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30화 (30/153)

〈30 화〉

“영애! 어쩐 일이십니까? 조만간 들르신다는 말씀이 설마 오늘이었습 니까?”

“아, 네. 약속 없이 왔는데 전하께 서 시간이 되실까요?”

“그럼요! 되실 겁니다! 어서 이쪽 으로 들어오십시오!”

리키온이 묘하게 화색이 되어선 나 를 안내했다. 목적지는 전에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던 세드릭의 집무 실이었다.

그새 상태가 심각해진 건 아니겠 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살짝 걱정 에 잠겼다.

이제 아닉시아 향도 다 떨어졌을 텐데……,

요 며칠 간 세드릭은 한 번도 재 촉하질 않았다. 그건 곧 그의 몸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겠지만, 그래 도 개복치 전담의사로서 조금 걱정 이 되기는 했다.

진짜 괜찮나? 이렇게 오래 향을 안 맡아도?

집무실에 도착하자 리키온이 내 방

문을 알렸다.

“전하, 윈스턴 영애께서 방문하셨 습니다.”

그러자, 삼 초도 채 지나기 전에.

벌컥.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깜 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레이디?”

문을 열어젖힌 세드릭이 멍하니 나

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예요. 혹시 다른 분과 약속 이 있으셨나요?”

이렇게 다급히 문을 연 걸 보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나를 빤히 쳐 다보았다. 잠시간의 정적 뒤, 그가 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가까워지는 세드릭을 찬찬히 관찰했다.

뭐지. 며칠 새, 분위기가 조금 변

한 것 같은데.

날카로워진 턱선. 깊어진 눈가. 살 이 빠진 것 같은데…… 요즘 컨디션 이 조금 안 좋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레이디.”

“네?”

“잠시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더?

의아했으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내 목덜미 근처까지 다 가왔다.

나는 조심스레 세드릭을 불렀다.

“……전하?”

“잠시만.”

세드릭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내 향수에 신경이 미쳤다. 전 에 세드릭이 거의 정확히 배합법을 맞춘 적이 있는 향수에는, 신경이 안정되는 허브 역시 포함되어 있었

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역시,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구나.

세드릭의 컨디션에 내 탓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해서, 나는 잠자코 세드릭에게 목덜미를 내주었다.

“그러고 계시면 좀 나으신가요?”

아무리 그래도 신경 안정제 용도로 만든 향수는 아니라 큰 효과는 없을 텐데.

귓가에서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 아뇨.”

역시……으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신 경 안정용 향수를 갖다줘야 겠어.

가게에 다녀 오겠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 었다.

“하지만

귓가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들렸 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긴 합니다.”

기분?

의외의 단어에 나는 고개를 돌렸 다.

그건 실수였다.

아주 가까이서 나와 세드릭의 눈이 마주쳤다.

‘으 ’ 3자'.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멈칫 거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 때문일까. 얼른

떨어지는 대신 나는 못 박은 듯 그 자리에서 굳었다.

가깝다는 걸 의식하자마자 세드릭 의 체향이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여전히 정체를 종잡기 힘든 향이었 다. 시원하면서도 거침없는.

어떤 허브와 꽃을 섞어도 이 향을 재현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건 아마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향일 테니까.

내가 세드릭의 체향에 매여 있는 동안, 세드릭 역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달리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탐색하듯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

다.

나는 먼저 몸을 물렸다.

“요즘 너무 과로하시는 건 아닌가 요, 전하.”

세드릭이 한 발짝 물러선 나를 빤 히 바라보았다.

“……과로 말입니까?”

“일에 너무 매진하면 쉽게 우울해 질 수 있어요. 향수가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은 해결책은 아니랍니다.”

아무래도 외간 여자한테서 나는 허 브 향에까지 매달리는 걸 보면, 지 금 세드릭의 컨디션은 바닥을 친 상 태가 틀림없었다.

안 되는데, 그러면.

내가 원작에서 읽은 바로는 저 남 자의 핏줄에 흐르는 광증은 본체 컨 디션의 영향을 받는다.

나는 시한폭탄을 보듯 조심스럽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컨디션 조절에 항상 신경 쓰셔야

해요. 몸에 좋은 음식만 드시고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세드릭 가까이서 숨을 들이마시자 옅은 알코올 향이 났다. 나는 미간 을 굳히고 말했다.

“방금까지 와인 드셨죠? 낮부터 음 주는 몸에 좋지 않은 거 아시잖아 요.”

“……죄송하다고 해야 합니까?”

“제가 주치의도 아니고 왜 사과를 하세요. 그냥 조심 좀 하시란 이야

기예요.”

안 그랬다간 어디 건물 하나가 부 서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내 불안한 눈초리를 어떻게 해석했 는지, 세드릭이 미묘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기울였다.

“낯선 기분이군요.”

“뭐가요?”

“마치 레이디께서 제 건강을 걱정 해주고 계신 느낌이라서.”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혹시나 모를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정확히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주변 기물들을 걱정하는 거다.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단호하시군요.”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야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리키온 이 그 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몇 가지 허브들을 불러드릴 테니 메모해 주세요. 취침 전에 전하 침 실에 향을 피우면 숙면에 도움이 될 거예요.”

“네, 넷! 알겠습니다, 영애!”

“……묘하게 잠 못 드는 어린애 취 급 받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만.”

“그런 건 아닌데…… 잠깐, 혹시 잠도 잘 못 주무세요?”

세드릭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키

온에게 불러줄 허브 목록을 늘렸다. 불면증에 좋은 허브들을 추가해서.

“그리고, 여기. 아닉시아 향이요.”

나는 세드릭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여기까지 온 목적이었다.

“배합법을 약간 바꿔 봤어요. 더 흡수가 잘 되게끔. 아마 문제가 있 지는 않겠지만, 혹시 생긴다면 곧장 저를 찾아 주세요.”

상자를 받은 세드릭이 감사 인사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가실 겁니까?”

“네?”

나는 멀뚱히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네, 뭐. 그래야겠죠. 향도 전달 드 렸고.”

“저녁이라도 함께하시죠.”

응?

뜻밖의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녀 군단도 아니고, 세드릭이 내 게 저녁 식사를 청하다니. 몹시 의 아한 일이었다.

으음, 어떻게 할까.

결정은 빨랐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 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실 제가 오 늘 여러 일들을 해결하느라 낮부터 굶은 상태거든요. 이른 저녁을 먹어 야 할 것 같아서요.”

“준비하겠습니다. 이른 저녁.”

“ 네?”

나는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보았 다.

괘종시계가 오후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이르지 않나요? 전하께 서 식사하시기엔?”

“별로 상관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주방장에게 1인분을 더 만들라 지시 하죠.”

“아, 음……/

나는 뺨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안 된다고 거절할 만한 이유 는 없다. 하지만 이 남자와 단둘이 마주보고 저녁 식사를 하는 광경도 잘 상상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망설이는 내게 세드릭이 말했다.

“투자자와 경영인으로써 그럴듯한 대화라도 나눠보죠.”

처음엔 농담인 줄 알고 웃어넘기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세드릭의 말에 도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세드릭은

나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거금을 내 게 투자한 투자자였다.

심지어, 요즘은 매그너스가 계속 내 가게에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그 이야기가 세드릭의 귀에 흘러들어갔다면……,

‘불안해할지도 몰라.’

자신의 투자금이 먼지처럼 날아갈 까 걱정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에반스 공작 전하의 입장에서 야 내게 투자한 금액 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불안해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긴. 이번에 매그너스가 꽤 강수 를 두기는 했지. 제이나를 끌어들이 지 못했다면 나도 좀 힘들어졌을지 도 몰랐다.

나는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전하.”

“……네?”

“위기가 있긴 했지만, 사업은 순항 중이랍니다. 전하께서 불안해하시지 않도록 제가 잘 설명드릴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서라도 작성 해오는 건데…… 내 준비가 미흡했 다.

나는 자책하며 세드릭에게 믿음직 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시죠, 투자자님. 그간의 사업 경 과를 설명드릴게요.”

세드릭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투자자는 그냥 해본 말이고. 전 그냥 식사를 함께 하자 청을 드

린 겁니다만.”

“알겠어요. 이해했답니다.”

세드릭도 정말 투자 설명회 같은 분위길 원한 건 아닐 거다. 식사 시 간까지 진지했다간 얹힐 테니까.

세드릭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 었지만, 곧 내게 좋아하는 메뉴를 물었다.

몇 가지 내 취향의 달고 짠, 하지 만 급하게 준비하기 어렵지 않게 쉬 운 메뉴를 불러주자 리키온이 열심 히 받아 적었다.

브 # #

두 시간 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스 크림 스푼을 내려놓았다.

전채와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해 치우면서 나는 세드릭에게 꽤 완벽 히 사업 경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 낮에 제이나를 만난 일 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뿌듯하기까 지 했다. 세드릭 역시 그 대목에선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야기에 몰입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 덕거리기도 했다.

그때를 제외하곤, 어쩐지 줄곧 조 금 떨떠름해 보였지만.

메뉴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무튼, 내내 사업 이야기를 했더 니 식사를 방금 마쳤는데도 약간은 속이 허한 기분이었다.

내 아쉬운 눈길을 느꼈는지 주방장 이 더 많은 요리를 내오겠다 했지 만, 난 고개를 저었다. 남의 저택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실례니까.

식탁에서 일어나는데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일 얘기만 했나?’

하긴, 세드릭과 나 사이에 일 말고 무슨 대화가 오가겠냐만은.

뺨을 긁적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실은 개업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데요, 전하.”

“……개업 파티요?”

“네, 저는 괜히 요란하게 그런 걸 챙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꼭 열어줘 야겠다고 고집 부리는 아이들이 있 어서.”

그래서

거기까지만 말한 채, 나는 잠깐 뜸 을 들였다.

명색이 개업 파티니까 투자자인 세 드릭을 초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 다. 아마 공작 전하께서 그런 자리 에 끼려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초대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막상 개업 파티에 오라고 말하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 다. 사적인 교류가 거의 없던 사이 라 그런가.

나는 애써 어색함을 감추고 아무렇 지 않은 듯 미소를 걸쳤다.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곧 열 것 같은데 바쁘지 않으시면 전하께 서도 참가하시겠어요?”

까쓰'4 요정#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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