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9화 (39/153)

〈39 화〉

매그너스가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 다.

우리 둘의 긴 대치에, 어느새 꽤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 었다.

그 사람들에게 들리게끔 매그너스 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으로만 이러지 마시고, 한 번 정정당당히 저와 겨뤄보시는 건 어

떻습니까?”

“겨루다니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웬 결투 신청?

매그너스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픽 웃었다.

“그야 물론 향수로 실력을 겨루자 는 거죠. 저희 둘 다 각자의 향수에 제법 자부심이 있지 않습니까? 주종 목으로 정해 겨뤄봅시다.”

아하, 그 이야기였군.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간혹 향수 대회가 열리기는 했다. 참가해서 수 상한 적도 몇 번 있었고.

분명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지 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제가 굳이 그런 수고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남작님.”

나는 피곤했다. 잠도 거의 이루지 못했고, 세드릭과 춤을 추느라 그나 마 남아 있던 에너지도 바닥난 상태 였다.

게다가 매그너스를 상대해야 할 필 요성도 못 느끼고 있었다. 경쟁이란 건 대등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였다. 매그너스는 내 경쟁자가 아니었고.

내 거절에 매그너스가 흥분한 듯 또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시던 레이디 께서 갑자기 왜 이렇게 나약한 말씀 을 하시는 겁니까?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말이죠. 자 신이 있으시다면 이번 기회를 이용 해 실력을 입증하시면 되는 것 아니 겠습니까?”

“글쎄요.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서.”

내가 왜 당신 앞에서 내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매그너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하, 레이디께서는 컨디션에 좌 지우지될 정도로 실력에 대한 자신 감이 부족하신가 보군요?”

되게 끈질기네.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그너스의 커다란 목소리에 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

고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였다.

“마침 이 자리에 제 가게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난 조향사가 참석해 있 습니다. 제 대모이신 데이먼 후작님 께서도 자리해 계시고요. 그분의 명 성에 대해선 레이디께서도 익히 알 고 계시겠지요.”

매그너스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분이 후원하고 계시는 예술가들 만 해도 십수 명이죠. 예술을 사랑 하는 마음과 섬세한 감각으론 이 제

도에서 따라갈 자가 없는 분입니다.

그분의 판단이라면 정확하겠죠.”

“레이디와 나. 어느 쪽의 향수가 더 뛰어난지 말입니다.”

나는 낮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기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하겠다 는 말을 이렇게 당당히 할 줄이야.

소란을 들었는지 샤를로트가 다가 왔다.

“아리엘 양. 괜찮아요? 이런 막무 가내 제안, 응할 필요 없어요.”

샤를로트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 어 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매그너스의 제안은 막무가내였고, 무례한 것이 었다. 거절한다 해도 흠잡을 사람은 없었다오

“뭐, 레이디 샤를로트의 말이 맞습 니다. 거절하셔도 되지요. 그럼 전 편안히 레이디 아리엘이 도망치는 진귀한 모습을 감상하면 되겠군요.”

매그너스가 입에 기름을 바른 듯

줄줄 말했다.

나는 삼 초 정도 짧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결 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아리엘 양, 굳이 응하지 않으셔 도……,”

“괜찮아요, 샤를로트. 얘기나 들어 보죠.”

매그너스가 자신만만한 듯 턱을 쳐 들고 말했다.

“당연히 향수를 제작하는 겁니다.

준비된 재료들을 이용해 즉석에서 향수를 만들고, 누구의 것이 더 훌 륭한지 제 대모님께 심사를 부탁드 리는 거죠. 물론 형평성을 위해 제 작된 향수가 누구 것인지는 비밀에 부치고요.”

형평성을 위한다라…… 그래봤자 매그너스의 대모가 심사위원이니, 그는 어떻게든 제게 유리하도록 판 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뻔한 함정이었다. 걸리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그너스 역시 내가 거절하리라 생 각하고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서 소

리를 친 거겠지.

하지만 나는 매그너스의 그 얕은 계산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수락하죠.”

“아리엘 양……!”

“하하, 좋습니다. 역시 레이디께선 배짱 하난 두둑하시군요.”

껄껄 웃어젖힌 매그너스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대 기 중이던 하인이 달려왔다.

“준비해라.”

“예, 주인님.”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하인이 빠르게 대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샤 를로트는 나를 위해 다른 연회장을 준비해주었다.

무도회장보다 작은 홀이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들어찼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글쎄, 즉석에서 향수를 만들어 경 합을 한다나 봐.”

“어머, 한쪽은 매그너스 남작님이 잖아? 나, 저분이 유통하는 화장품 전부 잘 쓰고 있는데.”

“나도. 그리고 상대편은……

“아리엘 윈스턴 영애라, 이름은 들 어 봤어. 친구가 저 사람 향수를 그 렇게 칭찬하던데.”

“으음, 그래봤자 소규모 가게잖 아?”

“그건 그렇지.”

내가 귀가 밝은 걸까, 이곳 사람들 이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나는 나에 대한 영애들의 거침없는 수다를 들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데이먼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입장했다.

“이번엔 또 뭐냐, 폰타.”

“아, 대모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간단히 시향만 해주 시면 됩니다.”

데이먼 후작이 귀찮기 그지없는 표

정으로 매그너스가 마련한 심사위원 석에 앉자, 매그너스가 앞으로 나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승부는 단판입니다. 재료는 여기 준비된 것들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종류는 넉넉히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한시간은 한 시간으로 하죠. 어떻습니까?”

나는 무심히 말했다.

“좋아요.”

“좋습니다. 그럼 저는 제 가게의

조향사를 출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의는 없으시겠죠?”

“그러세요.”

“향수를 만든 뒤 짙은 색 천으로 가리고, 대모님께 시향을 부탁드린 뒤 선택받는 쪽이 우승하는 것으로 합시다. 참고로 대모님께선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향이 든 품격으로만 판단하실 겁니다.”

데이먼 후작은 여전히 피곤한 표정 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매그너스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왔을 뿐, 지금 상황이 그저 귀찮고 피곤한 것 같았 다.

내 상대가 될 조향사가 나를 흘끔 거렸다. 예술가라기보단 유약한 학 자의 인상을 풍기는 청년이었다. 제 국 아카데미 화학부를 수석으로 전 공한 인재라 했던가.

화학 지식은 조향에도 여러모로 도 움이 된다. 확실히 탐나는 인재긴 했다.

“그럼, 십 초 뒤에 재료를 공개하 겠습니다.”

매그너스의 말이 끝나자, 재료들이 올려진 뷔페 테이블로 시선이 모였

다. 테이블은 까만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매그너스가 기세 좋게 남은 시간을 쟀다.

“오, 사, 삼, 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아 련한 추억에 잠겼다.

열여섯이었던가, 처음 향수 대회에 참가했던 게…… 그때 회장에 서서 참 긴장했었는데. 손도 마구 떨고. 냄새도 헷갈리고.

그래, 그땐 그랬었지.

한창 옛 향수에 빠져 있을 때쯤 매그너스가 외쳤다.

“일! 시작!”

동시에 재료를 가린 천이 걷혔다.

“오오……,”

사람들이 웅성댔다.

뷔페 테이블 위에는 꽤 많은 종류 의 허브와 꽃잎이 놓여 있었다.

상대 조향사가 종종거리며 테이블

로 다가갔다. 나는 눈으로 테이블을 살피며 천천히 다가갔다.

‘어디 보자.’

찾던 것은 금세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까운 순서대로 차례차례 재 료를 담았다.

박하. 케인즈. 바질. 페퍼민트.

살짝 내게로 시선을 던진 상대 조 향사가 멍하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생강 뿌리를 마지막으로 담은 뒤 뷔페 테이블을 떠났다.

“벌써 재료를 고르셨나 보군요? 이 야, 역시 눈썰미가 뛰어나신 윈스턴 영애 답습니다.”

매그너스가 칭찬하는 척하며 이죽 거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재료들을 도구에 넣었다.

마법 공학의 원리로 작동하는 도구 가 빠르게 재료들을 압착했다.

머지않아 향수가 완성되었다.

“다 됐어요.”

“엥?”

잠시 시계를 살피던 매그너스가 당 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곧 험, 험 목소리를 가다듬곤 말했다.

“정말 이대로 끝내시겠습니까? 넉 넉히 시간을 쓰는 게 좋으실 텐데 요.”

“끝났어요.”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럼 우리 조향사의 향수까지 완성 되면 대모님께 시향을……『

“매그너스 남작님.”

말허리를 잘린 매그너스가 눈을 끔 뻑 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향수병을 찰랑찰 랑 흔들었다.

“이 향수에 들어간 재료를 알려 드 릴게요.”

“예? 아니, 그냥 대모님께만 드리 면……

매그너스가 황당한 눈을 했다.

나는 매그너스 같은 타입의 사람을 몇 알고 있었다.

개중 대부분은 향수 대회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상금과 명예가 걸려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쉽게 바닥 을 내보였다.

매그너스보다 우아하게 상대를 내 리까던 사람도 있었고, 그보다 더 뻔하고 저열한 사람도 있었다. 성향 은 조금씩 달랐지만……오

‘퇴치하는 법은 똑같았지.’

나는 노래하듯 향수의 재료를 읊었

다.

“박하와 페퍼민트. 바질과 케인즈, 그리고 생강 뿌리.”

상대 조향사가 바삐 향수를 만들다 말고 또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파엘 역시 당황스러운 듯 입을 헤 벌렸다.

매그너스는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이걸 왜 제게 말해주는지 도무지 영 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잘 들으셨나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예. 잘 들었습니다.”

매그너스가 떨떠름히 끄덕이더니 제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신선한 조합은 아니군요. 조 금 틀에 박혔다고나 할까? 저희 가 게에서 지향하는 스타일은 아닙니 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먼저 시향해 보시겠 어요?”

“예? 시향은 대모님께서……/

“만들다 보니 마음에 들어서, 며칠 안에 기성품으로 출시할까 해요. 남 작님께선 제 선의의 경쟁자시잖아 요? 미리 시향해보실 기회를 드리려 고요.”

매그너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 다. 이게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가 늠해보는 눈이었다.

나는 무해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 금곤 향수병을 건넸다.

“자, 맡아보세요.”

매그너스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갔다. 내 저의가 뭘까 골똘히 고민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뾰족한 답을 얻지 못했는지 내게서 향수병을 건네받았 다.

“……흐, 흠. 그럼 잠시 실례.”

매그너스가 향수병을 쥐었다. 그리 곤 분사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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