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화〉
칙.
향수가 분사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가볍게 코끝을 막 았다.
“……에, 에에……『’
매그너스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크게 한 걸음 물러섰 다.
“에, 에에에에……,”
매그너스가 넘어갈 듯 숨을 꺽꺽댔 다.
생각보다 더 예민하시네.
나는 한 걸음 더 멀찍이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허리를 뒤로 크게 젖힌 매그너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듯 고꾸라졌다.
“프에에엣취!”
곧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울려퍼졌 다.
쨍그랑.
동시에 매그너스가 향수병을 떨어 뜨렸다. 박살난 향수가 귀한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이런.”
나는 슬픈 눈으로 깨진 향수병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크리스탈 병이 깨지자 구경꾼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매그너스의 정면에 서 있던 남자는 침을 그대로 뒤집어쓰곤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에에엑취!”
매그너스는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연달아 두 번 더 우렁차게 재채기를 내뿜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얼얼한 걸 그 대로 콧구멍 안에 집어넣었으니.
수 번 더 재채기한 매그너스가 시 뻘게진 얼굴로 내게 삿대질했다.
“이, 이, 이게…… 헷, 으엣취! 이, 이보시오! 이게, 이게이게 도 대체 무슨 짓, 흐에엑취!”
“남작님, 괜찮으세요?”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료를 말씀드렸는데도 그 매운 걸 코에 대고 분사하시길래 예민하
지 않은 타입이신 줄 알았어요. 괜 찮으신가요?”
“이, 이……-”
“아니면 설마, 그렇게 매울 줄은 예상하지 못하신 건가요?”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재료를 듣자마자 엄청 매울 것 같 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설마 그렇게 큰 향수 가게를 하는 사람이 그걸 예상 못 했을까?”
“하지만 저 표정 좀 봐. 진짜 몰랐 나 봐.”
매그너스의 얼굴이 점점 더 시뻘게 졌다.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았다.
“다, 다, 당연히 알고 있었소! 몰랐 을 리가!”
“알았던 사람이……-”
매그너스의 재채기를 그대로 뒤집 어쓴 남자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 으며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매그너스의 얼굴은 이제 빨갛다기 보다 보라색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남작님. 이 향수는 멀찍 이서 뿌려야 한다고 미리 말씀을 드 렸어야 했는데. 제 불찰이에요.”
사과의 말을 늘어놓은 나는 아까 미리 따로 담아두었던 향수병을 꺼 내 허공을 향해 향수를 뿌렸다. 그 리고 향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 다가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상쾌하면서도 톡톡 튀는 향기 입자 가 온몸에 내려앉았다. 코에서부터 머릿속까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었다.
“정석대로는 이렇게, 뿌리셔야 해 요.”
“오오……!”
워낙 강렬한 향이라서인지, 가까이 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도 향이 닿 은 듯했다. 구경꾼들의 표정이 변했 다.
“뭔가 독특한데?”
“조금 더 맡아보고 싶어.”
몇몇이 살그머니 내게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잔향이 라도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오오, 신기하군. 까딱하면 악취처 럼 느껴졌을 것 같은데, 불쾌하기는 커녕 더 맡고 싶어.”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것 같지 않 소?”
“재료가 뭐라고 했더라? 박하와 또 뭐였지? 누구 제대로 들은 사람 없 어요?”
사람들이 소곤소곤 감상을 나눴다.
나는 속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향수는 가끔씩 잠이 올 때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었다. 매그너스를 늘려주기 위해 매 운 강도를 더 높였는데, 그 덕분에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 했다.
매그너스가 요란하게 코를 풀고는 내게 삿대질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건 음 모야! 나를 망신 주기 위해 저 여자 가 꾸민 잔꾀입니다!”
“글쎄요. 잔꾀라기엔…… 남작님께 서도 윈스턴 영애처럼 멀찍이서 시
향하셨으면 그런 참사를 당하지 않 으셨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박하와 생강, 케인즈까지 잔뜩 든 향수를 코앞에서 맡으시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죠. 특히 케인즈는 조금만 넣어도 혀에 불이 나는 향신료인 데.”
한 마디씩 툭툭 던진 사람들이 저 들끼리 수군거렸다.
“매그너스 남작께선 정말 허브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그러게요. 아무리 조향사가 향수
를 개발한다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향수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파는 물건을 믿을 수 있을까 요?”
안타깝게도 매그너스는 귀가 내 예 상보다 더 좋은 듯했다. 수군거림이 심해질수록 매그너스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여, 여러분. 하하하. 제가 이런 기 본적인 재료들을 모를 리가 없지 않 습니까? 제가 누구입니까. 화장품 유통업계를 평정한 폰타 매그너스입 니다! 방금은 저도 모르게 방심한
나머지 실수…… 흐, 실수를…… 흡. 잠시만요!”
애타게 ‘잠시만’을 외친 매그너스 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요란 하게 코를 풀었다.
크흐응! 코 푸는 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지자, 사람들이 눈을 찌푸렸 다.
코를 다 푼 매그너스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처벅처벅 내게 걸어왔다. 그리곤 눈을 부라리며 속닥거렸다.
“어떻게 내게 이런 모욕을 주실 수
있습니까, 레이디! 이건 철저히 계 획된 음모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떻 게 이런 짓을!”
“음모라니, 대결을 제안하신 건 남 작님이세요.”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크흥, 기다리고 계셨겠지요.”
“코 마저 풀고 말씀하세요.”
나는 재빨리 매그너스에게 손수건 을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든 그가 팽- 시원하게 코를 풀고는 큰 소리 로 외쳤다.
“레이디, 정말 무서운 사람이로군 요! 날 망신주려고 이런 기회가 오 기만을 호시탐탐 노린……/
“그만해라, 폰타. 더는 봐줄 수가 없구나.”
벌떡,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났다.
데이먼 후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인 걸로 충분하지 않으냐? 케인즈가 든 향을 콧속에 그대로 들이붓는 녀석은 내
살다살다 처음 보는구나!”
“대, 대모님……?
“예술에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사 업에 눈이 멀어 여기저기 일 벌리는 꼬락서니가 불안하다 싶더니만, 에 잉.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네 녀석의 대모가 됐을꼬. 당 분간은 보지 말자꾸나, 지긋지긋한 대자야.”
“대모님!”
매그너스가 펄쩍 뛰었다.
“오늘 여기까지 널 따라나온 것은
혹여나 네가 예술을 존중하기 시작 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 만……
후작이 쯧 혀를 찼다.
“그건 내 헛된 망상이었군. 쯧. 오 늘 일로 톡톡히 배웠길 바란다, 대 자야. 돈만 좇다가는 머지않아 큰코 다치게 될 게다. 오늘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만큼.”
홀을 나서며 후작이 내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순간 몸을 굳혔다. 후작은 알 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매그너스 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내기에 응 했다는 사실을.
후작은 잠시 동안 나를 찬찬히 훑 어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제기랄, 빌어먹을!”
매그너스가 분을 못 이겨 욕설을 뱉었다.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열이 오른 그는 쿵쿵대며 홀을 빠져나갔 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 라보았다. 저 뒷모습 위로 수많은 다른 이들의 등이 겹쳐 보였다.
매그너스는 내가 향수 대회에서 만 났던 몇몇 사람들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타입 이었다. 오늘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일을 벌인 것만 봐도 그랬다.
매그너스와 같은 타입들의 약점은 간단했다. 남들의 시선. 수 많은 사 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순간, 그들 은 전투의욕을 잃어버린다.
약점이 명확한 만큼 어떻게 보면 상대하기 쉽고, 자폭도 잘 하는 유 형의 인간들이었다.
‘앞으로 나를 볼 때마다 오늘 일이 떠오르기를 바라요, 남작님.’
그럼 지금처럼 나만 보면 모기처럼 달려들지는 않겠지.
나는 샤를로트에게로 고개를 돌렸 다.
“샤를로트 양,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해 서 죄송해요.”
“어머나. 죄송하긴요. 조만간 제가 찾아갈게요. 오늘 일에 대해 더 자
세히 이야기 나눠요, 우리.”
샤를로트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홀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수많은 시선이 꽂혔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 은 듯이 회장을 걸어나갔다.
눈을 뜨자, 밝은 아침햇살이 나를 맞았다.
왠지 오늘도 어제처럼 운세가 좋을 것만 같았다.
어젯밤, 매그너스를 골탕 먹이고 돌아오는 길.
행사용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 오 랜만에 윈스턴 백작가에 들렀었다.
한 소리 들을 각오하고 간 것이었 는데, 뜻밖에도 백작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나는 가게에 가지 않고, 내 방에서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기지개를 켠 나는 줄근 준비를 하 기 시작했다. 씻고, 옷을 입고, 가볍 게 치장한 뒤 간단한 아침 식사’.
다행히 윈스턴 백작은 식당에 나타 나지 않았다. 집사 말로는 어젯밤
늦게 들어왔다는데, 아침을 먹으러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나 따윈 꼴도 보기 싫다는 일종의 침묵시위인 듯 싶었다.
나는 드넓은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맛있게 마친 뒤, 마차 위에 올랐다.
“오늘은 길거리에 사람이 엄청 많 네.”
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자, 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아가씨! 오늘이 바로
그날이잖아요!”
“ 그날?”
“아이, 입춘제 말이에요!”
“입춘제라면…… 아.”
나는 탄성을 뱉었다.
봄의 시작을 기념하는 입춘제 때마 다 거리에서는 큰 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미간을 좁히곤 손끝으로 톡톡 탁자를 두드렸다.
남자주인공이 처음으로 폭주하는 날이기도 했다.
‘뭐. 앞으로 삼 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긴 하지만.’
나는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그 사 건’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의 일 이었다. 남자주인공이 한창 금단증 상으로 미쳐가던 때.
‘세드릭이 남자주인공이라고 생각 하니까, 새삼 거리감이 느껴지네.’
나는 세드릭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시력이 살아 있었을 땐 눈으로, 시력을 잃었을 땐 귀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었던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 활자에 의존해 상 상해야 했던 다른 차원의 존재.
하지만 기억은 또 다른 기억으로 덮인다. 지금 내가 아는 세드릭 에 반스는 활자가 아니라 숨을 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이었다.
‘따뜻한 피가 흐르고. 감정이 있는 인간.’
잠시 묘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흔들어 괜 한 생각을 떨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