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화〉
나는 조심스레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그는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없는 나 를 여전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 었다.
세드릭은 모른다. 내가 오늘 뿌린 향수가 정확히 어떤 향수인지.
만약, 그가 내 향수의 마법적인 효 능을 알게 된다면?
내 이미지는 그날로 끝이었다. 그
는 내가 자신을 홀리기 위해 또 이 상한 수단을 동원했다고 여길 게 뻔 했다.
그렇게 되면 내 이미지는 예전처럼 색향이나 뿌려 대던 아리엘 윈스턴 때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겨우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또 뒤 통수를 맞은 격이니 파급력은 두 배 겠지.
‘혹시 화를 참지 못하고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나는 내 가게를 떠올리고 홰홰 고
개를 저었다.
안 돼. 어떻게 이룩한 가게인데, 한 번 투자하면 그대로 끝이라고! 줬다 뺏는 건 중범죄야!
“레이 디?”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세드릭의 앞에서 너무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걸 깨달 았다.
나는 고개를 들곤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걸쳤다.
“죄송해요, 전하. 발을 밟을까 봐 너무 걱정되어서.”
“그까짓 발 좀 밟으면 어떻습니 까.”
어떻긴, 안 되지.
나는 고개를 숙여 세드릭의 반질반 질한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밟았 다간 그대로 선명한 자국이 나고 말 것이다.
세드릭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휘감 았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그에게 안긴 바람에 나는 자연스레 다시 위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붉은 눈이 웃음기를 담고 휘어졌 다.
“제게만 집중하시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 봐. 역시 이상하잖아.
어쩌면 클레어에게서 대금을 받아 냈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드릭 에반스가 이 렇게 변할 정도라면 엄청난 명약이 잖아. 아니…… 명향?
내가 여전히 딴 생각에 잠겨 있자, 세드릭이 불만스러운 듯 내 허리를 더 바싹 끌어안았다. 그러자 허리가 곡선으로 휘면서 그와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 전하.”
“네.”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원래 왈츠는 그렇게 추는 겁니 다.”
그래?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 라보았다. 우리처럼 밀착해 있는 커 플은 어디에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왈츠가 끝난 뒤, 나는 겨우 세드릭의 품에서 풀려났다.
“왠지 지쳐 보이십니다.”
세드릭의 말처럼 실제로 나는 지쳐 있었다. 세드릭 몰래 머릿속으로 다 른 생각을 좀 많이 했어야지.
괜찮아, 진정하자.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향의 효과는 길어야 일주일 이다. 그동안만 세드릭을 살짝 멀리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세드릭이 또 무언가 내게 말을 걸 려 했다. 어떻게 도망을 쳐야 하나 머리를 굴릴 때였다.
“ 전하.”
시종이 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곤 작게 죽인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듯 했다.
시종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세드릭
은 표정이 없어졌다. 곧 낮게 한숨 을 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레 이 디.”
“급한 일이 생기셨나 봐요. 그럼 어서 가보셔야죠.”
나는 얼른 세드릭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세드릭은 건넬 말이라도 있는 듯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러나 그는 입을 여는 대신 가볍게 웃곤 내게 인사를 했다.
세드릭과 시종의 뒷모습이 무도회 장 너머로 사라져갔다. 회장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 며 아쉬워했다.
역시 너무 오래 공작님을 독점했 나.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뷔페 테이블 쪽으로 빠지 려 할 때였다.
거슬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이거 오랜만에 뵙는군요. 레이디 윈스턴.”
뒤를 돌아본 나는 미간을 굳혔다. 폰타 매그너스의 재수 없는 낯짝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동종 업계인으로서 안부 인사를 건네러 온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시비를 걸고 싶어 온 것 같은데.
일부러 세드릭이 퇴장할 때까지 기 다린 듯싶었다.
나는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 사했다.
“안녕하세요. 매그너스 남작님. 이 런 곳에서 다 뵙네요.”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장사에 연 구에, 공사다망하실 레이디께서 이 런 유희의 장에 참석을 다 하시다니 요.”
가까이 다가온 매그너스가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 우리 사이에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겠지요.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사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작님과 제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군요.”
“……동종 업계에 있으니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레이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 면 전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매그너스가 정말 놀랐다는 듯 양손 을 과장되게 펼쳐 보였다. 나는 광 대 같은 그 움직임을 잠자코 구경했 다.
“도대체 그 귀한 아칼리 꽃을 어디 서 조달하신 건가 싶었는데. 설마 저런 조달책을 마련하셨을 줄이야.”
매그너스가 무도회장 출구로 흘낏 고갯짓을 했다. 방금 세드릭이 사라 진 곳이었다. 매그너스가 뜻하는 바 는 명백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조달책?”
그러자 매그너스가 어깨를 으쓱거 렸다.
“재주가 제법이시지 않습니까? 장 사를 위해서라면 옛 연인마저도 마
다하지 않고 붙잡을 정도의 열정이 라니.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 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매그너스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앞에 누가 서 있는지를 잊은 모양이었다.
지금 매그너스가 대거리하고 있는 상대는 윈스턴 백작 영애였다. 심지 어 그녀의 옛 연인은 황제도 한 수 접는다는 에반스 공작이었고.
어디서부터 지적해줘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 부분 먼저 입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신기하군요, 남작님. 제가 아칼리 꽃을 공급받지 못해 애로사항이 있 었다는 걸 남작님께서 어찌 아셨을 까요?”
“남작님과 저는 선의의 경쟁자다 보니, 제 약점이 남작님께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었는데 요.”
나는 정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떻게 남작님에게 그 비밀 이 새어나간 걸까요? 가게에 스파이 가 있나? 아니, 사용인 하나와 기사 하나가 전부인 가게에 그럴 일은 없 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네요.”
나는 매그너스를 향해 환히 웃어 주었다.
“남작님께서도 그 일에 관련되어 있으신가 보군요?”
“……글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
지 도통 모르겠군요.”
매그너스가 기계적으로 웃었다.
“공급처와 거래가 끊긴 건 전적으 로 사업주의 인망 문제입니다. 그걸 어찌 저와 관련지으시는지?”
“발뺌하실 것 없어요. 어차피 우리 말곤 아무도 듣지 못하니까요.”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흘깃거리긴 했지만, 대화가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 었다.
나는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남작님이 손을 쓰신 덕분에 잠깐 곤란했던 건 사실이랍니다. 제가 어 지간히도 두려우셨던 모양이에요.”
“무슨. 내가 레이디를? 하!”
“만약 제 가게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구멍가게였다면, 구태여 그 많 은 꽃집 사장들에게 협박하진 않으 셨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하, 이거, 망상이 심한 레이디 시군.”
계속 발뺌하시겠다?
뭐,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니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내 가 매그너스의 꿍꿍이를 파헤치는 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나는 매그너스에게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매그너스의 얼굴이 굳어 졌다.
“제가 눈엣가시인 건 이해해요, 남 작님.”
“무슨……-”
“하지만 경쟁은 정정당당히 해야 죠. 반칙을 허용한다면 저보단 남작 님이 더 곤란해지실 것 같은데요.”
이해하지 못한 듯 매그너스의 시선 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나는 친절 히 맥을 짚어 주었다.
“당신. 향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 크죠?”
매그너스가 버럭 소리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전 사업가입 니다.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제가 무턱대고 뛰어들 것 같습니까!”
나는 얼굴에 비웃음을 살짝 걸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매그너스는 분명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향수 사업에 뛰어들었을 것이 다.
내가 열심히 살롱, 무도회장을 다 니며 영업한 덕분에 향수에 대한 수 요를 알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문외한인 것 다 아니까 애쓰지 말 아요. 향수는 몰라도 향에 민감한 사람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 말을 하며 누군가의 얼굴이 뇌 리를 스쳤다. 마법의 향에 당한 줄
도 모르고 내내 나를 에스코트했던 사람의 얼굴이.
“당신같이 투박하고 멋없는 사람에 게 그런 자질이 있을 리 없죠. 제가 당신의 가게에 스파이를 심어서 향 수 배합이나 재료를 살짝 바꾼다고 해도 당신은 절대 알아채지 못할 거 예요.”
“가령 알코올 비율에 손을 대 향을 완전히 망쳐 놓더라도, 남작님께선 아무것도 모른 채 룰루랄라 손님에 게 향수를 판매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지,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내 사업장의 조향실엔 철통같은 보 안이 되어 있습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말이.”
긴장한 듯 매그너스의 얼굴이 하얗 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웃 음을 흘렸다.
“남작님처럼 향수에 문외한인 분을 골탕 먹일 방법은 그 외에도 무궁무 진하죠.”
“지금 절 겁박하시는 겁니까!”
“아뇨, 피차 억울한 일 없도록 정
정당당히 승부하자, 는 건전한 이야 기를 했을 뿐인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가엾은 꽃집 주 인들을 협박하지 말아요.”
“……도,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레이디시로군!”
매그너스는 여전히 오리발 내밀기 작전을 고수하려는 듯했다.
아니,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머리 가 굳어 다른 작전을 떠올릴 여유조
차 없겠지.
“그나저나, 일주일이 지난 것 같은 데……
매그너스의 가게에 처음 방문한 날, 나는 그의 가짜 향수〈첫사랑의 기억〉이 일주일이면 상할 거라고 장담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향수는 상했나요?”
“……이, 이익……!”
매그너스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 어쩌나. 정곡을 찔렸나 보네.
“이런.”
나는 한 손으로 가볍게 입을 막았다.
“제가 아픈 부분을 찔렀나보군요.
죄송해요. 조심 했어야 했는데.”
부채라도 있었으면 착 펴서 흔들어 줬을 텐데.
나는 내 얕은 준비성을 한탄했다. 시뻘겋게 붉어진 그의 얼굴에 부채 질을 못 해준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시는군요. 좋습니다. 그 입담만큼이나 실력도 따라주는 지 지켜보죠.”
매그너스가 이죽거리자, 나는 웃으 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입담만큼 실력도 출중하신지 호기 심이 들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