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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8화 (28/153)

〈28 화〉

“아리엘 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단골 꽃집의 사장 라파엘 에드 먼드였다.

이렇게 대놓고 날 아는 척해도 되 나?

케니언과는 딴판인 반응에 나는 얼

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라파엘 씨, 안녕하세요.”

“아리엘 님! 안 그래도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아실지도 모르 겠습니다만, 매그너스 남작이 이 근 방 꽃집을 모두 돌면서……『

“아리엘 윈스턴과는 더 이상 거래 하지 말라. 그렇게 협박하던가요?”

“네, 네. 정확합니다, 레이디!”

라파엘의 투명한 피부가 약간 붉어 져 있었다. 답지 않게 흥분한 모양 이었다.

“라파엘 씨에겐 찾아오지 않았나 요?”

“아, 제게도 협박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이 쑥스러운 듯 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손님을 배신하는 짓은 할 수 가 없어서요.”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감사하네요. 하지만 이 거리에 라 파엘 씨와 같은 분은 없나 봐요. 당 장 아칼리 꽃이 급한데 아무도 제게 팔지 않으려 하더라고요.”

“아, 그 꽃은 저희 가게에서 취급 하지 않는 종류인데……

라파엘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몹 시 미안한 모양이었다.

“워낙 희귀한 꽃이니까요. 취급하 는 곳이 드물 수밖에 없죠.”

“그래도, 하필 이럴 때 아리엘 님 께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하다 니…… 앞으로 매그너스 남작의 가 게엔 단 한 송이의 꽃도 안 팔겠습 니다.”

“어머, 엄청난 각오네요. 감사해요. 하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그너스 남작은 화장품 사업 쪽의 유통망을 단단히 쥐고 있는 인물이 었다. 라파엘까지 나와 매그너스의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 일은 제가 직접 담판을 지을 거니까요.”

“매그너스 남작에게 찾아가실 건가 요?”

“음,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매그너스에게 직접 찾아가 따진다 하더라도, 그 녀석은 뻔뻔하게 오리 발이나 내밀 것이다. 자신이 그랬다 는 증거가 있느냐며 얄밉게 내 복장 만 뒤집어 놓겠지.

지금쯤 가게 안에서 내가 방문하기 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날 약 올

릴 준비를 단단히 해놓고서. 결과가 뻔한데, 굳이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었다.

“질 낮은 싸움을 벌이고 싶진 않아 요. 전 그 사람과 똑같은 수준이 아 니니까.”

“당연한 말씀이세요. 그런데 남작 을 찾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예 정이신지……?”

“꽃집 주인들이 매그너스가 무서워 절 상대하지 않으려 하는 거라면, 담이 센 사람을 찾아가야죠.”

“담이 센……?”

“네. 매그너스 따윈 두려워하지 않 을 만큼 힘이 있고, 제게 아칼리 꽃 역시 조달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런 사람이 이 제도에 여럿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명 정도, 내 머릿속에 떠 오르는 인물은 있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 설마!”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길베르트 대상단이라면……?”

서방 왕국과 사막을 거쳐 직접 교 역하는 길베르트 대상단.

대상단으로 분류되는 규모의 상단 중, 서방 왕국과 직접 거래하는 것 은 길베르트의 상단이 유일했다.

즉, 그곳과 거래만 틀 수 있다면 품질 좋기로 유명한 서방 왕국의 희 귀 허브들과 아칼리 꽃을 원하는 만 큼 수급해올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렇게 거대한 상단이 나 를 상대해줄까 하는 점이지만.’

“에른. 일단 마차를 불러줘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리엘 님, 돌아가시는 건가요?”

라파엘이 의아한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나는 라파엘을 향해 웃어 보였다.

“담판을 짓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려고요.”

나는 일이 잘 풀리면 연락을 주기 로 약속한 뒤 라파엘의 꽃집을 떠났 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아가씨?”

에른이 물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 다.

“정보 길드요.”

예상외의 대답이었던 듯 에른이 한 순간 멈칫했지만, 곧 언제 망설였냐 는 듯 곧장 나를 에스코트했다.

제도 경계의 막사를 찾아간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막 사막 횡단을 마치고 온 참인지 길베르트 상단 소유의 낙타들이 여 기저기서 쉬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상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상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 다.

“길베르트 상단주님을 만나고 싶은 데요.”

“상단주님을? 아가씨가?”

상인이 의아한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 만…… 일단 상단주님은 저쪽 막사 에서 쉬고 계시오. 안내해 드리지.”

상인은 제도에서 보기 힘든 투박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은근히 친절 했다. 상인을 뒤따라간 나는 얼마 안 있어 거대한 막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단주님께서 아가씨를 상대해주 실지는 모르겠지만, 뭐, 일단 들어가 보시오.”

막사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당한 미소를 걸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윈스턴 백작가 의 아리엘입니다. 상단주님은 안에 계신가요?”

내 이름을 들은 문지기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고민하던 문지기들은 곧 내게 문을 열어 주기를 택했다.

막사 안은 겉보기와 달리 호화로웠 다.

상아, 가넷, 양탄자. 서방 왕국의 진귀한 보물들이 잡동사니처럼 이곳 저곳에 쌓여 있었다. 곧 나는 막사 의 가장 끝에서 두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막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두른 두꺼운 터번과 잘 그을린 피부가 인 상적이 었다.

독수리처럼 형형한 눈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아마 이 상단 의 주인, 제이나 길베르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 응?’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익숙한 사람인데?

그 익숙한 인영이 무심코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벌떡 몸을 일 으켰다.

“윈스턴 영애!”

세드릭의 보좌관. 리키온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곤 너무 놀라 실수했다는 듯 민망한 표정을 지었 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리키온 씨?”

“영애께선 누구신지? 어떻게 오셨

소?”

나를 발견한 제이나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는 리키온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 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길베르트 님. 윈 스턴 백작가의 아리엘이라고 합니 다.”

“윈스턴 가의…… 흐음, 그렇군. 나 를 찾아 오신 용건은?”

“저와 거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본론을 꺼내자, 제이나가 흐 음, 하고 턱을 괴었다.

그녀의 무심한 눈동자에 희미한 흥 미가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리키온은 깜짝 놀란 듯 입을 조그맣 게 벌리고 나와 제이나를 번갈아 쳐 다보았다.

“내가 레이디와 계약까지 맺어가며 거래를 터야 할 이유가 있소?”

“요즘 화장품 산업에 관심을 보이 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이나 님.”

놀란 듯 제이나의 미간이 좁아졌 다.

상단에 찾아오기 전 나는 최대한의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마도학이 눈 부시게 발달한 지금, 화장품 산업 역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이나 길베르트 같은 거상 마저도 충분히 탐낼 정도로.

그러나.

“하지만 지금 화장품 산업은 매그 너스 남작이 유통망을 꽉 쥐고 있는 상황이지요. 비록 매그너스 가문이 길베르트 상단에 비해 그 힘이 약소 하다고는 하나, 선발주자로서 단단

히 자리잡은 이상 제 아무리 길베르 트 상단이라고 하더라도 영향력을 넓히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 매그너스 남작이 지금 열을 올 리고 있는 게 바로 향수 산업입니 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 력을 기울이고 있지요. 하지만, 제이 나 님.”

나는 양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짜는 진짜를 상대할 수 없는 법

이죠.”

“……가짜와 진짜라니?”

“매그너스 남작은 제 아이디어를 훔쳐가 그것을 토대로 향수 산업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즉 가짜에 불과하죠.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 국은 아이디어의 주인인 절 이길 수 없을 겁니다.”

“……흐음, 사실 일전에 영애의 이 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생각에 잠긴 듯 잔을 한 번 기울 인 제이나가 말했다.

“영애가 만든 향수가 독특하다며 사교계에서 제법 입소문이 나 있다 고 하더군. 하지만 이제 보니 향수 실력이 아니라 말솜씨로 평판이 자 자했던 게 아닐까 싶어.”

“향수 실력 쪽도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제이 나 님.”

나는 제이나가 있는 방향으로 몇 발짝 움직였다.

그리곤 살짝 허리를 기울여 제이나 와 가까워졌다. 제이나의 강인해 보 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마주보았다.

살짝 숨결을 들이마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독특한 체향을 가지고 계시네요, 제이나 님.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주판을 두드리는 상인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검사에 어울리는 향이었 다.

예상외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녀 에게 어울리는 향수가 없는 것은 아 니었다.

나는 가져온 파우치를 열어 그 안 에서 작은 향수병 하나를 꺼냈다.

흠 하나 없이 깨끗한, 투명한 물방 울 모양의 향수병이었다.

“제이나 님의 체향이라면, 이 향수 가 적합할 것 같아요.”

“……향수?”

“실례지만, 스케론 사냥이 취미시 라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스케론들 은 냄새에 무척이나 민감하지요.”

스케론은 심심하면 들로 내려와 작 물을 상하게 하는 유해조수이지만, 후각이 민감해 사냥이 쉽지 않았다. 특히 사람의 체향에 민감했다.

냄새 없는 유령만이 스케론을 사냥 할 수 있을 거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제이나처럼 독특하고 강한 체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분명 스케 론 사냥에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이 다.

‘-라는 게, 정보길드에서 구입한 정보였지.’

톡톡히 돈값을 했으면 좋겠는데.

제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영애가 거기에 어떤 도움 을 줄 수 있다는 것이오?”

“이 향수는 제이나 님의 체향을 깨 끗이 없애드릴 수 있답니다.”

제이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마주보 았다.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스케론 사냥꾼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제이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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