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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1화 (31/153)

〈31 화〉

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세드릭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 았다. 그 시선에 나는 다시금 어색 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 다.

그래, 역시 바쁘신 공작 전하께서 그런 자리에 끼려 할 리가 없……,

“하겠습니다. 참가.”

네? 정말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세드릭 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제가 레이디의 개업을 제대로 축하한 적이 없지 않습니 까?”

“아, 그건 괜찮은데……-”

“마침 잘 됐군요. 장소는 레이디의 가게 입니까?”

“아……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요.”

“알겠습니다. 날짜가 정해지면 연

락 주십시오.”

……진심인가?

나는 살짝 미심쩍은 눈으로 세드릭 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 남자가, 내 조그만 향수 가게의 개업 파티에 참가해서 와인 을 나눠 마시며 담소하겠다고?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세드릭이 빙긋 미소를 돌려주었다.

‘……잘 안 웃는 주제에, 예쁘게도

웃네.’

아닌가, 생각해보면 요즘은 꽤 자 주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봤자 태반이 비웃음이나 냉 소, 헛웃음이었지만.

“네. 연락 드릴게요. 바쁘시면 안 오셔도 괜찮아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연락.”

세드릭이 조금 더 짙게 웃었다.

쏘 쑤

그로부터 며칠 뒤, 개업 파티 당 일

윈스턴 백작이 갑자기 날 붙잡더니 되도 않는 훈계를 늘어놓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졌다.

나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조금 뒤 마차가 가게 근처에 도착 했다. 마차 밖으로 발을 내리려던 순간이 었다.

“아리엘 님!”

루나가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오더 니 내게 웬 안대를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안대를 쳐다봤다.

“이게 뭐야?”

“가게까지 쓰고 걸어가주세요!”

“……싫은데.”

“제발요, 아리엘 님! 루나 일생 일 대의 부탁이에요!”

루나의 호들갑에 하는 수 없이 나 는 안대를 썼다. 주변인들이 이상하 게 쳐다보고 있을 테지만 앞이 보이 지 않으니 내 알 바 아니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조심조심 한 발

짝씩 내딛으세요!”

나는 루나를 따라 더듬더듬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까지 도착하고 나서 야 루나가 말했다.

“이제 안대 벗으셔도 돼요!”

“그래, 허락해줘서 고마워.”

안대를 벗은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루나가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 다.

연한 파스텔톤의 풍선들이 여기저 기 매달려 있었다. 반짝이는 장식이 과할 만큼 널려 있었는데도, 과하기 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 다. 가게 문 앞에는 여러 가문에서 보낸 꽃다발이 가득했다.

루나가 칭찬 받길 기다리는 강아지 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 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고생했네, 루나. 예쁘다. 고마워.”

“헤헤, 사실 후원에 더 공들였어 요.”

후원까지?

나는 루나에게 이끌려 후원으로 향 했다.

“아리엘 님!”

“오셨군요!”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인삿말 이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후원을 둘러보았다.

마치 결혼식장처럼 순백의 장식물들 로 아름답게 꾸며진 후원에는 아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아리엘 양! 축하드려요.”

오늘따라 더 눈부신 미모를 흩뿌리 는 샤를로트와.

“아리엘 님! 저희예요!”

루나와 같이 연분홍색으로 맞춰입 은 악녀 군단과.

“아리엘 님, 늦었지만 개업 축하드 립니다.”

평소보다 공을 들인 건지, 레몬색 머리가 오늘따라 더 반짝이는 꽃집 청년 라파엘과.

그 외 친분이 있는 손님들과 세논 지구의 상인들까지.

그리고.

“역시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겁 니까.”

희미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

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온통 파스텔 톤 향연인 후원에서, 홀로 이질적인 남자가 더없이 여유롭게 와인을 마 시고 있었다.

세드릭 에반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뭔가를 손에 쥔 채로.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다시 봐도 멋진 가게로군요.”

그가 그렇게 속삭이며 내게 무언가 를 건넸다.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후각이 먼저 나를 압도했다.

코를 찌를듯이 짙은 장미 향.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부시게 만 발한 장미 꽃다발이, 황홀할 만큼의 향을 흩뿌리며 나를 사로잡았다.

“이, 이게 다 뭐예요.”

나는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세드릭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 다.

“마음에 드십니까?”

장미 꽃송이 하나하나가 물감을 칠 한 듯 붉디붉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꽃다발에 코를 살짝 파묻었다. 짙은 장미 향이 온 몸을 가득 채웠다.

세드릭을 올려다본 나는 고개를 끄 덕였다.

“네.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그러자 세드릭은 대답 대신 손가락 을 내게로 뻗었다.

나는 굳은 채 그의 기다란 손가락 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꽃잎. 묻었습니다.”

손가락이 내 뺨에 살짝 와닿았다. 그리곤 꽃잎과 함께 떨어져나갔다.

“ 아.”

붉은 장미꽃잎 한 송이가 세드릭의 손 위에 얹혔다.

“감사해요.”

세드릭이 꽃잎을 쥔 채 싱긋 웃었 다.

“뭘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개 업.”

나는 또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얼빠진 앵무새가 된 기분 이었다.

세드릭이 한 번 더 웃곤 뒤로 물 러났다. 내내 초롱거리는 눈으로 나 를 쳐다보고 있는 소녀들에게 날 양 보한다는 듯이.

“아리엘 님!”

세드릭이 물러서자 그제야 소녀들 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삼일 만이죠? 뵙고 싶었어요!”

“파티는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세 요?”

“음식 준비는 저랑 사샤가 했고, 소품 준비는 에일린이랑 루나가 했 어요!”

“그래, 그래. 정말 고마워. 예쁜 파 티야. 마음에 쏙 드네.”

릴리가 기쁜 듯 눈을 반달 모양으 로 접었다. 나는 릴리 옆의 소녀에 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사샤도 고마워. 요즘은 잘 자니?”

사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 다.

열이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 다.

“네, 자, 잘 자요! 걱정해주셔서 감 사합니다!”

“그래, 그럼 다행인데…… 열이 있 는 건 아니고?”

“아뇨,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멀쩡해요!”

그,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는 손사래까지 치는 사샤에게 고 개를 끄덕여 주었다.

“또 불면증이 심해지면 말해. 전에 준 향수가 다 떨어져도 말하고.”

“앗, 네……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사샤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감동 을 쉽게 하는 성격인 것 같아 귀여 웠다.

“아리엘 님. 축하드립니다.”

라파엘이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 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축하는 무슨요. 가게 열고 저희가 거래한 지가 벌써 몇 주짼데요.”

“아하하, 그런가요? 그럼 다른 걸 축하드려야겠네요. 새로운 향수들이 보이던데, 꽃 조달에 성공하신 모양

이에요.”

“아, 네. 맞아요.”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모 상단과 거래를 트게 된 덕분에 요. 당분간 재료 걱정은 없어졌답니 다.”

“대단하십니다, 아리엘 님!”

라파엘이 감탄한 듯 쳐다보자, 나 는 더욱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를 축 하해 주었다. 비록 몇 주나 늦은 개

업 파티긴 했지만, 나는 파티를 개 최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 은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받 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녀들에게 감사 인사 를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

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소녀들에게 향수를 한 병씩 건넸다.

소녀들이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 로 향수를 들여다보았다. 크리스탈

을 장미꽃잎 모양으로 깎아놓은, 꽤 아름다운 형태의 향수병이었다.

루나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냅다 향수를 분사했다. 곧 소녀의 눈망울 이 커다래졌다.

“엄청 향긋해요, 아리엘 님! 아까 세드릭 전하께서 주신 꽃다발만큼이 나요!”

……그 비유는 뭐야.

나는 당혹감을 숨기며 웃었다.

“마음에 드는 거 같아 다행이네.

그리고, 그 향수엔 숨겨진 비밀도 있어.”

“숨겨진 비밀이요?”

루나가 눈에 별을 박았다. 역시 비 밀이라면 환장하는 저 나이대 애들 다웠다.

나는 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사실, 그 향수에 들어간 꽃 에는…… 첫사랑을 이루어주는 효과 가 있거든.”

“네에에?!”

소녀들이 합창했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후원 안의 사람들이 몽땅 이쪽 을 돌아볼 정도였다.

나는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에 웃 음을 삼켰다.

“감사해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진 짜 중요한 날에만 뿌릴게요!”

“저도요!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에일린이 소중하게 향수병을 껴안 았다. 머릿속으론 첫사랑 대상을 생 각하고 있는지 눈빛이 꿈결에 잠겨 있었다.

역시 잘 먹히네. 난 속으로 쿡쿡 웃었다. 실제로 저 향수에 그런 효 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 만 향수에 들어간 꽃잎에 그런 미신 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향이 좋으니까.’

실제로 꼬마들의 연애 사업에 도움 이 될지도 모르지.

아무튼, 내 선물은 소녀들의 마음 을 홀랑 사로잡은 듯했다. 소녀들은 마치 처음 곰 인형을 선물 받는 아 이처럼 향수병을 꼭 쥐고 조잘댔다.

소녀들에게 장난감을 쥐여준 나는 샤를로트와 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담소를 나누고 있던 샤를 로트와 영애들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에반스 공작 전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이 무척 좋군요.”

라파엘이 세드릭의 옆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세드릭 이 대답했다.

“그렇군.”

라파엘의 파란 눈동자가 세드릭을 관찰했다.

그는 막 대화를 걸어온 상대는 안 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저 턱을 괸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파엘은 그 시선을 따라가 보였 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리엘 윈스 턴이 있었다.

아리엘은 즐거워 보였다. 또래 영

애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이야기 를 나누는 그녀의 얼굴이 활기로 빛 났다.

둘은 꽤 한참 동안 아무런 말 없 이 같은 곳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라파엘은 깨달았다. 옆자리에 앉은 상대를 의식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공작 전하.”

세드릭이 느리게 라파엘에게로 시 선을 돌렸다. 마치 라파엘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는 듯한 눈빛이었다.

라파엘은 빙긋 눈꼬리를 접으며 물 었다.

“실례지만, 아리엘 님과는 어떤 관 계이신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세드릭이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올 렸다.

무시하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라파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걸 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세드릭이 입술을 움직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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