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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4화 (34/153)

〈34화〉

“지금은 됐어요. 하지만, 다음에 같 은 일이 생기면 그땐 꼭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해요.”

그러자 세드릭이 기묘한 표정을 지 었다.

곧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께서 물어보게 될 일이 없 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약간 핀트가 빗나간 대답 같 기도 하고?

괜한 생각이겠지. 나는 세드릭을 믿어 보기로 했다. 비록 이번엔 대 답을 듣지 못했지만, 다음번엔 꼭 제대로 대답을 들어야지.

나는 차 대신 물을 홀짝이며 세드 릭에게 물었다.

“요즘 예전보다 아닉시아 향을 덜 재촉하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신 거

예요?”

세드릭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아 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가까이 앉아 있는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살만합니다.”

“흐음, 그래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바로, 세드릭의 광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 어들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닉시아 향에 내성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힘드시면 참지 않으셔도 돼요.”

“……참지 않아도 된다, 라.”

세드릭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게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지 마세요. 필요할 땐 사용 하셔야죠.”

그러자 세드릭이 눈길을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결국 나는 정적을 참지 못하고 내 뺨을 매만졌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세상에. 나는 그 박력에 화들짝 늘 라고 말았다.

‘미각이 조금 특이한가?’

순식간에 찻잔을 비운 세드릭이 말 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폐를 끼쳤군요.”

“괜찮아요. 돌아가실 마차는 있으 신가요?”

“없다고 하면, 데려다주실 겁니 까?”

“ 네?”

세드릭이 픽 웃었다.

“농담입니다. 마차는 준비되어 있 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에, 다행이네요.”

나는 가게 밖까지 나가 세드릭을 배웅했다.

세드릭을 태운 마차가 밤거리를 질 주해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쏘 쏘 4(

그로부터 몇 시간 전, 아직 땅거미 가 지지 않은 이른 저녁.

세드릭 에반스는 옆구리를 부여잡 았다. 피 한 줄기가 배어 나와 손바 닥을 적셨다.

세드릭은 헛웃음을 지었다. 피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역시 요즘 자신은 어딘가 얼빠져 있는 것이 분 명했다.

“히, 히익.”

복면을 쓴 남자 다섯이 뒷걸음질을 쳤다. 세드릭은 피 묻은 손바닥을

대충 셔츠에 닦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히, 히이이……?

“소속을 털어놓는다든가. 그럼 비 교적 평화롭게 보내줄지도 모르지.”

“제, 제기랄……-”

“뭐, 물을 것도 없이 5황자 쪽 쥐 새끼들이겠지만.”

아제 키 안이 라는 이 름이 세 드릭의 입에서 나오자, 복면인들의 몸이 움 찔 굳었다. 그중 한 남자가 제 동료 들에게 외쳤다.

“정보가 틀리잖아! 세드릭 에반스 는 분명 공작저로 돌아갔다고 보고 받았……!”

복면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흩뿌려지는 피를 피하며 세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그럴 리가. 네놈들이 오늘의 거사 를 위해 한 달이나 개고생했다는 걸 설마 내가 몰랐을까.”

“어, 어떻게 알고 있었……!”

또 한 번 피가 풀밭을 적셨다. 복 면인 중 하나가 풀썩 주저앉아 외쳤 다.

“괴, 괴, 괴물……/’

“마지막 생존자가 됐는데, 쓸만한 정보를 뱉어 볼 생각은 없나?”

“다, 닥쳐! 역시 사람들의 말이 맞 았어. 넌 살아남아선 안 됐던 괴 말”

마지막 복면인 역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세드릭은 엉망이 된 후원을 둘러보

며 혀를 찼다. 아리엘이 신경 써서 가꿨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곱 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던 후 원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세드릭은 피로 지저분해진 허브 앞 에 꿇어앉아 고심했다.

“……뽑을까.”

아니. 역시 뽑는 건 좀 그렇지.

닦으면 닦이려나.

다행히 세드릭의 걱정과 달리, 대 기 중이던 하인들은 피가 낭자한 풀 밭을 금세 원 상태로 복구시켰다.

세드릭은 깨끗해진 후원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은 큰 소득이 있는 날이었다. 아리엘을 미행하던 쥐새끼들을 한 번에 몰아 처리했으니까. 이걸로 경 고는 충분히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경계를 늦출 수 없지만.’

세드릭은 에른에게 아리엘의 호위 를 더 강화하라 명령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물론 아리엘 몰래.

그녀에게 쓸데없는 불안을 안겨주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게 아리엘을 속이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결과니 까.

세드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몸에 별로 힘이 들어가지 않 았다. 요즈음은 몸 상태가 들쑥날쑥 했다.

하아.”

몇 걸음 걷다 말고 세드릭은 가쁜 호흡을 뱉었다.

홀로 광증을 이겨내 보겠다는 결심 을 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그 는 품속에서 향수병을 꺼냈다.

그리곤 제대로 향을 맡기 위해 계 단참에 걸터앉았다.

향을 맡자 그제야 짙은 안도감이 밀려 들어왔다.

“후……

푹 고개 숙인 세드릭이 짙게 한숨 을 내쉬었다.

역시 아직은 끊어낼 수 없었다.

향도. 그녀도.

그렇다면, 자신은 언제쯤 그 둘에 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세드릭은 검에 기댄 채 느릿느릿 눈을 감았 다.

등진 향수 가게로부터 아리엘의 향 기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가게 문을 나서려던 나는 순간 멈 칫 굳었다.

어제 계단을 차지하고 있었던 인테 리어 소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제는 뭐였던 건지.’

멀쩡한 얼굴로 기행을 일삼았던 어 제의 세드릭 에반스의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 배합법을 바꾼 게 안 좋은 효과를 냈나?’

아닉시아 향에 피로 회복 효과가 있는 허브를 약간 더 첨가하긴 했 다.

설마 그게 어제 기행의 원인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딸랑-은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아리엘의……

“아리엘 님, 맞으시죠?”

가게에 들어온 건 한 여성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귀족 여 성.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 나 는 조금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아리엘 윈스턴입니다

만……:’

“의뢰가 있어요!”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이 간절히 두 손을 모았다.

“꼭 갖고 싶은 향수가 있어요. 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아니, 만들어 주셔야 해요!”

“일단 진정하세요. 아직 개인 의뢰 는 받고 있지 않지만……

“제발요!”

“네, 이렇게까지 부탁하시니 이야 기는 들어 볼게요. 무슨 향수를 원 하시나요?”

손님에게 말했듯이, 난 아직 개인 의뢰를 받을 계획이 없었다.

당분간은 가게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메뉴를 더 늘리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간절해 보이니 한번쯤은 무리를 해도 괜찮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를 엄청 좋아하시는 손님인가

봐.’

향수에 관심이 많은 손님을 보니 흐뭇하기도 했고.

그때 손님이 내게로 몸을 가까이 당겼다. 손님이 촉촉이 젖은 눈으로 외쳤다.

“아리엘 님, 부탁드려요. 사랑에 빠 지는 향수를 만들어 주세요!”

“……네?”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손님이 두 손을 더 꼭 모았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리엘 님께선 가능하시잖아요!”

“……잠깐. 잠시만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사랑에 빠지는 향수라니. 그런 향 수는 취급하지 않아요, 손님.”

“아리엘 님께선 만드실 수 있잖아 요! 이야길 전부 듣고 왔어요. 제발 제 의뢰를 받아주세요!”

하아.”

나는 일단 손님을 진정시키기로 했 다.

“일단 좀 진정하실 필요가 있어 보 여요, 손님. 차라도 한 잔 드시겠어 요?”

“네, 감사합니다……!”

리나가 빠르게 차를 내왔다. 나는 손님과 함께 티 테이블에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단도직입 적으로 말했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으신 건진 모르겠지만, 저는 조향사지 마법사 가 아니에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 는 향수 같은 건 만들 줄 모릅니 다.”

“아리엘 님…… 부탁이에요. 아리 엘 님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절대 소 문내지 않을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손님은 내 말을 들을 기색이 전혀 없어 보 였다.

“제가 원하는 향수를 만들 수 있다 고 확신하시는 근거가 대체 뭔가 요?”

“루나 헤일린 양과 에일린 모나드 양이 속닥거리는 걸 들었어요.”

“루나와 에일린이라니…… 아.”

나는 침음을 뱉었다.

어제 개업 파티에서 소녀들에게 쥐 여주었던 향수가 떠올랐다. ‘첫사랑 이 이루어지는 향수’라고 약간의 허 풍을 섞었었지.

설마 그 말만 듣고 이러는 걸까?

“루나와 에일린에게 첫사랑이 이루 어진다고 했던 건 그냥 덕담 같은 거였어요. 그 향수에 첫사랑이 이루 어진다는 미신이 있는 꽃을 첨가했 거든요. 그 얘길 듣고 절 찾아오신 거라면 안타깝게도 전 도움을 드리 지 못할 것 같네요. 미신은 미신일 뿐이니까요.”

“아뇨, 아니에요. 아리엘 님은 가능 하시잖아요.”

손님이 찻잔을 꼭 쥐고 나를 올려 다보았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 다. 도대체 뭘 보고 이렇게까지 확 신하는 거지?

“왜냐면, 아리엘 님께서 에반스 공 작 전하와 만나실 때……/

거기까지 말한 손님이 목소리를 잔 뜩 낮췄다.

“만들어내셨다고 들었어요. 사랑에 빠지는 향수를.”

아. 그것 때문이었나.

그래. 확실히 ‘아리엘 윈스턴’은 그

런 향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내 레시피 수첩엔 아직 그 향수의 조합 법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향수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아리엘의 향수는 실패였다. 그녀가 끝끝내 세드릭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헛소문을 들으신 거예요. 설령 제 가 그 향수를 만들어냈다 치더라도,

성공했다면 공작님과 제가 헤어지지 않았겠죠.”

“저, 소문을 들었어요! 에반스 공 작 전하와 아리엘 님, 요즘 전보다 가까워지셨다면서요! 그럼 향수에 효과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네?”

아닌데요. 완전 헛다리 짚으셨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완벽한 헛소문이에요. 저와 공작님은 손님께서 기대하시는 사이 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손님, 죄송해요. 아무리 부탁하셔 도 제 대답은 똑같아요. 사람의 마 음을 조종하는 향수 같은 건 제 능 력 밖이랍니다.”

“아리엘 님! 그러지 마시고, 이걸 한 번만 봐주세요.”

손님이 그렇게 말하며 제 파우치를 열었다. 그 안엔 밀봉된 상자 같은 것이 있었다.

손님이 상자를 개봉하자, 순간 머 리가 아찔해질 만큼의 짙은 향기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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