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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9화 (29/153)

〈29 화〉

“……하하.”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제이나가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마하니 이런 카드를 제시할 줄 은 몰랐는데, 몹시 기발한 영애시로 군.”

“감사해요.”

마주 미소를 짓자 제이나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레이디의 말대로만 된다면 꽤 혁 명적이겠군. 하지만 솔직히 아직 완 전히 신뢰가 가지는 않소. 쉽게 믿 기 힘든 이야기라서.”

“물론이죠. 저 역시 말로만 믿어달 라 부탁드리는 건 아닙니다.”

나는 아까부터 쥐고 있던 향수병을 제이나에게 내밀었다.

“직접 사용해 보시겠어요?”

“……으음. 향수라.”

제이나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 로 향수병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생 소하군.”

“그럼 제가 뿌려드릴까요. 잠시 실 례하겠습니다. 눈을 감아주세요.”

제이나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옆 에서 리키온이 커다래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향을 분사하자 제이나의 이마가 미 묘하게 굳었다.

“ 냄새가……?

“좀 희한하죠? 잠시만 참아 주세

요. 곧 중화될 테니까.”

“ 0 으”

- I그

제이나가 눈을 내리깔고 인내했다.

곧 그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정말이로군. 냄새가 없어졌어.”

“네. 말씀드렸듯이요.”

“리키온 군. 내 몸에서 무슨 냄새 가 나는지 확인해줄 수 있겠나?”

“아, 네. 물론입니다.”

제이나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리키 온은 순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뒤, 리키온이 눈을 끔뻑였다.

“……안 납니다. 아무 냄새도.”

“호오.”

제이나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내게 고개를 돌리곤 정중히 물었다.

“레이디 윈스턴. 실례지만 내 사냥 개들을 잠시 안으로 들여도 되겠 소?”

“물론이에요.”

흔쾌히 허락하자 제이나가 휘파람 을 불었다.

그러자 막사 밖에서 개 두 마리가 달려들어왔다. 잘 빗긴 갈색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잘생긴 대 형 견들이 었다.

“이리 온.”

제이나가 사냥개들에게 손을 내밀 었다. 헥헥대며 달려든 개들이 제이 나의 손에 코를 묻고 킁킁댔다.

낑, 끼잉?

두 마리의 개가 고개를 연신 갸웃 거렸다. 개중 한 마리가 제이나의 손에 거의 코를 박은 채로 킁킁대더 니 고개를 들어 제이나를 올려다보 았다. 그리곤 다시 손에 코를 박기 를 반복했다.

끼잉, 낑낑!

개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구슬프게 울었다. 제이나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그대로니 까.”

아무래도 늘 맡던 주인의 체향이 사라지자 불안감을 느낀 것 같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개들을 달랜 제이 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 사냥개들마저 속아넘어가다니.

효과는 충분히 확인한 것 같군, 영

애.”

“ 만족하셨나요?”

“으음. 몹시 만족스럽소.”

제이나가 눈꼬리를 휘었다.

중년 여성의 주름진 눈가에 웃음기 가 가득 들어찼다.

“올해는 망할 스케론 놈들의 씨를 말릴 수 있겠어.”

자신의 영지에 스케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출몰하는 바람에 영주민들 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제

이나가 투덜거렸다. 나는 빙긋 웃었 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그냥 받을 수는 없지. 얼마를 원하시오, 영애? 대금 으로 얼마면 충분하겠소?”

“아뇨, 제이나 님. 돈은 괜찮습니 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금보다 값진 것을 얻기 위해서였으니까.

제이나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달리 원하시는 것을 말 씀해 보시오, 영애. 그래. 나와 거래 를 하고 싶다고 하셨던가?”

“네, 제가 원하는 것은……

나는 제이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방에서만 자라는 귀한 허브들과 아칼리 꽃의 독점 구매권입니다.”

“꽃과 허브라……?”

제이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사파이어와 금도 아니고. 꽃과 허 브? 그걸로 정말 충분하시겠소?”

“네. 제겐 사파이어나 금보다도 값 진 것들이니까요.”

“아칼리 꽃이라…… 솔직히 우리 상단에서 주로 취급하는 물품은 아 닌데.”

“길베르트 상단은 항상 서쪽 사막 을 건너 서방 왕국과 교류하시는 걸 로 알고 있습니다. 아칼리 꽃은 제 도에서야 귀하지만 서쪽 사막에서는 그렇게까지 구하기 힘든 꽃은 아닙 니다. 사막을 지나는 길에 원주민과 직접 교역을 해 주신다면 어렵지 않

게 조달해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 요.”

“그런 것들까지 미리 조사해 오신 것이오?”

나는 살짝 웃었다.

“제겐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제이나가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바 라보았다. 탐색하듯 나를 살피는 눈 빛에는 경계라기보다는 호기심에 더 가까웠다.

“좋소. 하지만 꽃이나 허브는 우리 상단의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양을 납품해드릴 수 있으리라 장담은 못 드리오. 노력은 해 보겠 지만.”

“그걸로 충분하답니다, 제이나 님. 감사드려요.”

나는 생긋 웃었다.

아직 내 가게는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았다. 제이나 입장에서야 적은 양 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겐 차고 넘칠 양일 터였다.

제이나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어쩌면 영애께선 내가 직접 거래 한 상대 중 최연소일지도 모르겠 군.”

“어머, 영광인데요.”

나는 제이나의 손을 맞잡았다. 맞 닿은 손은 커다랬고,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혀 있었지만 따스했다.

독점 거래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뒤 나는 제이나의 막사를 나섰다. 등 뒤로 발소리가 하나 따라왔다.

“윈스턴 영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리키온이었 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있었 지. 리키온이 황급히 내 앞까지 다 가왔다.

“길베르트 백작과 단독으로 계약을 맺으시다니. 엄청난 성과를 올리셨 습니다, 영애.”

“뭘요. 감사해요. 축하해주시려고 부르신 건가요?”

“ 아.”

리키온의 시선이 당황한 듯 흔들렸 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지? 분명 뭔가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 기는 하는데.

꽤 한참동안 안절부절못하던 리키 온이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애의 목적을 이루신 것 같아 축하드리고 싶었습니다.”

“흐음……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저, 전부입니다.”

“흠. 뭐. 그래요.”

그게 전부인 건 아닌 것 같지만, 이야기하기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 향수를 드린 지도 꽤 되었군요. 머지않아 뵈러 가야겠어요.”

리키온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영애?”

“음? 네. 원래 전하와는 직접 만나

서 향을 전해주기로 계약한걸요.”

“감사합니다, 영애!”

뭐가 감사하다는 거지?

나는 의아한 눈으로 리키온을 바라 보았다. 오늘따라 이 보좌관의 상태 가 좀 이상했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영애!”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키 온.”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들어가십 시오!”

과한 그의 반응에 나는 풋 웃곤 에른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의외의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하늘색, 노란색, 분홍색, 연두색. 색색깔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들 이 내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 다.

“…얘들아?”

내 목소리에 네 명의 소녀들이 일 제히 고개를 돌렸다.

날 발견하자마자 소녀들의 얼굴이 조명을 켠 듯 화사해졌다.

“아리엘 님!”

“오셨군요! 기다렸어요!”

소녀들이 내게로 조르르 달려왔다. 나는 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 다.

“웨, 웬일이니?”

“아이, 참! 일이 있어야 아리엘 님 을 보러 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요!”

기분 탓일까?

어쩐지 소녀들이 저번보다 더 서슴 없이 내게 감겨오는 기분이 들었다.

릴리가 입을 열었다.

“사실,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거기도 해요.”

“그래? 무슨 말인데?”

“그게요, 아리엘 님.”

루나가 눈을 반짝거 렸다.

“저희, 개업 파티 열어요.”

“……응?”

무슨 파티?

예상치 못한 단어에 눈을 끔뻑이자 루나가 두 손을 모았다.

“이렇게 훌륭한 가게를 여셔놓고 아직 개업 파티도 하지 않으셨다면 서요! 요란하게 축하를 해야 앞으로

일도 더 술술 잘 풀리는 법이라고 요!”

“지금도 이미 술술 잘 풀리고 계시 긴 하지만요.”

“기쁜 일은 다같이 파티를 열어서 축하해야죠!”

개업 파티라니…… 뒷골이 당겨왔 다.

파티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과 함께 파티를 연다면 더 없이 요란하고, 기 빨리는 파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준비는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게 요. 아리엘 님은 몸만 오시면 돼요! 허락해 주세요, 네?”

“네? 네?”

“……하아아.”

나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그래, 뭐. 나쁜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간절히 부탁 해오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 다. 그까짓 개업 파티가 뭐라고. 한 번 해 주지. 뭐.

“그래. 좋아. 하자, 해. 개업 파티.”

“와아아! 정말이시죠, 아리엘 님!”

“저희가 완벽하게 준비해 놓을게 요!”

“역사에 길이 남을 파티가 될 거예 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 는데.

벌써 기가 빨리기 시작한 나는 어 색한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답을 얻어낸 소녀들이 저녁 도 함께 먹자며 졸랐지만, 나는 고 개를 저었다.

“미안해.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 서.”

소녀들이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놓 아주었다.

나는 가게를 간단히 점검만 하고, 리나에게 몇 시간만 더 부탁한다고 이야기한 뒤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번엔 어디로 가십니까, 아가 씨?”

에른이 묻자, 나는 간단히 답했다.

“에반스 공작저요.”

갑작스러운 방문이긴 했지만, 왠지 오늘 꼭 가야할 것만 같았다.

아까 만났던 리키온의 반응도 그렇 고, 요즘 내가 너무 세드릭을 방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세드릭 에반 스가 얼마나 개복치 같은 존잰데.

특정한 향을 오랫동안 못 맡으면 폭주해버린다니, 세상에 개복치도 그런 개복치가 없었다.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분간 개

복치의 담당의사가 된 입장이니 주 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해줘야만 했 다. 그래. 요즘 내가 좀 의무를 소 홀히하긴 했지.

공작저에 도착해서 방문을 알리자, 좀 전에 만났던 리키온이 튀어나왔 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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