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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6화 (36/153)

〈36 화〉

요 며칠간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한 적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거울 속의 나는 그렇게 못 봐줄 꼴은 아니었 다.

‘다크서클이 좀 내려와 있긴 하지 만…… 이 정도야, 뭐.’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커피를 마신 뒤에 빠르게 목욕을 하고, 리나가 미리 윈스턴저에서 조 달해준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윈스 턴 저와 달리 치장을 도와줄 사람이 리나밖에 없는 바람에 시간이 좀 걸 렸다.

보석은 눈동자 색깔과 비슷한 페리 도트로 맞춰서 걸쳤다. 귀걸이, 목걸 이를 걸친 뒤 보석 머리핀까지 꽂은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음. 괜찮네.’

역시 옷이 날개라고, 한껏 꾸며 놓

으니 밤새고 온 레이디처럼은 보이 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쪽쪽 빨며 향수 선반 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향수병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오늘은 뭘 뿌릴까.’

매일 하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오늘 역시 같은 결론을 내 릴 것 같긴 했다. 진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는 항상 한 향수만 뿌리곤 했으니까.

세드릭이 배합법을 알아맞혀 날 깜

짝 놀라게 했던 그 향수.

그래도 향수를 고민하는 일은 늘 즐거웠다. 설령 항상 결론이 같다고 해도 말이지.

“오늘은 어떤 걸로 할까, 리나?”

“ 0 ”

“10’ -

리나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그 런 반응은 처음 보는 것이라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뿌려야 할까요? 지금 아가 씨의 몸엔 잔향이 아직 남아 있는

걸요.”

“……어? 진짜? 목욕을 했는데 도?”

“네, 밀폐된 공간 안에서 며칠 동 안 계셨으니까요. 금방 빠지진 않을 것 같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나의 말이 맞았다. 나는 요 며칠 향수를 배합하느라〈레엘리우스〉향 에 노출된 상태였다. 향 입자가 몸 에 잔뜩 묻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목욕을 해서 괜찮을 줄 알았

는데, 아직 잔향이 많이 남아 있다 니……오 다른 향수를 뿌렸다간 되려 이상한 냄새가 나겠어.’

어쩔 수 없지-

나는 결국 향수 고르기를 포기했 다. 외출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향수는 포기해야겠다.”

“헤헤,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 아가 씨 몸에서 나는 향도 너무 좋은걸 요!”

그런가? 나는 뺨을 긁적였다. 사실 나는 리나의 칭찬이 잘 와닿지 않았 다. 향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

아래층에서 에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차창 밖의 풍경이 휙휙 넘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았다. 시야 가 조금 흐릿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조금씩밖에 자지 못했으니까.

‘이런 정신으로 과연 춤을 출 수 있을까……/

심지어 나는 춤 실력이 좋지도 않 았다.

이런, 그제야 살짝 걱정이 되었다.

저번 무도회에서야 공작 전하의 능 수능란한 리드로 그럭저럭 볼만한 춤을 췄다지만, 오늘 파트너가 세드 릭만큼 능숙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파트너 발을 밟는 거 아냐?’

샤를로트의 무도회에서 그런 추태 를 보이고 싶진 않은데…… 하아. 춤 연습 좀 해 놓을걸. 하긴 그럴 시간이 없었지.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마차는 벌써 제노스 후작의 저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아리엘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샤 를로트 아가씨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택에 들어서자 제노스 가의 집사 가 정중히 나를 맞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연 인의 수호자라는 성 카트린의 축일 답게, 저택 곳곳이 사랑스러운 장식 으로 가득했다.

역시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샤 를로트의 무도회다웠다.

“아리엘 양!”

나를 발견한 샤를로트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 곁에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샤를로트에게로 다가갔 다.

“참석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따라 더 아름다우신 것…… 같

샤를로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리엘 양? 새 향수인가요?”

“아, 네. 오늘 막 완성했어요.”

“세상에……, 향기가 너무 좋아요.”

그러자 주변인들도 한 마디씩을 보 탰다.

“정말요, 영애.”

“홀릴 것 같아요.”

“판매하시는 향수인가요? 꼭 한 병 구매하고 싶은데요.”

사람들이 내 주위로 둥글게 몰려들 었다.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하지만, 이 향수는 판매할 계 획은 없답니다.”

“어머, 너무 아쉬워요.”

“판매하시게 되면 꼭 제게도 알려 주셔야 해요!”

평소에도 새로운 향을 개시할 때면 반응이 뜨겁긴 했지만…… 오늘은 유별났다.

역시 좋은 재료는 돈값을 하는 건 가.

판매하지 않는다는 말에 샤를로트 마저도 아쉬운 표정을 지어 안타까

웠다. 마음 같아선 샤를로트에게만 이라도 한 병 쥐여주고 싶었지만 어 쩔 수 없었다.

한창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리엘 님! 저예요!”

클레어 에반스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셨군요.”

클레어와는 조금 아까 연락을 나눈

상태였다. 샤를로트의 무도회에서 만나 향수를 건네주기로.

나는 인적이 드문 테라스로 클레어 를 데리고 갔다. 클레어가 눈을 반 짝거 렸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께서 뿌리신 향수가 혹시……?”

“네. 손님께 드릴 향수예요. 배합하 는 동안 제게도 향이 배어 버렸네 요.”

“세상에! 향이 너무너무 좋아요!”

클레어가 감동한 얼굴로 외쳤다.

나는 쓰게 웃었다.

“손님, 완성하기는 했지만, 대금은 받지 않을게요.”

“네?”

클레어가 멍한 눈을 했다. 나는 빠 르지 않게, 클레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이 향수엔 마탑에서 구매한 묘약 이 들어가요. 주변 사람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네?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하지만 그 묘약엔 조건이 있어요. 상대가 예전부터 복용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아.”

“그리고 그 호감이 클수록 효과는 더 커져요.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라 면 효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이 향수도 마찬가지예요.”

클레어가 불안한 듯 눈을 깜빡거렸 다. 나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식께서 손님께 예전부터 호 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향수를

뿌린다고 해도 효과는 없을 거예 요.”

물론 친구로서의 애정이 아닌, 연 인으로서 의 애정 이 어야겠지 .

만약 케넨이라는 영식이 클레어에 게 느끼는 감정이 오직 우정뿐이라 면, 이 향수는 그 우정을 더 짙게 만드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뭐, 그것도 나름대로 바람직한 일 이긴 하겠지만…… 클레어가 원하는 결과는 아니겠지.

나는 클레어가 실망하리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녀는 설핏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납득했어요.”

“괜찮으신가요? 사람에 따라서 효 과가 아예 없을 수도 있어요.”

“네, 괜찮아요. 애초에 향수로 사람 의 마음을 얻어보려는 생각 자체가 오만했던 거니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만약 효과가 있다 해도, 일주일 동 안만 지속될 뿐이지만.

심지어 그 일주일간도 대단한 효과 를 기대할 순 없었다. 이 향수는 그

저 상대방의 가슴을 좀 더 두근거리 게 만드는, 그 정도의 효과밖에 없 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정말 감사 해요.”

클레어가 향수를 받아들곤 연신 감 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회의적이었다. 과연 클레어가 감사해할 일인지.

상대가 클레어에게 호감이 없다면, 저 향수는 그저 좋은 향기가 나는 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대금을 받지 않았으니 여기 부턴 내 관할이 아니었다. 나는 살 짝 마주 웃고는 클레어를 뒤로 하고 테라스를 나섰다.

무도회장은 어느새 달콤한 선율로 가득했다. 그새 왈츠가 시작된 모양 이었다.

‘역시 이번엔 춤은 건너뛸까.’

피곤하기도 하고, 상대방 발을 밟 지 않을 자신도 없고.

역시 이번엔 음료나 마시면서 샤를 로트와 수다나 떨다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내게 몇 영식들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정중히 웃으며 그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피곤하네. 와인이라도 마실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다란 그림 자가 또 하나 내 위로 드리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절하기 위해 입 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피곤해 서……/

“못 찾을 뻔했잖습니까, 레이디.”

아.

나는 호흡을 멈췄다.

“냄새가 달라져서.”

하아.

나는 미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목소리뿐이었지만, 내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리 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뒤를 돌 아보았다.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니까요.”

그러자 세드릭이 비스듬히 입꼬리 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냄새’와 ‘향기’의 어감 차이도 모 르는 남자가 짓기에는 지나치게 매 력적인 미소였다.

“죄송합니다. 정정하죠.”

세드릭이 살짝 내게로 고개를 기울

였다. 그리곤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 다.

“생소한 향기라, 샤를로트에게 듣 지 않았다면 레이디가 떠나신 줄 알 았을 겁니다.”

향기로 내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봤 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 사실 엄청난 개코인 거 아냐?

나는 조금 단어를 순화해서 물었 다.

“후각이 무척 뛰어나신가 봐요.”

“뭐. 남들보다 좋은 편이긴 합니다. 그나저나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웬 심경의 변화요?”

“그렇게들 말하던데요. 향수가 바 뀌면 그 사람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거라고.”

세드릭이 나를 들여다보며 빙긋 웃 었다. 언뜻 짓궂게까지 느껴지는 미 소였다.

“어떤 변화였습니까?”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시고 계신 건 진 모르겠지만, 전하. 제 마음은 맑 은 날 바다처럼 잔잔하답니다. 이 향은 의뢰 때문에 새로 개발한 향수 의 향이에요.”

“그렇습니까.”

세드릭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개인 의뢰도 받으시는 줄은 몰랐 습니다.”

“안 받아요. 그런데 이 손님은 워 낙 간절하셨던 데다가…… 무척이나 희귀한 재료를 조달해주셔서요.”

“어떤 재료입니까?”

글쎄, 말한다고 이 남자가 알려나.

하긴. 약초학에 지식이 있다고 했 었지. 나는 허브의 이름을 읊어주었 다.

“레엘리우스라는 허브였어요.”

“아하, 그렇군요. 사용해 보니 마음

에 드셨습니까?”

“네. 최고던데요.”

나는 약간 서글픈 눈을 했다.

레엘리우스 향은 정말 매력적이었 다. 좀처럼 구하기 힘든 재료라는 게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흐음. 레엘리우스라. 조만간 구해 다 드려야겠군요.”

그의 허풍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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