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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7화 (27/153)

〈27 화〉

“저, 아, 아리엘 님……,죄송해요. 어제 민폐를 끼쳐서……/

“응? 무슨 소리야. 침대 한 편 내 준 것밖에 없는걸. 얼굴빛이 어제보 다 훨씬 좋아보여서 나도 마음이 좋 네, 사샤.”

“아, 감사합니다……!”

사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리 엘이 빙긋 웃었다.

“음, 슬슬 점심이나 먹으려던 참이 었는데. 너도 같이 먹고 갈래?”

“그,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지.”

싱겁다는 듯 아리엘이 씩 웃자, 사 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일어나자마자 쫓 아왔던 향기가 바로 그녀의 것이었 으으

I그 그그

좋은 냄새.’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사람을 꼭 안아주는 듯한 향기.

아리엘에게서 원래 이런 냄새가 났 던가? 사샤는 알 수 없었다.

사샤의 친구들과 아리엘은 사실 무 척이나 피상적인 관계였다.

아리엘은 나쁜 짓을 할 때 도울 일손이 필요했고, 사샤와 친구들은 뒷받쳐줄 사교계 선배가 필요했다.

즉, 이해관계가 맞아 어울려 다닐 뿐, 데면데면한 관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썩 이해타산이 잘 맞는 관계였으

나,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분명 아리엘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나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웃는 아리엘은, 아름답게 미소짓 는 아리엘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샤? 왜 그래? 아까부터 말없 이.”

아리엘이 희한하다는 듯 또 픽 미 소를 지었다.

사샤는 푹 고개를 숙였다. 형편없 이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이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아직 졸리니?”

아리엘이 그런 사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붕붕 내젓는 일뿐이었 다.

딸랑.

종 울리는 소리에 나는 반짝 고개 를 돌렸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오 늘 오후는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

다. 오래간만에 울리는 종이었다.

좋아, 최선을 다해 응대해야지. 그 런 각오를 하며 마주한 손님은, 삼 십대 정도의 남성이었다.

“그…… 여기가 향수 가게요?”

“네, 어서 오세요. 향수는 처음이신 가요?”

“그렇소. 혹시, 그런 건 없습니까? 맡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향.”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기는 전부 맡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원하시는 걸 좀 더 구체적으로 설 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좀 우울한 것도 싹 내 려가고…… 잠도 잘 오는 그런 향 말이오.”

아하.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마침 얼마 전 기분 전환 용으로 만든 향수가 하나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남자를 서쪽 선반 세 번째 열로 데려갔다. 거기엔 곰 모양의 향수병이 놓여 있었다.

〈포근한 기억〉. 이 향수의 이름이 었다.

나는 곰돌이의 머리 위에 얹힌 잠 옷 모자 모양 뚜껑을 돌려 열었다.

“시향해 보세요, 손님.”

남자가 익숙지 않은 얼굴로 시향지 에 코를 가져다댔다. 냄새를 맡는 듯 남자의 콧망울이 움찔댔다.

다음 순간, 남자의 얼굴이 한여름

아이 스크림 처 럼 녹아내 렸다.

“이거, 그래…… 바로 이거요! 잡 생각은 다 녹여버리는 향기!”

남자가 활짝 웃었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오늘도 한 손님을 향의 세계로 인도 했군.

“한 병 주시오! 아니, 두 병! 아니!

세 병 주시오!”

“네, 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긋 웃으며 대답한 나는, 선반 뒤 를 더듬다가 곧 동작을 멈췄다.

‘어라…… 이거, 샘플 외엔 안 만 들어 뒀던가?’

맙소사, 그랬었지!

나는 내 이마를 찰싹 쳤다.

그제야 그저께 이 향수의 재고를 만들어둬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몹시 수치스 러웠다. 나는 주먹을 꾹 쥐고 부들

부들 떨었다.

“왜 그러시오?”

“죄송합니다. 손님. 공교롭게도 재 고가 똑 떨어져서요. 내일 다시 들 러주실 수 있나요?”

“아…… 오늘은 구입이 힘든 건 가?”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 다. 억장이 무너졌다. 내 하찮은 실 수 때문에 손님의 니즈를 만족시키 지 못하다니. 심지어 오늘 막 향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려던 손님을!

남자를 돌려보내자마자 나는 쏜살 같이 마차를 불렀다. 행선지는 꽃집 이 밀집해 있는 세논 지구 7번가였 다.

〈포근한 기억〉에는 몇 가지 독특 한 재료들이 들어간다. 그중 하나는 저 멀리 서쪽 사막에서만 핀다는 선 인장 ‘아칼리’의 꽃이었는데, 희귀한 편이라 구비해 놓은 꽃집이 많지는 않았다.

‘전에 아칼리 꽃을 팔았던 곳이 분 명 이 화원이었지.’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화원을 올 려다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가능한 한 많이 구매해서 쟁여 놔야지.

아칼리 꽃은 값비싼 재료긴 했으나 난 그런 것엔 크게 연연하지 않았 다. 세드릭이 투자금으로 쾌척했던 금화들이 아직 금고 안에 꽤 넉넉히 쌓여 있었으니까.

몇 송이 사지. 열? 스물? 그 이상 보관해 놨다간 신선도가 떨어지겠 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화원 안으 로 발을 들였다.

“환영합니다, 손님! 어떻게 도와드 릴……/

몇 번 거래한 적이 있는 가게 주 인이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본 가게 주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왜 저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가게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아칼 리 꽃을 좀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안 팝니다.”

“전에 구입했던 게 품질이 참 좋 았…… 응? 네? 뭐라고 하셨죠?”

“안 팔아요. 지금은 아칼리 꽃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제 눈에 뻔히 보이는 저 꽃 이 다 팔렸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 시겠죠.”

새빨간 아칼리 꽃이 내 시선에 들 어 왔다.

나는 그 선명한 색채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가게 주인이 움찔 하더니 팔짱을 꼈다.

“아무튼, 못 팔아요. 나가 주십쇼.”

나는 기막힌 얼굴로 가게 주인을 노려보았다.

내 착각일까? 주인의 얼굴에는 강 한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불안감도 엿보였

다.

‘나 참, 별 수모를 다 겪겠군.’

뭐, 됐어. 나도 나 싫다는 사람한 테 굳이 금화를 쥐여주고 싶진 않 아.

가게 주인의 태도가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난 순순히 화원에서 나가 주었다.

꽃집이 세상천지에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다신 오지 마시오!”

가게 주인이 그렇게 외치며 문을 쾅 닫았다. 리나가 씩씩댔다.

“뭐예요, 저 인간?! 정신이 나간 거 아냐? 감히 아가씨한테! 흥, 아 가씨! 저희 다신 여기 오지 말아 요!”

“그래, 안 오면 되지, 뭐. 진정해, 리나. 난 괜찮으니까.”

나는 어른스러운 척 리나를 달랬 다. 사실 정말 그다지 화가 안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

면 화도 안 난다는 말이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로 들른 화원에서도 퇴짜를 맞았을 때.

나는 뭔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 다.

“나가 주시오!”

네 번째 꽃집 주인이 그렇게 외치 며 문을 닫으려 했다.

나는 닫히려는 문 사이로 손을 밀 어 넣었다.

“꺄악! 아가씨!”

놀란 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문 사이에 손 을 찧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문을 지탱한 나는, 문틈으로 가게 주인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실례지만, 케니언 씨.”

꽃집 주인 케니언이 어깨를 움찔 굳혔다.

나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저도 절 문전박대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긴 싫지만, 이번만큼은 예외 로 해야겠군요.”

“여,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아니, 똑바로 대답해주셔야겠어요, 케니언 씨.”

케니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 다.

그는 운이 없었다.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이기만 했어도 그냥 오물 밟

은 셈 치고 넘어갔을지 모르는데.

난 네 번이나 이유 없는 불친절을 당하고도 머리만 긁적거리고 넘어갈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부러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물었다.

“누구죠? 감히 나 아리엘 윈스턴을 문전박대하라고 사주한 사람이.”

케니언의 시선이 흔들렸다.

“일단 이것부터 놓으시고……/

“놓으면 닫을 거잖아요, 문.”

뒤에서 절그럭거리며 강철 그리브 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에른이 문을 열어젖 혔다. 케니언이 마른 장작처럼 힘없 이 문과 함께 밀려났다.

케니언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에른 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애께선 물론 좋은 손님이시지 만, 손님 하나 때문에 장사를 망칠 수 없는 저희 입장도 생각을 좀 해 주십……

“장사를 망치다니?”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사를 왜 망친다는 거죠?”

케니언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나 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 다.

“저를 손님으로 받으면, 누가 당신 의 장사를 망쳐 버리겠다고 협박이 라도 하던가요?”

정답인 모양이었다. 케니언의 얼굴 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게…… 그러니까…… 으윽, 죄 송합니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 요!”

케니언이 불안한 눈으로 문 너머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감시라도 하고 있을까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하아,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사람을 더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케니언이 협박당하고 있다면, 여기 서 더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결국, 나는 불쌍하리만치 몸을 떨 어대는 케니언을 놔주고 네 번째 꽃 집에서 나왔다.

‘누군가 내 가게를 망치려고 작정 한 모양이네.’

꽃은 향수의 주된 재료 중 하나다.

꽃의 수급이 어려워진다는 건 곧 향수 장사가 뿌리부터 위태로워진다 는 의미였다.

이거 골치 아프네.

‘손 좀 많이 썼구나.’

고생했네, 폰타 매그너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게 악 감정을 품고 향수 사업을 방해할 사 람이라면 역시 그 자식뿐이었다.

이쯤 되니 매그너스 남작에게 고마 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렇게까지 온 갖 수단을 동원해서 나를 방해하는 걸 보면 날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럼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줘 야지;

매그너스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었 다. 그리고 나는 걸어온 싸움은 절 대 피하지 않는 주의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의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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