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화〉
붉은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너무나 가까웠던 덕분일까, 나는 그 시선에서 몇 가지 강렬한 감정들 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가령, 눈앞의 상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흥미 같은.
아.’
그 순간.
저 눈빛을 읽어낸 순간, 머리를 얻 어맞은 것 같이 얼얼했다.
‘이 사람.’
내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아직, 향의 효능이 안 가셨구나.’
‘사랑에 빠지는 향’의 효과가 지속 되는 기간은 대략 일주일.
그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에겐 아직 나에 대한 호감이 남아있었다.
나는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부디 자연스러운 미소처럼 보이길 기도하며.
“ 전하.”
“네.”
“외람되오나,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하께선 지금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일단은 설득 먼저 해보자.
‘당신이 지금 내게 호감을 느끼는 건, 제가 만든 마법의 향수 때문’이 라고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는 없으 니까.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응원하며 입 을 열었다.
“물론, 제가 아닉시아 향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조향사이다 보니 전 하께서 절 신뢰하실 수는 있어요. 저로선 무척 황송하고 감사한 일이 죠.”
나는 최대한 차분히 설득을 시도했 다.
세드릭은 내 기다란 말꼬리를 끊지 않았다. 뭐라고 하나 들어나 보자,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 다.
정작 나는 죽을 맛이었지만.
“하지만, 전하의 증세에 도움이 되 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아닉시아 향 이지, 제가 아니에요. 그 점을 구분 해주셔야 해요.”
“흐음.”
“전 사람이지 향수도, 약도 아닌데 제가 전하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증 세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가 내가 아닐 뿐.
뒷말을 삼킨 채, 나는 최대한 활짝 웃어 보였다.
“아닉시아 향은 출장 다녀오시는 동안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히 만들 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흐음…… 그렇습니까.”
내 혼신의 설득이 먹힌 걸까.
세드릭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곧 그가 나를 마주 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포기하죠.”
그 싱그러운 미소에 나는 순간 시 선을 뺏겼다.
걱정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시원스 러운 대답이었다.
“무리한 청이었던 것 같긴 하군요. 그럼 대신 다른 부탁을 들어주시겠 습니까?”
다른 부탁?
순간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설득의 법칙 그 첫 번째.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을 때는, 일단 상대가 거절하게 만든 뒤, 상 대가 미안해할 때 진짜 부탁을 하 라.
나는 경계한 채로 되물었다.
“어떤 부탁이신가요?”
“다음 달, 성 엘레이스의 축일에 있을 황궁 무도회.”
세드릭이 지그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 파트너로 참석해 주십시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 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가, 가까스 로 입을 열었다.
“파트너, 라니…… 그런 부탁을 하 시는 이유가 뭔지 여쭈어도 될까 요?”
“제가 인맥이 좁아서. 좀처럼 파트 너를 구하기가 힘들더군요.”
세드릭이 뻔뻔스레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기막히다는 표정 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세드릭 에반스 라면 지위와 명성을 떼놓고 보더라 도 인기가 많을 텐데. 광장에서 ‘파 트너 구함’ 피켓만 들고 서 있어도
지원자가 물밀 듯이 밀려들 텐데.
“공작 전하께서 파트너를 못 구하 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난색을 표했 다.
이런 당황스러운 요구를 하는 걸 보니, 확실히 향수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효능의 정도가 내 예상을 약간 더 웃돌았다. 분명 그 향수의 효과는 기존에 지니고 있던 호감과 비례할 텐데. 어쩌면 세드릭은 레엘
리우스 향을 맡기 전부터 내게 호감 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젠드릭까지 동행해 달라는 청과 달리, 이건 들어주기가 아주 쉬운 부탁이었다.
이번까지 연달아 거절할 수는 없었
다.
‘역시 그 설득의 법칙은 과학이군.’
뭐,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니까.
‘전 애인’ 사이인 나와 세드릭이 함께 무도회에 나타난 순간, 들썩일 스캔들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지 만……,
매그너스 덕분인지 나는 이제 스캔 들 따위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곧 파트너 요청을
취소할 텐데.’
나는 살롱 한편에 걸린 달력을 슬 쩍 바라보았다.
성 엘레이스의 축일은 앞으로 보름 뒤.
레엘리우스 향의 지속 기간이 끝나 는 시점으로부터 한참 뒤였다.
지금 세드릭이 날 무도회에 초정하 려는 건 그 향의 효과 탓이었다. 마 법이 깨지는 순간, 세드릭은 ‘내가 미쳤었지’하며 파트너 초청을 거둬 들일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전하. 그 청을 받아들이 겠어요.”
이런저런 계산을 끝마친 나는 웃으 며 말했다.
그제야 세드릭이 만족스러운 웃음 을 입가에 걸쳤다.
“달력에 꼭 적어 두시죠. 나중에 잊어버렸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에요.”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어느 쪽이 먼저 취소하는지 두고 보자고.
용건을 끝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세드릭이 가게까지 나를 바래 다주겠다고 우겼으나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아무리 수군거림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나서서 불필요한 스캔들을 만 들 필요는 없었다.
세드릭이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게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전하께서도요.”
인사하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발 견할 수 있었다.
아까 시선이 멎었던 세드릭의 허벅 지 부근에서였다.
‘뭐지?’
조금 검붉은 얼룩이 진 것 같기 도……,
그러나, 자세히 보기도 전에 이번 에도 세드릭의 자켓 자락이 내 시야 를 가렸다.
‘혹시 일부러 가린 건가?’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파헤치고 싶 진 않았다. 그럴 명분도 없고.
헤어지기 직전, 세드릭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다음 달, 성 엘레이스의 축일입니 다.”
나는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분명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오
뭐, 공작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 이 니 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마차에 올라 탔다. 세드릭은 매너 넘치게도 내 마차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 지 지켜봐 주었다.
절그럭.
금속 갑옷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 렸다. 리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 었다. 에른 가드너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나 보군요.”
“저, 정말요?”
겁먹지 않은 티를 내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았다.
리나는 에른 몰래 울상을 지었다. 좋은 기사님이라는 건 아는데, 나쁜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는 무서웠다.
리나가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에른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리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창문을 내다보았다. 과연 마차 한 대가 가게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 다.
“아가씨!”
리나는 한달음에 가게 문을 나섰 다. 마차에서 내리던 아리엘이 리나 를 발견하곤 밝게 웃었다.
“리나! 잘 지내고 있었어?”
“네! 물론이죠. 아가씨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 딸꾹질은 진정됐고?”
아리엘이 짓궂게 묻자, 리나가 얼 굴을 붉혔다.
“아, 아까는 그냥 물을 잘못 먹어 서 그런 거예요.”
“그래, 그래. 그나저나 아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갑자기 네 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 데.”
아리엘이 염려 가득한 눈으로 리나 를 살폈다. 그 눈빛에 리나는 괜스 레 체온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
다.
“응? 리나. 괜찮은 거 맞지?”
대답이 늦자 아리엘이 재차 물었 다.
그와 동시에 어떤 목소리가 리나의 머릿속에 울렸다.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가.
‘리나 아스웰.’
방금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낮고 나지막한, 주박을 걸듯 깊었 던 목소리.
리나는 아리엘 몰래 한숨을 내쉬었 다.
만약 그 일을 숨기는 게 아리엘에 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 것 같았다 면 리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후환이 두렵더라도.
그러나 리나의 생각에도 그 일은 아리엘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결국, 리나는 그저 헤헤, 웃음만 홀 렸다.
“네. 저는 괜찮아요. 걱정 끼쳐드려 서 죄송해요.”
그제야 아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어떻게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에반스 전하가 널 발견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운이었 어.”
리나는 아리엘 몰래 희미하게 쓴웃 음을 걸쳤다.
아리엘에게 말하지 않은 일들이 파
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아리엘과 에른을 놓친 리나는, 인 파를 뚫어 보려다가 낯선 골목길로 떨어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뢰배들과 마주 쳤다.
‘이야! 귀여운 아가씬걸!’
‘심심해 보이는데 놀아줄까!’
질 나쁜 사내 셋이 건들거리며 다 가왔다. 리나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결국 막다른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사내들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졌
다. 리나는 덜덜 떨며 저도 모르게 꾹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리엘의 얼굴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리나를 구한 건 아리엘도, 에른도 아니었다.
‘아악!’
비명이 울렸다.
리나는 꾹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 다.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 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다리를 크
게 벌려 한 사내의 머리를 가격했 다. 발길질 한 번에 사내가 벽에 처 박히듯 쓰러졌다. 리나는 멍하니 눈 을 끔뻑거렸다.
리나도 처음엔 남자의 정체를 알아 보지 못했다. 남자는 머리끝까지 후 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이, 이 새끼가!’
사내 하나가 악에 받친 듯 품속에 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나 남자는 어린애 손목 비틀듯 검을 피하곤 되레 탈취해갔다. 사내
는 뺏긴 제 단검으로 가슴을 베였 다. 선홍색 피가 솟구쳐 올랐다.
‘뭐…… 뭐야, 이 자식!’
다른 사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 지만, 모두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며 허물어졌다.
리나는 그 모든 장면을 현실감 없 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끄아아악!’
마지막 남은 사내가 돼지 멱 따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쓰러진 사내의 머리를 툭툭 구두로 건드렸지만 사내는 정신을 완전히 잃었는지 미동도 없었다. 반 면 남자는 털끝 하나 다친 것 같지 않았다.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그 등을 리 나가 넋놓고 바라볼 때였다.
남자가 벽에 한 손을 짚곤 숨을 토했다.
허억.’
그제야 리나는 최면에서 풀린 듯
퍼뜩 몸을 일으켜 남자에게로 달려 갔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 주치자, 리나는 순간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