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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7화 (37/153)

〈37 화〉

“아무리 공작 전하라고는 하셔도 전설 속의 허브를 구하는 일이 쉽지 는 않을걸요. 어떻게 구하시려고 요?”

“글쎄요. 산이라도 타 보죠. 다프넬 산이던가요, 채취되는 곳이.”

“……또 절 놀리시는 거죠.”

“저 산 잘 탑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무도회에서 전하를 뵙게 될 줄이야.”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종종 세드릭 과 무도회에서 마주쳤었던 것 같다.

뭐지, 이 남자. 바쁜 척하면서 무 도회란 무도회는 다 참석하는 거 아 니야?

내 의심을 읽었는지 세드릭이 씩 웃었다.

“샤를로트의 부탁으로 참석했습니 다. 정확히는 거래죠.”

“샤를로트 양께서 전하께 참석을 부탁했다고요?”

나는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회장 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래까지 해가며 세드릭을 불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런 내 의문을 꿰뚫어 본 듯 세 드릭이 살짝 내게 고개를 숙여 속삭 였다.

“제가 참석했을 때의 부수 효과를

노린 거겠죠.”

……아.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 긴, 똑같은 무도회라 해도 공작이 참석한 연회와 그렇지 않은 연회는 격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그걸 본인 입으로 직접 이 야기하다니. 나는 기가 막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전하께선 대가로 뭘 받으셨는데 요?”

아무리 제노스 후작이 아끼는 막내 딸이라고는 하지만, 샤를로트가 에 반스 공작이 흡족해할만한 대가를 줄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세드릭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또 나왔다.

저 의뭉스러운 대답.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남자는 대답하기 싫을 땐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세드릭이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으음……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드릭과 함께라면 발 밟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너무 피곤했 다.

“사실 잠을 거의 못 잤거든요. 춤

을 출 체력이 아니라서요.”

“이런.”

세드릭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럼 와인이라도 한 잔 드시겠습 니까?”

갑자기?

나는 눈앞의 알코올 신봉자를 가늘 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술, 아직 안 끊으셨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굉장한 술고래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세드릭이 서글픈 듯 눈을 내리깔았 다. 물론 그 정도 연기는 내게 통하 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와인을 홀짝이고 계 셨으니 술고래 취급을 받으셔도 할 말 없으세요. 감히 공작 전하께 잔 소리를 하고 싶진 않지만, 세드릭 님. 자제 좀 하셔야 한다니까요.”

왜냐면.

나는 얕은 한숨과 함께 세드릭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완벽할 정도 로 단정했다. 하지만 나는 세드릭의 상태가 겉보기와 달리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세드릭을 향해 한 발짝 다가 간 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증상. 점점 더 심해지고 계시 죠?”

그러자 세드릭이 눈을 커다랗게 떴 다. 붉은 루비가 벌어지며 다채로운

빛을 담았다.

잠시 뒤 그가 미소를 걸쳤다. 방금 전까지 내비쳤던 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앞에는 언제나 여유로 운 세드릭 에반스가 서 있었다.

“그냥 그렇습니다. 좋아진 것도 나 빠진 것도 없죠.”

그럴 리가.

나는 속으로 세드릭의 말을 부정했 다.

광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 에 없었다. 그것이 세드릭의 숙명이

었다.

그가 오래전에 겪었던, ‘비극적인 사고’는 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 는 상처를 남겼고, 시간은 그 상처 에 독이 될 뿐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시면 다행이지만요. 아무튼, 알코올은 자제하셔야 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귓등으로도 안 듣겠단 소리군. 나 는 입을 비죽였다.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티 나게 기웃거렸다. 이런 자리엔 좀처럼 나 타나지 않는 에반스 공작과 말 한마 디라도 나눠보고 싶어 안달 난 사람 들임이 분명했다.

이쯤에서 슬슬 공작님을 양보해 볼 까.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디 가십니까?”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 세드릭이 먼저 나를 붙잡았다.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저쪽에 케이크가 맛있어 보 여서요.”

“굳이 가실 것 있습니까?”

세드릭이 제 뒤편의 시종을 부르더 니 케이크를 가지고 오게 했다.

곧 내 앞엔 작고 앙증맞은 케이크 한 조각이 놓였다.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미묘한 얼굴로 케이크를 먹었

다.

뭐지? 오늘따라 세드릭이 조금 이 상한데. 원래도 예즉 불가능한 사람 이긴 했지만, 오늘은 뭔가 더……오

나는 이 기묘한 느낌의 정체를 파 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곧 이상한 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언제부턴가 날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세드릭 에반스는 아리엘 윈스턴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꺼려했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도 허구 헌날 색향 같은 걸 들이미는 남자와 는 상종도 하기 싫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세드릭 에반스는 내 게 딱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 는 듯했다. 오히려 무도회장에서 서 슴없이 말을 걸어올 정도로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네.’

나는 새삼스레 그 사실을 깨닫곤 속으로 신기해 했다.

하긴. 색향을 들이밀며 귀찮게 굴

지만 않으면 세드릭이 아리엘을 굳 이 싫어할 이유는 없지.

여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리 엘은 세드릭의 하나뿐인 구원자였으 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세드릭이 내 상념을 깨웠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광증. 세드릭이 어릴 때부터 지니 고 있던 그 저주는, 무척이나 고통 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탓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는 혈관 이 갉아 먹히는 듯한 통증을 홀로 견디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환청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잘 테고.

광증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치 유제는 아닉시아 향뿐이었고, 그건 나만이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더 마음 이 쓰이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세드릭을 바 라보았다.

새삼스레 개복치 전담 의사로서의 의무감이 샘솟았다.

왜 그런 눈을 하십니까?”

미묘한 기운을 느꼈는지 세드릭이 경계 어린 눈빛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요.”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전하께 좀 더 잘해드려야겠다 는……, 아, 물론 지금도 최선을 다 하고는 있지만요. 앞으로도 완벽한 아닉시아 향을 제공해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세드릭이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내가 더 노력할게, 남주인공아.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에게 향수는 기호품에 불과하지 만, 당신에겐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 이나 마찬가지니까.

“갑자기 어떤 맥락에서 하시는 말 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드릭이 빙긋 웃었다.

“제게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시겠 다는 뜻이라면, 감사합니다. 그럼 그 런 의미에서……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빈 케이크 접시를 부드럽게 뺏어갔다.

나는 순식간에 빈손이 되어 눈을 끔벅였다.

“춤 한 곡.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 까?”

흐음. 나는 물끄러미 세드릭을 바 라보았다.

오늘따라 도대체 왜 이러실까.

두 번째 청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 다. 단 것을 섭취한 덕분인지 졸음 도 아까보다 가신 상태였고.

나는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러자, 세드릭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영광입니다.”

나는 그 눈웃음에 잠시 시선을 두 었다.

뭘까.

역시 오늘, 이 사람. 평소와는 뭔 가가 다른 것 같은데.

나는 그 기시감에 집중하는 대신, 세드릭이 내민 손 위로 손을 얹었 다.

쑤 쏘 쑤

달콤한 하프의 선율이 공기중을 부 유했다.

나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자연스 레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눈동자와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웃음기를 담았다.

“왜 웃으세요?”

내 속삭임에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

로 대답했다.

“오늘은 저를 별로 경계하지 않으 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내가 하 고 싶은 말인데.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전하야 말로 오늘따라 유독 기분 이 좋아 보이시는걸요.”

“그렇습니까?”

가벼운 턴 동작이 이어졌다.

나는 세드릭의 리드에 몸을 맡기고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나를 마주본 세드릭이 속삭였다.

“특별한 날이라 그런가 보군요.”

“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 카트린 의 축일은 제국의 기념일 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이 좋아하는 날이었다. 세드릭도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줄 은 몰랐지만.

“전하께서도 이런 기념일을 챙기시 나 봐요?”

그러자 세드릭이 이상야릇한 미소 를 지었다. 그리곤 나지막이 속삭였 다.

“경우에 따라.”

나는 세드릭의 미소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평소보다 확연히 짙고 매력 적인 그 미소를.

역시 오늘따라 세드릭이 어딘가 이 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떤 생각 하 나가 갑작스레 뇌리를 스쳤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도 잊고 세드릭을 멍 하니 마주보았다.

문득 내 몸을 휘감은 향기가 새삼 스레 의식되었다. 동시에 아주 기묘 한 의심이 샘솟았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하는 의심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 다.

향수에 들어 있는 묘약이 혹시 엉

뚱한 사람을 꼬여낸 것은 아닐까, 하는.

‘……에이.’

나는 허무맹랑한 의심을 머릿속에 서 지워내려 애썼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나를 부드럽게 맞잡고 있는 세드릭의 손이,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지금 내게 와닿는 세드릭의 모든 것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 묘약은 분명 원래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어야 효과를 발휘하는데.’

세드릭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 었던가?

나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래. 나에 대한 혐오를 벗어 던졌으니 호 감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그리 이상 할 것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구명줄이나 다름 없는 아닉시아 향의 유일한 제작자 니까.

그래, 좋아. 남주인공에게 호감을 샀다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었

다.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이거 낭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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