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화〉
이건.”
나는 굳은 얼굴로 상자를 바라보았 다.
그 안엔 짙은 분홍빛의 꽃잎이 수 북이 쌓여 있었다.
“다프넬 산에서 아주 아주 드물게 채취되는 허브예요. 아리엘 님께서
도 물론 알고 계시겠죠?〈레엘리우 스〉. 유피넬 신이 첫눈에 반한 목동 과 사랑을 나눌 때 태워서 향초로 이용했다는 전설의 허브요.”
신화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허브의 효능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아리엘의 레시피 수첩에 밥 먹듯이 적혀 있던 허브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레시피를 테 스트하지 못했다. 레시피의 가장 중 요한 재료인〈레엘리우스〉허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 허브를 구해보려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번번이 공급
처를 찾지 못했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나요?”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들른 상 단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얻었어요. 부탁드려요, 아리엘 님. 실패해도 좋 아요. 시도만이라도 해주세요!”
손님이 또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 다보았다.
“제 이름은 클레어 에반스키예요. 그 사람의 마음을 한 조각이라도 얻 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요! 보수
는 십만 비스 드릴게요!”
나는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쐐기를 박기 위해서인지, 클레어는 이어서 자신의 사정을 자세히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식어가는 차를 홀짝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 었다.
클레어의 사연은 이랬다.
그녀는 에반스키 백작의 고명딸이 었다. 백작가를 이을 후계자로 고이
자란 그녀는, 나이가 차자마자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또래의 눈부신 미소년, 케넨 아르젠 남작 영식을 만나게 된다.
클레어는 케넨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빠르게 친해진다. 하지만 클레 어의 마음을 눈치챈 에반스키 백작 은 딸과 케넨을 억지로 떼어놓는다. 케넨의 가문이 한미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에반스키 백작의 방해 공작 에도 불구하고 둘은 계속해서 우정 을 쌓는다.
뭐, 클레어의 입장에선 짝사랑이었 지만.
그렇게 십 년째 우정을 쌓아가던 중, 클레어는 본격적인 후계 수업을 위해 에반스키 영지로 호출을 받게 된다.
그녀는 후계 수업이 끝나는 대로 에반스키 백작이 되어, 아마 죽는 날까지 영지를 다스리며 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처음 클레어의 소원은 단순했다. 떠나기 전 케넨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
하지만 오랜 짝사랑은 소망을 자꾸 만 부풀렸다. 결국, 클레어는 단 며 칠만이라도 케넨 아르젠의 사랑을 얻길 바라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그 향수는 효능이 길어야 일주일 밖에 가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로도 괜찮아요. 전 그걸로 만족 할 수 있어요!”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깊은 한숨 을 내쉬었다.
‘마법적인 힘으로 얻은 사랑이 과 연 의미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더없이 간절해 보 였다.
내 잣대로 의미가 있다, 없다 판단 할 수 없을 만큼.
“이 허브, 저도 명성만 들었을 뿐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배합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괜찮아요. 시도만이라도 부탁드려 요. 실패한다면 저도 깨끗이 포기할 게요.”
나는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레엘리우스에 조금이라도 위
험한 성분이 있었다면 단칼에 거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엘리우스는 사람을 매혹 시키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마약 성 분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좋아요. 시도해 볼게요.”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의 사정이 안타까웠기 때문 이었다. 게다가 실패하더라도 그 나 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시도만으로도 그녀의 아쉬움이 어느 정도 해소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이번 의뢰를 받아들이 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 제일 컸다.
‘왜냐면…… 향이 너무 좋은걸.’
레엘리우스의 향은 깜짝 놀랄 정도 로 매혹적이었다.
웬만한 꽃과 허브의 향은 모두 맡 아 보았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처 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어쩌면 이 허브가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은, 향 자체의 효과 때문이 아 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클레어 양.”
나는 레엘리우스가 든 상자를 끌어 당기며 말했다. 클레어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래, 뭐.
마법도 존재하는 세계인데, 사랑에 빠지는 향수가 없으리란 법 있어?
“억지 부려서 죄송해요. 설령 실패 하더라도 사례는 반드시 하겠어요!”
“알겠어요. 일주일…… 아니. 보름 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클레어가 꾸벅 인사한 뒤 가게를 나섰다.
혼자가 된 나는 레엘리우스가 든 상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좋아, 해 보자.’
상대를 사랑에 빠지는 만드는 마법 의 향수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 지만, 적어도 미치도록 매혹적인 향 수는 만들 수 있겠지.
그 날 이후, 나는 잠도 줄여가며 연구에 매진했다.
먼저 도서관에 들러 희귀본을 살폈 다.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향수는 대개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되어 서, 조합법이 도서관에 고이 보관되 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간신히 그럭저럭 그럴듯해 보이는 조합법 몇 개를 얻어낼 수 있었다.
마탑에도 들렀다. 사랑의 묘약이 있냐고 묻자, 접수대의 마법사는 나 를 철없는 어린애 보듯 쳐다보았다.
그리곤 사랑까진 모르겠지만 일시 적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묘약은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걸 다섯 병 구매했다.
그 뒤부터는 오로지 연구뿐이었다. 이 레시피를 구상해보고, 저 레시피 를 구상해보고. 이렇게 배합해 보고 저렇게 배합해 보고. 하도 냄새를 맡았더니 코끝이 좀 얼얼해질 정도
였다.
“으아아.”
나는 조향실 의자에 늘어져 신음을 뱉었다.
손님 접객도 거의 하지 못하고 이 조향실에만 틀어박힌 지도 벌써 닷 새째 였다.
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좀 쉬었다 하세요. 그러다 건강 나빠지시겠어요!”
“아냐, 괜찮아.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아흐렛날, 나는 막 만들어진 향수 를 내려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 끄으으으……
죽도록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는 방금 배합을 마친 플라스크를 들여다보았다. 연한 분홍빛의 액체 가 황금빛 기포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플라스크 위로 몸을 가까이했 다. 숨을 약간 들이마시자,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향기가 곧장 온몸을 휘감았다.
생화처럼 향긋하면서도, 벌꿀처럼 달콤한.
구름 위에 오른 듯 포근하면서도, 심장을 쿵쿵 부추겨 사람을 들뜨게 하는 냄새.
한 자락만 공기 중에 섞여도 지나 치는 모든 이들을 홀려내 끌어당길 향기.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레엘 리우스를 이용한 최상의 배합법이라 는 걸.
“아가씨! 혹시 완성하신 건가요?”
내 기지개 소리를 들은 건지 리나 가 문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완성했어!”
“와아, 저 들어갈게요!”
리나가 조향실 문을 열고 들어왔 다. 나는 마저 기지개를 켜며 맘껏 근육을 풀었다.
그런데 리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리나?”
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 고리를 쥔 자세 그대로 멍하니 나를 쳐다볼 뿐.
“리나? 괜찮아?”
“아, 아가씨……『
리나가 그제야 입을 떼었다. 그녀 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향기인가요……?”
“응? 아, 향이 아직 남아 있겠구 나. 방금 완성한 향수야.”
“이건…… 이건…… 이 향은…… 아가씨, 이건 예술이에요……!”
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풋 웃었다. 역시 리나는 비행 기 태우기의 장인이었다.
“항상 좋은 말만 해줘서 고마워, 리나.”
“아뇨! 그냥 듣기 좋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요!”
리나가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억 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몸짓이었다.
“진짜 예술이에요! 누구라도 제 말 에 동의할걸요!”
리나의 두 눈에 진심이 가득했다.
나는 뿌듯해져서 배시시 미소를 지 었다.
“꽤 괜찮지? 재료가 워낙 좋아서 그런가 봐.”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아 이, 참!”
리나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 리곤 당장 이 향수를 들고 거리를 동네방네 행진하며 자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하하. 칭찬 정말 고마워, 리나. 하지만 동네방네 자랑할 순 없어.”
이건 의뢰인만을 위한 작품이니까.
첫 개시를 하는 건 당연히 의뢰인 이 되어야 했다.
리나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너무 아쉬워요. 이 향을 의뢰인만 맡으실 수 있다니. 많은 분들께 널 리 널리 팔 수만 있다면 우리 아가 씨, 금방 부자 되실 텐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운 말이지만, 그건 안 될 거 야. 리나도 알겠지만 재료가 워낙 희귀하거든.”
“레엘리우스를 말씀하시는 거죠? 하긴, 저도 소문을 듣기는 했어요.
약초꾼들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캐 내면 횡재했다며 잔치를 벌인다 고……, 과연 그럴 만한 허브네요.”
“그렇지? 나도 아쉬워. 이런 걸 자 주 다룰 수 없다니.”
나는 연분홍빛 액체가 든 플라스크 를 쓰다듬었다. 원래도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연구하느라 좀 쓴 덕에 완성품은 정말 양이 많지 않았 다. 기껏해야 의뢰인에게 줄 한 병 정도나 나올까?
“아무튼 결과물이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야. 리나, 손님에게 연락 넣어
줄래? 완성됐다고.”
“네, 아가씨! 아, 참. 오늘 일정 잊 지 않으셨죠?”
“오늘 일정?”
“무도회요!”
리나가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곳 엔 내가 닷새 전 올려놓았던 황금빛 카드 한 장이 있었다.
“……아, 참. 맞아. 그랬지.”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성 카트린의 축일을 맞아 샤를로트 가 주최하는 무도회. 그 초대장을 샤를로트에게 직접 받은 게 닷새 전 이었다.
한창 바쁠 때긴 했지만, 샤를로트 가 직접 주최하는 무도회니만큼 참 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행 사는 원래 머릿수가 중요한 거잖아.
“괜찮으신가요? 아가씨? 참석하실 수 있겠어요?”
“응, 괜찮아. 괜찮아. 어디 보자, 슬슬 준비해야겠네…… 커피 한 잔 만 끓여 줄래?”
“네!”
리나가 커피를 끓이러 간 동안 나 는 거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