를 말려버리고 싶을 정도 요.”
제이나가 한숨을 내쉬곤 내게 자리 를 권했다.
“아차, 너무 기쁜 나머지 계속 영 애를 세워두고 있었군. 미안하오. 어 서 앉으시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종이 시원한 우유와 디저트를 내 왔다.
나는 신기한 색의 디저트를 한 입 베어먹었다. 순간 새콤달콤한 향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퍼졌다. 나는 눈 을 세차게 깜빡였다.
“하하, 맛이 낯서시오?”
내 표정을 본 제이나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포크를 들었다.
“네, 무척 새로운 맛이네요. 중독성 이 있는 것도 같고요.”
“마음에 드시면 말씀하시오. 아예 한 보따리를 내 드리지.”
그렇게 말하며 제이나가 또 웃었 다.
이 사람이 첫만남때의 그 무표정하 고 딱딱하던 백작님이 맞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디저트를
마저 해치웠다.
제이나가 묘하게 흐뭇한 얼굴로 그 런 나를 구경했다. 살짝 얹힐 것 같 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굴하지 않 고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내가 디저트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음과 동시에, 제이나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걸 가져오도록.”
“예, 주인님.”
그것?
나는 의아한 눈으로 제이나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제이나는 짓궂은 웃 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시종이 양 손 가득 무언 가를 들고 돌아왔다. 꽤 커다란 크 기의 함이었다.
“이건 영애께 드리는 내 성의 표시 요.”
“성의 표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은 고 급스러워 보이는 비단으로 감싸져 있었다. 제도에선 본 적 없는 독특 한 무늬의 비단이었다.
시종이 함을 개봉했다.
그리고, 동시에.
“ 아.”
내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