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화〉
“ 리나!”
나는 한달음에 리나에게로 달려갔 다.
“아, 아가씨.”
리나는 잔뜩 겁을 먹은 듯 얼어 있었다. 나는 리나의 어깨를 붙잡고
샅샅이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네, 네에. 길을 잃었었는데, 히끅! 공작님께서 저를 발견하셔서…… 히
리나가 연신 딸꾹질을 했다.
아무래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세드릭과 단둘이 있느라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세드릭을 향해 꾸벅 감사 인 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리나를 보 호해 주셔서요.”
왜 하필 마탑에서 나를 기다린 건 지는 의문이지만.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오늘은 거리에 사람이 많으니까. 수색 마법을 의뢰하러 마탑으로 오 지 않으실까 생각했습니다. 추측이 맞았군요.”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빙긋 눈웃음 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칭찬을 기대하는 건 아닐 테 고.
아무튼 나는 예의에 맞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혹시나 리 나가 어떻게 되었을까 봐 어찌나 걱 정했는지. 전하 덕분에 시름을 놓았 네요.”
그러자 세드릭이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 이었다.
잘못 본 거겠지.
나는 아직도 달달 떠는 리나의 어 깨를 감싸 안았다. 세드릭이 험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충격이 큰 모양이네.
“정말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네, 네에!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 요!”
“그 아이는 무사합니다. 그러니 걱 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레이디.”
세드릭이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 까?”
“시간이요?”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밀한 이야기라 이곳에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고.”
은밀한 이야기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급한 건가요?”
안 그래도 축제 구경 하느라 가게 오픈이 늦어졌는데.
세드릭이 즉답했다.
“급한 겁니다.”
으음,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어요. 그냥 지금 바로 장소를 옮기죠. 아직 가게 문 열기 전이니 까요.”
“좋습니다.”
세드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에른을 돌아보고 당부했다.
“에른 경.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잘 해주실 테지만, 리나 좀 잘 부탁드 려요.”
“네. 아가씨.”
“가게에 도착하면 누구 방해도 받 지 않고 푹 쉬게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리나, 나는 조금 있다가 갈
게. 에른 경 옆에 착 달라붙어서 돌 아가렴. 알았지? 금방 갈 테니까.”
“네, 네, 네에에
리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에른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에른에 대한 경계심을 벗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 생각엔 아무래 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벗은 적 없 는 저 투구 탓이 컸다.
에른과 리나를 뒤로한 채, 우리는 마탑을 나섰다.
목적지는 전에도 들른 곳이 있는 장소였다. 로젤리아 영애의 살롱.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어머나, 영애! 다시 찾아주셨군요?”
로젤리아가 살갑게 우리를 맞았다.
나는 방긋 마주 인사하곤 살롱을 둘러보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싱그 러운 식물 내음이 가득한 멋진 살롱 이었다.
우리는 로젤리아의 안내를 따라 가 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밀폐된 공 간이었으나, 방 안 가득 장식된 꽃 과 화분 덕에 상쾌한 느낌이 들었 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까운 진달래에 코를 묻었다.
“하아.”
진한 꽃향기에 피로가 나른히 풀렸 다.
나는 고개를 살짝 세드릭에게로 돌 리곤 물었다.
“제게 급히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 요?”
세드릭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 었다. 턱을 괸 채,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눈이 마주치자 세드릭이 자세를 풀 곤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 다. 레이디.”
그의 진중한 어투에 괜히 긴장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네. 말씀하세요.”
“출장도 가십니까?”
“……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나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 명했다.
나는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뒤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출장이 라니 요?”
“말 그대로입니다. 레이디께서 동 행해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요? ……전하와 함께?”
“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저와 아젠드릭까지 동행해주십시 오.”
아젠드릭이라면, 들어본 적 있는 지명이었다. 제국의 서쪽 국경에 위
치한 도시였지, 아마?
그런데 거기로 가려면 여기서 꼬박 보름은 말을 타고 가야 하지 않나?
“잠시만요. 지금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신성도시 아 젠드릭으로 출장…… 을 가시는데, 함께 가자고 제게 부탁하시는 건가 요?”
“완벽한 정리군요.”
완벽한 정리는 무슨!
나는 기가 막혀 세드릭을 쳐다보았 다. 정리가 완벽하면 뭘 해. 정작 그 내용이 터무니없는걸!
“실례지만, 전하. 제가 그 먼 곳까 지 동행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혹 시 아닉시아 향이 모자랄까 봐 그러 시는 거라면, 미리 넉넉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세드릭이 바로 답했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이제 는 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닉시아 향만으로는 부족하다니 요? 효과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씀 이신가요?”
그럴 리가-
레시피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 없 었다.
여태껏 멀쩡히 잘 써왔으면서 갑자 기 향수의 효과가 약해졌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간 세드릭의 증세가 더 심해진 게 아니라면.
“효과가 약해졌다기 보다는…… 정 확히 말하자면.”
잠시 말을 멈춘 세드릭이 슬며시 몸을 당겼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성큼 가까 워졌다.
불과 몇 뼘도 안되는 거리에서 세
드릭이 지그시 웃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이디와 함 께 있을 때만 아닉시아 향의 효과가 강해집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럴 리가요? 그 향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어 요.”
“경험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레 이디가 함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효과 차이가 현저히 나는걸
요.”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 았다.
설마 가련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미남이 우수 어린 눈빛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으니 끝내주게 처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터무니 없는 데다 급작스러 워서 그런지, 세드릭에 대한 동정심 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 이론적으로 그럴 리
가 없어요. 향기라는 건 누가 곁에 있든 없든 효과가 달라지는 게 아 니……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번쩍하며 어떤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상황인지 알겠어요.”
“아시겠다고요?”
세드릭이 슬쩍 시선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정 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이런 말씀 송구하지만, 단도직입 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전 하의 완벽한 착각이에요.”
“제가 아닉시아 향을 전하께 제공 해드리고 있으니, 마치 제가 아닉시 아 향과 마찬가지로 전하의 ‘증세’ 에 대한 해결책일 거라는 착각을 하
고 계신 거지요. 말하자면 연상의 오류랄까.”
“연상의 오류……,”
“혹은 파블로프의 개 현상이라고나 할까요.”
앗, 이건 아니지.
나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 세상에 ‘파블로프의 개’라는 용어는 없을 텐데…… 입이 방정이지.
얼른 입을 가렸는데도 그새 들었는 지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 다.
“무슨 개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제게 개라 고 하셨던 것……;
세드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라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와 세드릭의 첫 만남. 그러니까 내가 아리엘 윈스턴으로써 세드릭을 처음 만난 날, 실수로 그를 ‘미친개’ 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설마 그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무마를 시도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런 적이 없답니다, 전하.”
“저는 분명 들었지만…… 레이디께 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또 그 우수 어린 얼굴이었다.
미치겠네. 나는 손사래까지 치며 발뺌했다.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가 감히
전하께 그런 상스러운 표현을 썼을 리가 없잖아요?”
썼다. 엄청나게 많이.
원작 소설을 읽을 적, 세드릭이 폭 주 전조 증상을 보일 때마다 ‘저 미 친개 좀 누가 말려줘요’ 같은 댓글 을 달거나, 비슷한 댓글에 꾹꾹 공 감 버튼을 누르곤 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과거를 부정했다.
“잘못 들으신 거니까, 부디 오해하 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 니.”
세드릭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귀보다 레이디의 호소를 믿어 보기로 하죠.”
한숨을 뱉은 세드릭이 또 예의 그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저런 표정 짓는 법은 어디에 서 배운 거람. 나는 함부로 댓글을 달았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말을 이었다.
“네, 믿어 주세요. 다시는 그런 표 현 쓰지 않을게요.”
“ 다시는?”
“아니, 이전에 그랬듯 앞으로도 쓰 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뭐, 아무튼.”
세드릭이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방금까지의 처 연한 표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 다. 대신 평소처럼 여유롭고 오만한 얼굴이 자리해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함께 가주실 겁 니까?”
“……아젠드릭 말씀하시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그렇게 먼 곳까지는 갈 수 없어요. 애초에 출장 같은 것도 가지 않고요.”
“의뢰비를 넉넉히 드려도 안 되겠 습니까?”
“네,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렇 게 오래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요.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과의 신뢰와 믿음이니까요.”
“돈도 소용이 없다면.”
세드릭이 내게로 상체를 가까이 붙 였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속삭 였다.
“뭘로 레이디의 마음을 돌릴 수 있 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