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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42화 (42/153)

〈42 화〉

점을 다 보자, 우리는 천막을 나섰 다. 점술사가 입구까지 마중 나와 곧 내 가게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천막에서 멀어지면서 리나가 내게 소곤댔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요즘은 의학이 엄청 발전했잖아요? 아가씨 의 미래 연인께서도 금방 건강해지 실 거예요.”

나는 피식 웃었다. 점괘에 잔뜩 심 취한 리나가 귀여웠다.

“글쎄, 병 수발 드는 건 싫은데.”

“하긴, 그것도 그래요. 우리 아가씨 께서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굳이 골골거리는 사람을 만나서 힘들게 보살필 필요는 없으시죠!”

“역시 그렇지?”

우리가 하하호호 웃으며 한창 점괘 에 대한 수다를 나누고 있을 때였 다.

뿌우우우!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우와! 퍼레이드예요!”

리나가 환성을 질렀다.

고개를 돌린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 질을 쳤다. 화려하게 꾸민 가장행렬 과 함께 수많은 인파가 이리로 몰려 오고 있었다.

“리나! 이리로 와.”

나는 리나의 손을 잡아 가장자리로 끌어당겼다. 에른이 앞으로 나서 인 파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

“네, 아가씨!”

우리는 쭉 고개를 뺀 채 퍼레이드 를 구경했다. 선두에 선 무용수의 현란한 춤사위에 한창 정신이 팔려 있을 때였다.

“아리엘 님?”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 지만, 주변이 시끄러운 나머지 나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계속 퍼 레이드를 구경했다.

잠시 뒤 내 눈앞에 레몬색 머리카 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리엘 님!”

“앗, 깜짝이야. ……라파엘 씨?”

라파엘이 수줍게 웃었다.

“아리엘 님께서도 축제를 보러 오 셨군요!”

“네에. 규모가 큰 축제라 해서요.”

나는 문득 라파엘의 겉옷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는 붉은색 여름용 자 켓을 걸치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 붉은색.’

점술가의 점괘가 떠올라, 나는 무 심코 라파엘에게 물었다.

“혹시 지병이 있으신가요?”

“네?”

“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신, 마왕, 검에 뚫린 시체. 그리 고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 그림.

이 카드들이 가리키는 내 ‘인연’이 라파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고 건강해 보였다.

라파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리엘 님, 저번 무도회 때 정말 멋지셨습니다.”

무도회라면…… 아.

사흘 전 있었던 샤를로트의 무도회 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매그너스 남작은 사교계 에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는 것 같더 군요. 소문으론 방안에 틀어박혀 나 오지도 않는다던데요?”

“아하하, 설마요. 창피를 당하긴 했 지만, 그렇게까지 좌절할 정도는 아 니었어요.”

“아뇨, 제가 매그너스 남작이었어 도 한 달은 두문불출했을걸요! 그나 저나, 그날 선보이셨던 향수는 판매 할 계획이 없으신가요? 그날 잔향만 맡았는데도 향에 반했거든요……!”

그렇게 말한 라파엘이 긴장한 얼굴 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박하와 케인즈, 생강 등을 잔뜩 넣 었던 그 향수 말이지.

안 그래도 고민 중이기는 했다. 그 날 이후, 가게에 찾아와 그 향수를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았으니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보고 있 어요.”

“그러시군요. 만약 판매하신다면 분명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거예 요.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이었

으니까요.”

라파엘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꽃집 청년은 아직도 내게 낯가 리나 보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 다.

“그럴게요, 라파엘 씨.”

“……라파엘.”

“ 네?”

“그, 그냥 라파엘이라고만 부르셔 도 된답니다.”

으응?

뜻밖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 다. 용기낸 듯 말을 쏟아낸 라파엘 이 볼을 빨갛게 붉혔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라파엘이 빠 르게 덧붙였다.

“너무 길다면 라피도 괜찮고요.”

“라피?”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불러서…… 아, 아니. 라파엘이란 이름이 너무 길 리가 없구나.”

라파엘이 혼잣말을 하더니 얼굴을

더욱 붉혔다.

순식간에 사과처럼 새빨개진 얼굴 에 놀란 나는 얼른 대답했다.

“좋아요. 라파엘이라고 부를게요.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앗,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라파엘의 얼굴이 활짝 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라파엘도 제게 말을 놓으세요.”

“네? 아뇨! 제가 어떻게 아리엘 님

께!”

라파엘이 마구 손사래를 쳤다.

뭐지. 나는 의아한 눈으로 라파엘 을 바라보았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말 놓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뭐. 라파엘이 그게 편하다면야. 알 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라파엘 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축제를 더 즐기실 예정이시 라면…… 제가 호위를 해 드려도 괜 찮을까요?”

“ 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제가 호위 해드리면 안전하게 축제를 관람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미 있는데요. 호위.”

내 손가락이 에른을 가리켰다. 그 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라파 엘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 확실히 믿음직한 호위기사 군요.”

라파엘이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에른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말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호위가 아니라 같이 축제 구경을 하는 거라면 허락할게요.”

“네?! 정말요?”

깜짝이야.

나는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라파엘 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요.”

“저 안내 잘할 자신 있어요! 이 거 리는 구석구석 잘 알고 있거든요!”

“아, 네에. 잘 되었네요. 감사해 요.”

라파엘이 기쁜 얼굴로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리나, 그리고 에른은 그의 뒤 를 따라 본격적인 축제 구경에 나섰 다.

# 쑤

사건은 풍선 다트 게임에 한창 열 중하고 있던 와중 일어났다.

뿌우우우!

퍼레이드를 알리는 나팔이 또 한 번 크게 울렸다.

나는 재빨리 인파가 몰리는 쪽의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다.

“리나! 내 손 꼭 잡…… 어?”

리나를 찾아 고개를 돌린 나는 순 간 멍하니 굳어버렸다.

좀 전의 퍼레이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인파가 밀려오

고 있었다.

나는 넋을 놓곤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아가씨. 이리로 오십시오.”

에른이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리 나를 찾았다.

“에른 경, 리나는요?”

“저 여기 있어요!”

“응, 에른 경 곁에 꼭 붙어 있…… 어라? 리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 대답한 리나가 보이지 않 았다.

동시에 거대한 인파가 들이닥쳤다. 퍼레이드 행렬의 나팔 소리와 노랫 소리에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에른 경! 리나가 안 보여요!”

나는 소란 속에서 에른에게 외쳤 다.

“찾아보겠습니다. 멀리 가지 않았 을 겁니다.”

“이 인파에 휩쓸린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디. 저 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라파엘이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물론 야무진 리나라면 길을 잃는다 해도 금방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단어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와 에른, 라파엘은 둘로 찢어져 리나를 찾았다.

그러나 숨 막히는 인간들의 파도 속에서 작은 소녀를 찾기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앗, 저건!”

둥실 뜬 무지갯빛 풍선이 내 시선 을 잡아챘다. 아까 리나에게 사주었 던 그 풍선이었다.

나와 에른이 사람들을 헤치며 풍선 을 든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리나?!”

“어…… 누구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풍선의 주인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별일 없겠죠?”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가 씨.”

“하아……/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인파에 휩쓸려 넘어지기라도 했으

면 어떻게 하지. 길을 헤매다 무뢰 배들에게 잡힌 거라면?

불안한 생각들이 심장을 쿵쿵 펌프 질했다.

“마법사에게 수색을 의뢰하는 방법 도 있습니다. 의뢰 금액이 높긴 하 지만, 어떻게든 리나 양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 오.”

“그런 방법이 있군요……! 알려줘 서 고마워요.”

암흑 속에서 등불을 발견한 기분이

었다.

“그럼 우리 이곳은 라파엘에게 맡 기고 바로 마법사를 찾아가 보죠!”

“예. 아가씨.”

우리는 곧장 마법 길드로 향했다.

다행히 제도의 마법 길드 중 가장 크고, 수준 높은 길드 사무소가 근 방에 있었다. 해가 지는 반대 방향 으로 조금 걸은 끝에 나와 에른은 인근의 마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마법 길드.’

높다란 건물 앞에 선 나는 잠시 긴장했다. 마법 길드라는 이름에 걸 맞게 건물은 무척 요상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외벽은 보라색이었고, 유리처럼 매 끄러워 보였다. 고개를 홱 젖혀야 보이는 탑의 끝은 구름을 찌를 듯 뾰족했다.

요사스러운 외관이 잠깐 나를 멈칫 하게 했으나, 곧 나는 리나를 떠올 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탑에 들어선 순간 짙은 안개가 몸 을 감쌌다.

“놀라지 마십시오. 아가씨. 방문객 이 위험인물인지를 탐색하는 마법입 니다.”

뒤에서 에른이 낮은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이나마 긴 장을 풀 수 있었다.

잠시 뒤 자욱하던 안개가 거짓말처 럼 걷혔다.

동시에 강렬한 향기가 내 코를 찔 렀다. 머리가 아찔해지도록 강한 쟈 스민 향기.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잠시 제자리에서 숨을 골랐

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마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다란 로브를 두른 마법사가 내게 꾸벅 묵례했다.

치렁치렁한 로브와 별 문양이 그려 진 고깔모자.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마법사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사람이었다.

그 흥미로운 외관에 나는 잠시 멍 하니 시선을 뺏겼다.

대답 없는 내가 의아한 듯 마법사

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내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법사가 그 방향을 향해 살짝 묵 례하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의 신기한 외관 을 관찰하느라 뒤에서 누군가가 다 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뒤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 렸다.

“이제 오십니까, 레이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질적인 공간에서, 익숙한 얼 굴이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미아를 찾으십니까?”

세드릭 에반스가 씩 웃으며 말했 다.

그제야 나는 멍하니 그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 히끅!”

리나가 딸꾹질과 함께 나를 불렀 다.

제발 구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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