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 쑤 쑤
다시 가게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 리나.”
“네, 아가씨?”
“요즘 나 때문에 저택에서 따돌림 을 당하진 않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나가 부자연스럽게 눈을 깜빡거 렸다.
나는 쓰게 웃었다.
“요새 계속 나하고만 다녔잖아.”
“제가 아가씨의 직속 하녀인데 당 연하죠.”
“아버지도, 집사도 날 못마땅하게 여기니까 요즘 다른 하인들도 날 곱 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거 알아. 이런 상황에서 널 가만히 둘 것 같 지 않아서.”
“무,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백 작님이랑 집사님이 왜 아가씨를 못 마땅하게 여겨요?”
“애써 아닌 척 안 해도 돼. 한 번 만 더 혼담을 거절했다간 아예 내 머리털을 밀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인걸.”
“그럴 리가요! 아무리 백작님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짓을!”
리나가 주먹을 꼭 쥐고 분노했다. 하지만 백작이 그럴 리가 없다는 말 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하고 있는 거야, 따돌
??”
“아뇨, 딱히……『
나는 지그시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리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가씨 간식을 가지러 가면 일부 러 안 비켜준다든가, 옷에 낙서를 한다든가, 그 정도 사소한 일은 가 끔, 엄청 가끔 있긴 하지만……/
역시……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그따위 집구석. 나와버릴까.”
“네?”
“아무것도 아냐. 미안해, 리나. 그 런 수모를 겪게 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왜 아가씨 께서 미안해하실 일이세요!”
리나가 홰홰 손사래를 쳤다.
“아가씨께선 잘못하신 것 하나도 없잖아요? 백작님이 아가씨를 무슨 물건처럼,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고 화내시는 게 잘못된 거죠. 하지
만 아가씨는 매번 꿋꿋하시잖아요! 전 그런 아가씨가 자랑스러운걸요!”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고마워. 오늘은 휴게실에서 자야 해서 좀 불편할 텐데 괜찮겠 어?”
“물론이죠! 아가씨, 이불도 제가 새로 다시 깔아드릴게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3번 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에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에서 내렸다. 어느새 달이 밤하늘 높이 떠올라 희뿌연 빛을 뿌리고 있 었다.
“이런 시간에 오는 건 처음이네, 이 거리.”
“그러게요. 밤에도 무척 운치 있네 요.”
쇼핑의 명소로 이름난 세논 지구는 제도의 다른 구역에 비해서도 고풍 스럽게 꾸며진 편이었다. 가로등 불 빛마저도 예쁜 금빛으로 거리를 아 늑하게 비췄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내 가게를 발견하곤 미소를 지었다.
‘누가 고른 가겐지. 예쁘기도 하 네.’
이 고풍스러운 거리에 내 가게는 아주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다.
‘벽돌색은 다시 봐도 마음에 드네.’
연한 베이지색의 벽돌은, 그 위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정면도, 그 사이를 장 식한 문도 마음에 쏙 들었다. 대체 누구네 가겐지. 하나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네.
문 위쪽에 달린 일레인 산 은종도 가로등 빛을 아름답게 반사했고, 그 아래편에 양각된 문양도 아름다웠 다. 그리고 또 그 아래에 매달 린……,
응?
“어?”
나는 눈을 끔뻑였다.
문 아래쪽에, 내가 고른 적 없는 인테리어 소품이 하나 추가되어 있 었다.
“히익! 아가씨! 저게 뭐죠?”
리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그림자가 계단 위에 얹혀 있 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그 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위험해요! 치안대에 신고 부터……!”
“아냐. 잠깐, 리나.”
저 그림자, 묘하게 눈에 익은데.
나는 조심스레 그림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른도 나를 막지 않았다.
검은 인영 앞까지 다가간 나는, 손 가락을 들어 인영의 어깨를 톡톡 두 드렸다.
“저기요.”
인영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두드리는 손가락에 더 힘을 줬다.
“저기요. 세드릭 에반스 씨.”
그제야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 다.
잘 세공된 루비 같은 눈동자가, 어 둠 속에서 조명을 켠 듯 붉은빛을 드러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기막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
죠, 공작 전하?”
“이리엘?”
“네. 저예요. 전하께서 앉아 계시는 가게의 주인.”
세드릭이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이 영문 모를 불청객을 어처 구니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닥에 짚은 검에 기댄 채, 세드릭 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느릿느 릿 입술을 뗐다.
“역시 좋은 가게군요. 계단도 편하 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일단 일어나세요. 제 손 잡 아요.”
나는 세드릭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세드릭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전하?”
“……잠시만 이대로 있어도 되겠습 니까.”
“네?”
“긴 하루였어서.”
공작 전하께서 긴 하루를 보낸 것 과 내 손을 잡는 것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세드릭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내 손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멍하니 세드릭의 까만 뒤통수 를 내려다보았다. 기가 막히기는 했 으나, 어째서일까. 나는 잠시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세드릭에게 손을 빌 려주었다.
전하.”
주무시는 거 아니죠?”
그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잡니다.”
휴, 난 또.
나는 손을 빼는 대신 세드릭의 앞 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계단참에 앉아 있는 그와 얼추 눈높이가 맞았 다.
“열이 나는지 확인해봐도 돼요?”
세드릭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이마로 손바닥 을 가져다 댔다. 미묘하게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드릭이 입술을 열었다. 가까운 거리 떄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 만큼 낮고 조용했다.
“어떻습니까?”
“글쎄, 사실 잘 모르겠어요. 평소 체온이 어느 정도 되시는지 모르니
까.”
“그냥 보통 사람들이랑 같습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잖아. 어디서 평범한 척을 해? -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디의 손은 서늘하군요.”
“제 손이 약간 찬 편이긴 해요.”
“이렇게 서늘하면.”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오른손으 로 내 손등 위를 덮었다. 따스한 온 기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
“겨울엔 춥지 않습니까?”
“장갑을 끼긴 하죠.”
나를 곧게 올려다보는 적안과 시선 이 마주쳤다.
나는 마주친 얼굴을 샅샅이 훑었
다.
‘호흡 정상. 체온 정상. 맥박, 아마 도 정상.’
다행히 세드릭 에반스의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이 많이 가라앉아 있고 기행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일단 겉보기로 는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폭주가 가깝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네.’
그럼 도대체 왜 달밤에 이런 기이 한 행동을 벌이고 있었던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이제 슬슬 말씀해 주시죠, 전하. 왜 남의 계단을 점령하고 계 셨던 건지.”
“지나가다 편해 보여서 앉았습니 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정말인데요.”
“저택으로 돌아가면 최고급 침대며 소파가 널리셨을 분이, 제 가게 계
단이 편해 보여서 앉았다고요?”
“앉아 있을만 합니다. 계단 폭도 기대기 딱 적절하고. 경치도 좋고.”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지 금 절 놀리시는 거죠/’
“아뇨, 정말 편한데요. 못 믿으시겠 으면 옆에 앉아 보시겠습니까?”
세드릭은 말만으로도 모자라 제 옆 자리를 톡톡 손으로 두드리기까지 했다.
난 기가 막히면 되레 말이 안 나 온다는 게 이런 기분임을 처음 깨달 았다.
“아뇨, 안 앉을 거예요. 전하께서도 이제 일어나세요.”
“조금 더 앉아 있으면 안 됩니까?”
“안 돼요. 제 계단이에요. 일어나세 요.”
그제야 세드릭이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일어났으니까 이제 돌려보낼 건가 요?”
“……제 계단을 마음에 들어 해주 신 보답으로 차 한 잔 정도는 대접 할게요.”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활짝 웃었다.
……‘활짝’이라니, 그와 정말 어울 리지 않는 수식어였지만,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가게 안으로 세드릭을 들였 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던 에른과 리나도 함께.
“리나. 이제 올라가서 쉬어.”
“네? 아뇨, 차를 내올게요!”
“아냐, 내가 할게. 오늘 파티니 뭐 니 하루 종일 힘들었잖아? 얼른 들 어가서 쉬어.”
“그래도 어떻게……,”
“리나, 명령이야. 얼른 쉬라구.”
내 억지에 리나가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올랐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꼭 부르시란 말과 함께.
세드릭과 눈이 마주친 에른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올라갔다.
단둘이 되자, 나는 세드릭에게 간 단한 다과를 내주었다.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차 같 은 건 거의 끓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먼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 금어 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표정 관리를 했다.
‘리나한테 차만 끓여달라고 할걸.’
괜히 좋은 고용주인 척했네.
차를 한 모금 마신 세드릭이 평온 한 얼굴로 말했다.
“향이 좋군요.”
‘향은 좋은데 맛은 걸레 빤 물 같 군요’로 들리는 건 내 자격지심 때 문이겠지?
나는 한 모금 더 마시는 척하곤 찻잔을 멀찍이 밀어놓았다.
“그나저나 전하, 이 밤에 제 가게 엔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계단에 왜 앉아 있었던 거냐고 캐 묻는 건 진즉 포기했다. 하지만 이
것만큼은 궁금했다.
세드릭이 맞닿아 있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근처에서 용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용건으로 오셨냐 고 여쭤본 거잖아요.”
“……그건 비밀입니다.”
나는 가슴을 탁탁 쳤다.
“답답해요.”
“레이디의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
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내 복장 터지라고 하는 소리 맞지?
나는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죄송하시면 시원하게 대답 좀 해 주세요.”
“……이것만은 정말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입꼬리를 비죽였다.
세드릭이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대신 다른 건 뭐가 됐든 답해드리 겠습니다. 아무거나 여쭤보십시오.”
“흐음. 뭐가 됐든?”
“네. 뭐가 됐든.”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뺨을 매만졌 다.
그리곤 잠시 뒤, 결정을 내리고 입 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