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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2화 (32/153)

〈32 화〉

“투자자.”

아.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곧 라파엘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 다.

“그렇군요. 투자자…… 답변해주셔

서 감사합니다.”

“왜 웃지?”

세드릭이 라파엘의 미소 위로 시선 을 미끄러트렸다. 라파엘은 더 짙게 웃었다.

“별 건 아닙니다, 전하. 아리엘 님 께서 전하를 신경 쓰시는 것 같아 어떤 관계이신지 전부터 궁금했거든 요. 투자자라면 확실히 신경 쓰실만 하네요. 그런 이유였군요.”

“내 기분 탓인가.”

세드릭이 입술을 열었다. 나른한 중얼거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 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글쎄요, 전하. 조금 안심이 되기는 하네요.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세드릭이 그제야 라파엘에게로 고 개를 틀었다.

라파엘은 처음으로 세드릭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보았다. 무심히 가라 앉은 붉은빛 눈동자가 피부에 와닿

자, 섬뜩한 소름이 라파엘의 등골을 내달렸다.

“이름이?”

“라파엘 에드먼드라고 합니다. 이 근처에서 꽃집을 운영 중이죠.”

“꽃집이 라.”

세드릭이 말했다.

“번창하길 바라지.”

……협박인가?

라파엘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 건 자신의 지나친 생각임을 인정했 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세드릭 에반스는 저열한 협박을 일삼을 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 할 지라도.

세드릭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가를 꺼내려던 손짓이 멈칫 굳었 다. 이곳이 후원임을 떠올린 듯했다.

“흡연은 하나?”

“아뇨, 전하. 꽃을 만지는 손이라 못 합니다.”

“그렇군.”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곤 도로 시 가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대신 하인 에게 부탁해 와인잔을 채웠다.

영애들과 대화를 나누던 아리엘이 이쪽을 바라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아리엘이 세드릭과 라파엘에게로 걸 음을 옮겼다.

“뭐하고 계세요, 두 분?”

“후원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아리 엘 님. 참 아름다운 후원이군요.”

“감사해요. 전하께서는…… 또 음

주 중이시네요?”

아리엘의 시선이 와인잔 위로 떨어 졌다. 세드릭이 와인잔의 목을 쓰다 듬었다.

“적절한 음주는 건강에 도움이 됩 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적절한 음주 가 아니던데. 전하, 얼마나 드셨어 요?”

아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던지자, 수행원

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리 엘이 팔짱을 꼈다.

“전하. 말씀드렸잖아요. 알코올은 ……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아리엘이 목소리를 낮춘 탓에, 라 파엘에겐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 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주의하죠.”

라파엘은 아리엘 몰래 입술을 비죽 였다. 세드릭 에반스는 이 파티에서

고작 와인을 한두 잔 기울인 게 다 였다. 아리엘이 저렇게 걱정할 정도 는 아니었다.

아리엘이 라파엘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라파엘은 다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루나와 아이들이 간단한 게임을 준비했다는데, 두 분께서도 참가하 시겠어요?”

“게임이요? 물론이죠.”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드릭의 대답에 아리엘이 아, 하

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벌써 너무 오래 계셨죠. 바 쁘실 텐데 자리해주셔서 감사했어 요.”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음. 거짓말 같은데.”

아리엘이 뺨을 매만졌다. 디저트와 수다로만 가득한 이 후원에서 세드 릭은 할 일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하 는 듯했다.

하지만 라파엘이 보기에 세드릭은 꽤나 바빠 보였다. 누군가를 구경하

는 일만으로도.

“먼저 일어나서 미안합니다. 레이 디.”

“아니에요. 그럼 다음…… 은……

둘의 대화가 또 작아졌다. 라파엘 은 귀를 쫑긋 세워 보았지만 두 사 람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던 둘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하.”

가볍게 묵례한 세드릭이 후원을 나 섰다.

세드릭 에반스와 그가 데려왔던 하 인 하나. 단둘만이 사라졌을 뿐인데 도, 좁게 느껴지던 후원이 순식간에 비어 보였다.

세드릭이 사라진 후원 너머를 잠시 바라보던 아리엘이 이내 고개를 돌 렸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

루나가 소곤거렸다. 하도 비밀스러

운 목소리라 고개를 숙여서 들어야 했다.

“왜 그래?”

“에반스 공작 전하 말이에요. 아직 아리엘 님께 마음이 있으신 거 아니 에요?”

풉.

순간 마시던 과일 음료를 그대로 후원의 풀밭에 흩뿌릴 뻔했다.

나는 기막힌 눈으로 루나를 바라보 았다.

“아냐. 절대 아냐. 어쩌다 그런 생 각을 하게 됐어?”

“확실한가요, 아리엘 님? 그야…… 그렇잖아요. 누가 전 애인의 개업 파티에 일부러 찾아오겠어요? 특히 공작 전하처럼 바쁘신 분이요.”

맞는 말이라는 듯 나머지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을 안 했던가. 이 가게를 낼 수 있었던 게 공작 전하 덕분이 야. 투자를 받았거든.”

“진짜요? 공작 전하께서는 원래 투 자하신 모든 곳에 개업 파티까지 따 라가시나요?”

“……그것까진 나는 모르지.”

“아무래도 아직 마음이 있으신 것 같아요. 루나의 촉은 분명해요!”

아니라니까, 얘들아.

나는 난감한 얼굴로 허허 웃었다.

“재밌는 추리구나, 얘들아. 하지만 틀렸단다.”

“어째서요, 아리엘 님! 왜 단정하 시는 거죠!”

“단정할 만한 일이니까. 하아. 잘 들어, 얘들아.”

나는 소녀들을 향해 두 검지를 겹 쳐 엑스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전하께선 내게 마음이 없어. 단 한 톨도.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사람의 마음은 확신할 수 없는 거 잖아요!”

“아니, 확신할 수 있어.”

왜냐면 난 원작을 읽었거든.

하지만,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 기에 나는 대신 간식 테이블을 가리 켰다.

“어머, 저길 좀 봐! 복숭아 모양 케이크가 새로 들어왔네? 너무 예쁘 다!”

“어? 저거 파르모 과자점 신상 아 니야?”

“와! 먹어보고 싶었는데!”

소녀들이 썰물처럼 단 것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구경하는 내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저도 깜짝 놀라기는 했어요, 아리 엘 양.”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샤를로트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선 짓궂게 웃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에반스 전하를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 뭐 예요?”

“하하. 저 애들에게 말했다시 피 전하와 저는 투자자와 경영인 관

계거든요.”

샤를로트가 대답 대신 부채로 입을 가리곤 호호 웃었다. 의심을 거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단지 투자자가 경영인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아니던걸요.”

“ 네?”

“어머,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시선 이 하도 집요해서 드레스에 구멍이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는 데.”

“아하하하. 샤를로트 양도 참 재밌

으세요.”

나는 샤를로트의 말에 웃음을 터뜨 렸다.

뭐, 오늘 세드릭이 참석한 건 나로 서도 의외인 일이기는 했다. 그러니 나와 세드릭의 관계를 자세히 모르 는 남들이 보기엔 수상할 수도 있겠 지.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는데.

“아리엘 님! 저희 이제 게임 해 요!”

저 앞에서 에일린이 손을 흔들었 다.

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소녀들 의 지시에 따라 한데 모였다.

윈스턴 백작저로 돌아가자,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내게 달려왔 다.

“아가씨! 왜 이제야 오십니까!”

“응? 나는 항상 이 시간에 왔는 데.”

“주인님이 노하신 상태인데, 당연 히 일찍 와서 주인님 기분을 맞춰드 리셨어야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설마 아버지께서 아직도 날 기다리고 계 시나?”

“예, 아가씨께서 돌아오시기만을 벼르고 계셨습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저택에 돌아 오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레몬

티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냥 방으로 올라갈 테니까, 집사 는 모르는 척……,”

“아리엘 윈스턴!”

노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윈스 턴 백작이 분노에 찬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다 진 뒤에야 들어오다니. 네가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기다리고 계셨나요?”

“당연하지!”

윈스턴 백작이 내게로 성큼성큼 걸 어 왔다.

“혼담을 또 거절했다지?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아리엘! 이래서 가게 니 뭐니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할 때 도 반대했거늘. 지금 잠깐 흐름을 탔다고 그게 영원할 것 같으냐? 귀 족 영애라면 모름지기 가정부터 최 우선으로 이뤄야지.”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아저 씨는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읊는 재주가 있었 다.

“그리고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네가 지금은 젊고 아름다우 나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 지금은 혼담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뚝 끊길 수도 있는 게다! 멀리 볼 줄을 알아 야지, 아리엘!”

“자,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당장 내일 앨버트 영식과의 약속 자리에 참석하고 오너라!”

“죄송하지만 앨버트 영식과는 혼담

을 진행할 생각이 없어요, 아버지.”

“어째서! 가문도, 능력도 어디 하 나 빠지지 않는 영식이거늘!”

“엉덩 턱이시더라고요.”

“……뭐?”

“개인적으로 턱이 갈라진 남성분은 취향이 아니어서요.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취향은 중요한 거잖아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 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안타 가웠다. 앨버트라는 그 영식, 초상화 로는 퍽 귀엽게 생겼던데. 뭐, 엉덩

턱이 취향인 사람도 많을 테니 우리 둘은 인연이 아닌 거겠지.

백작이 뒷목을 잡았다.

“이러다 내가 내 명에 못 살겠다! 네가 기필코 이 아빌 잡아먹으려 드 는구나! 에잇, 앨버트 영식과 만나 기 전까진 네 방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갈 줄 알아라!”

“주, 주인님.”

“집사! 아리엘의 방문을 당장 막아 놓거라!”

“예, 옙. 알겠습니다.”

집사가 얼른 하인들에게 명령해 내 방문을 막아 놓도록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에른 경.”

“예. 아가씨.”

“오늘은 외박을 해야겠군요. 가게 로 다시 데려다 줘요.”

“예. 아가씨.”

“아리엘!”

내 이름을 외친 백작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래! 어디 그놈의 가겔 끌어안고 네 멋대로 굴어 보거라! 나중에야 네 어리석음을 깨닫겠지! 신께서도 무심하시지. 하나 있는 자식이 저 모양이라니!”

백작에게 외박 허락도 받은 나는 에른과 리나를 데리고 도로 저택을 나섰다. 뒤에서 백작이 커다랗게 신 세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 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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