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화〉
“하긴, 아가씨께선 그런 축제에 그 다지 흥미가 없으시겠죠.”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건 지, 리나가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 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까 시끄럽 고…… 경박하고…… 네. 그렇네요. 역시 아가씨 취향은 아닐 것 같아요!”
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태연한 척하려는 것 같지만, 창밖을 바라보는 눈에서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나도 축제에 열광할 나이였지.
어쩔 수 없지.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녀와.”
“어? 네?”
“레니아 지구에서 열리는 축제라 며? 그럼 세논 지구 쪽엔 사람이
별로 안 올 테니, 가게는 나랑 에른 이 볼게. 리나는 놀고 와도 좋아.”
“네에?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제가 아가씨를 두고 혼자 놀러가요!”
으음. 하긴, 번잡한 곳에 리나만 혼자 보내려니 조금 불안하기도 했 다. 요즘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 데.
“그럼 에른 경이랑 같이 다녀와.”
“네에에?”
“그건 안 됩니다. 아가씨.”
리나가 경기를 일으켰다. 에른 역 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혼 자 둘 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문득 세드릭이 대체 언제까지 이 유능한 기사를 내 전담 호위로 낭비할지 궁금해졌지만, 곧 쓸데없 는 생각을 지워냈다.
“아가씨, 저어, 그럼요.”
리나가 우물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잠깐만 다녀와도 될까요? 축제 때
마다 여는 엄청 용한 타로 가게가 있거든요……!”
“타로 가게? 거기만 다녀와도 괜찮 겠어?”
“네! 전 그거면 충분해요! 연애점 을 엄청 잘 본다고 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헤헤.”
리나가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나 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으며 말했 다.
“그래, 타로 가게 한 곳 정도는 에 른 경도 괜찮을 거야.”
“불가능합니다. 아가씨.”
“하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융통성 없는 기사님 같으니라고.
“리나 혼자 보낼 순 없는데.”
“저어, 그럼요, 아가씨.”
리나가 슬그머니 나를 불렀다. 고 개를 돌리자 초롱초롱 간절함으로 빛나는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같이 가 주시면 안 되나요?”
“응?”
내가?
타로 가게를?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미신은 전혀 믿지 않는 편이었다. 타로 가게가 한참 유행할 때도 근처 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
리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
려다보았다.
“미안, 리나. 난 그런 것에 취미가 없어.”
“아, 그러시군요……! 하긴 냉철하 고 명석하신 아가씨께서 그런 미신 에 흥미를 두실 리가 없죠……
리나가 못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애써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서 글픔을 감추지는 못했다.
“제가 아가씨께 무리한 부탁을 드 린 것 같아요. 죄송해요. 잊어주세
요 저희 얼른 가게로 가요!”
리나가 애써 밝은 얼굴로 외쳤다.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 쌌다.
호 쏘 쏘
오 분 뒤.
나는 인파로 뒤덮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리나와 에른을 양쪽에 한 명씩 달고서.
“헉, 아가씨, 저기 보세요! 신기한 풍선이에요!”
“사줄까?”
“네에? 아뇨! 제 나이에 풍선은 무
스 ”
리나가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꼬았 다. 나는 매대로 걸어가 무지갯빛 풍선을 하나 샀다.
“자아, 리나.”
"아가씨이……! 저 진짜 필요 없는 데!”
리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웃 으며 말했다.
“리나 사준 거 아닌데? 가게에 장 식하려고 산 거야. 돌아갈 때까지만 리나가 들어 줘.”
“……아, 그, 그러면 제가 잠시 ……!”
그제야 리나가 부끄러움을 이기고 풍선을 들었다.
나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른에 게로 고개를 돌렸다. 투구를 쓰고
있으니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맞겠지.
“에른 경도 하나 필요하세요?”
“괜찮습니다.”
언제나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 다. 나는 입꼬리를 비죽였다. 언젠간 저 투구를 꼭 벗겨 봐야지.
“리나. 타로 가게는 어느 쪽에 있 는지 알아?”
“아? 네, 네에! 이쪽일 거예요!”
신기한 듯 풍선을 만지작거리던 리 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와 에 른은 리나의 길안내를 따라 발걸음 을 옮겼다.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말 그대로 파도가 치듯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 었다. 리나가 곳곳에 설치된 길거리 음식 매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 다.
머지않아 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 다.
‘ 찾았다.’
신비로운 보랏빛 천막, 입구에 놓 인 수정구. 묻지 않아도 저곳이 타 로 가게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 다.
나는 순간 코를 움찔거렸다. 익숙 한 냄샌데?
“영업 끝났습니다.”
“아……!”
건조한 목소리가 들리자, 리나가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엄청 유명하다는 가게 앞에 왜 줄이 없나 싶더라니.
혀를 한 번 찬 나는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돈을 찔러줘서라 도 한 명만 더 받아줄 순 없냐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죄송하지만, 혹시 추가금을 내서 라도…… 어라?”
“어머나? 레이디 윈스턴?”
점술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내 가게에 몇 번 들른 적 있는 손님이
었으니까.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 기가 난다 싶더라니.’
내가 만든 향수니 당연한 거였다.
‘신비롭고 몽롱한’ 향기가 필요하 다고 그렇게 강조하더니, 타로 가게 에서 쓰려고 했던 건가.
“어머나. 이런 곳에서 뵙네요, 손 님.”
“아리엘 님께서 오시다니! 아유,
아리엘 님이라면 당연히 봐드려야 죠. 어서 여기 앉으세요.”
점술사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안으 로 안내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 때 구매한 향수, 얼마나 잘 쓰고 있 는지 몰라요. 지금도 잔뜩 뿌려놓은 상태인데. 느껴지시죠? 이걸 맡고 있으면 영감이 아주 훨훨 샘솟는다 니까요. 호호호.”
점술사가 부산스레 수다를 떨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건조하고 사무 적이던 목소리와는 딴판이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뇨, 제가 보려는 게 아니에요. 리나? 이리 오렴.”
“네에……!”
리나가 긴장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 다.
수정구 앞에 앉은 리나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 을 지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손님이었군 요? 이리 앉아요.”
“연, 연애운을 보고 싶은데요.”
“좋아요. 자아, 긴장 풀고. 이 수정 구 위로 손을 올려요. 그리고 정신 을 집중하는 겁니다.”
점술이 시작되었다.
나는 점술사가 화려하게 타로카드 를 펼치는 걸 멍하니 구경했다. 리 나에게 카드를 열 댓장 가량 뽑게 한 뒤, 점술사가 활짝 미소를 지었 다.
“아가씨의 인연은 생각보다 가까이 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머, 정말요?”
리나가 두 손을 모았다. 점술사가 카드들을 짚으며 설명했다.
“네. 여기 연인 카드가 보이시죠? 이건 결과를 뜻하고, 여기 모험을 떠나는 여행자 카드가……
점술사가 복잡하게 설명을 하면 할 수록 리나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찼 다. 나는 리나 몰래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저 나이대 소녀 같았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점술가님!”
“뭘요. 언제든 또 놀러와요. 아리엘 님도 괜찮으시다면 점 한 번 보시지 그러세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점술 엔 정말 흥미가 없었다.
“돈 안 받을게요. 성심껏 봐드릴 테니 한 번 봐 보세요!”
“그래요, 아가씨! 이 분 진짜 영험
하세요! 막 제 어렸을 적 일도 다 맞추셨다니까요?”
나는 둘의 등살에 못 이겨 결국 수정구 앞에 앉았다. 그래, 공짜라는 데 뭐……,
“레이디의 인연이 현재 어디에 있 는지 먼저 알아보지요. 먼저 한 장 뽑아보세요.”
나는 순순히 카드를 한 장 뽑았다. 해골이 그려진 카드가 나왔다.
“죽은 건가요?”
“아…… 아뇨, 아닐 겁니다. 한 장 더 뽑아 봐요.”
연달아 마왕과 사신, 시체에 검이 꽂힌 그림 카드들이 뽑혔다. 점술사 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역시 죽었다는 뜻이겠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연이라는데 죽었다고 생각 하니 조금 착잡했다. 부디 내세에는 무병장수하기를.
점술사가 섬뜩한 그림의 카드들을 붙잡고 끙끙댔다. 나는 그녀를 안타 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끔찍한 점괘를 어떻게든 포장해주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새로운 인연이 생기겠 죠.”
뭐, 없어도 되고.
내가 존경했던 한 조향사중에는 평 생 향수와 살겠다며 독신을 선언한
사람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지.
점술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직 포기하지 말아요. 희망적이 지 않은 카드들이긴 하지만, 이 세 상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순 없 어요!”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수명이 간당간당한 상태 아닐까요?”
나는 피골이 상접해 굶어 죽어가는 할아버지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쩌면 엄청 직관적인 점괘일지도?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할아버지가 정 말 내 인연인 거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번 생은 그냥 보 내드리고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게 나 을 것 같은데……,
점술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깨 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레이디. 점괘는 점괘일 뿐이니 잊어버려요. 저라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전부 다 맞추지는 못 한답니다. 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순 없죠! 자, 자. 대신 오늘의 운세를 봐 드릴게요.”
괜찮다고 하려 했으나, 점술사가 하도 시무룩해 보여 나는 그냥 카드 를 몇 장 더 뽑기로 했다.
이번엔 퍽 밝아 보이는 그림들이 나왔다. 연인, 별, 태양.
“오호, 이건!”
점술사가 눈을 빛냈다.
“오늘은 사람이 많은 곳, 붉은색이 많은 곳을 향해 보세요, 레이디. 귀 한 연을 만날지도 모르니.”
“귀한 연?”
“어쩌면 그 사람이 아까 점쳤던 레 이디의 인연일지도 모르겠군요.”
그 해골과 마왕, 피골이 상접한 할 아버지 카드의 주인공?
나는 떨떠름히 고개를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마실이라도 나 오셨나?
“굉장히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사 람입니다. 레이디께서 구태여 만나 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맞닥뜨리 게 되겠군요.”
“흐음. 그렇군요.”
“잘됐네요, 아가씨! 사람 많은 곳, 붉은색! 저도 기억할게요!”
리나가 밝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