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나는 몸을 약간 당겨 사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분홍색 핏발이 선 흰자위. 기운 없 이 회빛으로 죽은 피부색. 하얗게 튼 입술까지.
“사샤. 잠을 잘 못 자니?”
나는 조용히 물었다.
사샤가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즈 리더니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거렸 다.
“……네. 잘 못 자요.”
“로미나 양이 놀린 뒤로는 더 심해 졌대요.”
“그렇구나. 증상이 생긴 지는 얼마 나 되었고?”
“한, 한 오 년 정도……
사샤가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여태 내게서 한 번도 이런 질문은 들어본 적 없는 듯 당황스러워 보였
다.
“오 년. 힘들었겠구나. 진찰은 받아 봤니?”
“아, 아뇨. 저희 아버지는 근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무용 교습만 두 배로 늘리셨어요. 그런데 몸만 피곤해질 뿐이지 잠이 안 오는 건 그대로라서……
“당연하지. 불면증이 그렇게 간단 히 개선되는 거였다면 병이라 불리 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란 사람도 참 무심하지. 안 그래도 힘들 애를 더 시달리게 만들 다니. 그의 괴상한 처방은 오히려 사샤의 상태를 더 악화시켰을 게 틀 림 없었다.
“그럼 약 같은 건 한 번도 처방받 아본 적 없는 거지?”
“네, 네에……/
“그래. 잘됐네.”
“네?”
내성이 전혀 없다는 얘기니까.
나는 몸을 일으켜 북쪽 선반 쪽으
로 향했다. 그리곤 빼곡히 들어찬 향수병 중에서 알맞은 것을 찾아냈 다.
‘제대로 된 수면 향은 아니지만.’
‘수면향’은 아직 본격적으로 개발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만들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하지만 안정 효과가 있는 향수로도 한계까지 몰린 사샤에겐 효과가 있 을 듯했다.
나는 다시 소녀들에게로 돌아갔다. 소녀들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내 일 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사샤에게 향수병을 내밀었다.
“자, 사샤. 뿌리렴.”
“어어……
“카모마일과 라벤더, 살비아, 레몬 밤을 섞은 거야. 긴장이 해소되고 신경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어.”
“정말 써도 될까요?”
사샤가 겁먹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픽 웃었다.
“써도 되니까 마음껏 뿌리렴.”
“네, 네……!”
사샤가 조심스레 내가 내민 향수병 을 받아들었다. 오랜 불면으로 떨리 는 작은 손이 조심조심 향수를 분사 했다.
나머지 소녀들이 동그란 눈으로 사 샤를 지켜보았다.
“사샤, 어때?”
릴리가 물었다. 사샤가 천천히 눈 을 깜빡거리며 릴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응, 냄새가 되게 좋아. 향긋하면서 도 상큼하고, 엄청 맛있는 레몬 케 이크…… 처럼…… 기분 좋……/
“사샤?”
사샤의 눈꺼풀이 나른히 감겼다.
내 어깨 위로 미미한 무게감이 얹 혔다. 나는 빙긋 웃으며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든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사샤? 사샤! 괜찮아?”
“쉿, 괜찮아. 잠든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사샤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색, 색.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손가락에서 숨이 느껴졌다. 나는 살 짝 웃으며 말했다.
“응, 자고 있어.”
“네에에?”
소녀들이 합창했다. 아주 작은 목 소리로.
“이렇게 순식간에…… 기, 기절한 거 아니에요?”
“아냐, 숨소리를 들어보니 잠든 게 확실해.”
“세상에사샤, 사흘째 한숨도 못 잤다고 했는데……/
릴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그러다가 쓰러진다고, 우리 가 의사를 불러줄 테니까 빨리 진찰 을 받자고 해도 아버지께 걸리면 큰 일 난다면서 한사코 거절해서 얼마
나 걱정했는데……/
폭 한숨을 내쉰 릴리가 나를 바라 보았다.
“아리엘 님, 감사해요. 사샤를 잠시 나마 자게 해 주셔서요. 저희가 업 어서라도 데려갈게요.”
“응? 아냐. 여기도 침대 있어. 오 늘 여기서 재우고 보내지 뭐.”
“네? 정말요, 아리엘 님?”
루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가 깨지 않을
만큼만 살짝.
“일하다 쉬는 용으로 들인 거라 그 렇게 크고 좋은 침대는 아니지 만…… 하룻밤 자는 정도로는 그럭 저럭 괜찮을 거야. 내일은 내가 집 까지 마차 태워 보낼게.”
“그렇게 해 주시면 안심이 되긴 하 지만……『
“그럼 됐네. 오늘 밤은 여기서 재 우는 걸로 할게.”
“앗, 가, 감사합니다!”
소녀들이 내게 감사 인사를 속삭였
다.
목소리를 낮추곤 있어도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이 떠들고 있으니 꽤 소란 스러울 텐데, 사샤는 여전히 새액새 액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 에 빠져 있었다.
나는 소녀들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결정됐으니까 너희도 슬슬 돌아가 봐. 시간이 많이 늦었어.”
“네, 아리엘 님.”
“저희 먼저 돌아가 볼게요.”
“그래. 일단 얘를 좀 눕혀야겠다.
음, 내가 안고 옮기기는 좀 무리 고……,”
나는 에른을 돌아보았다. 부탁하기 도 전에 에른이 금세 다가오더니 천 천히 사샤를 안아 들었다.
“우웅……,”
차가운 갑옷에 안기자 사샤가 뒤척 이며 베개를 껴안듯 에른에게 매달 렸다. 갑옷 너머로 에른의 곤혹스러 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안정된 자세로 사샤를 휴게실까지
안아 옮겼다.
“아리엘 님, 저 분은 누구세요?”
에른을 가리키며 에일린이 속삭였 다.
나는 애매한 미소를 걸쳤다.
“으음, 뭐…… 날 호위해주시는 분.”
“헉, 호위 기사라니! 윈스턴 백작 님이 아리엘 님을 정말 끔찍이 위하 시나 봐요!”
“아니, 뭐, 그래서라기보다…… 흠,
흠. 자, 더 늦기 전에 돌아가 보렴. 얘들아.”
“네!”
나는 서둘러 소녀들을 문밖으로 내 보내려 했다.
릴리가 멈칫 나를 돌아보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샤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아리엘 님!”
아니, 또 올 것까지는……,
나는 삐걱대는 미소로 소녀들을 배 웅했다.
곧 어디선가 마차들이 나타나 소녀 들을 한 명씩 태우고 떠나갔다.
달도 뜨지 않은 깊은 밤.
한 남자가 헐떡이며 어두운 골목을 내달렸다.
필사적으로 달리는 남자의 그림자 뒤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따라붙었 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비정상적인 속도로.
“으아악!”
단검이 남자의 어깨로 날아와 꽂혔 다. 남자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무 너져 내렸다.
쓰러진 남자의 뒤통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녕, 쥐새끼.”
검은 인영이 검끝으로 남자의 턱을 들어올렸다.
남자는 벌벌 떨며 강제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두 눈 위로 공포가 가득 들어찼다.
“주, 죽여라. 세드릭 에반스, 그냥 나를 죽……/
“아니. 간단히 죽일 거면 이 빌어 먹을 술래잡기 놀이를 안 했지.”
칼끝이 남자의 목을 긁어내렸다. 얇은 핏줄기가 남자의 목을 타고 흘 렀다.
세드릭 에반스가 입술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
을 만큼 낮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 왔다.
“누구지? 네게 아리엘 윈스턴을 미 행하라 시킨 게.”
“죽여라!”
“질문에 맞는 대답이 아닌데.”
세드릭이 고개를 까딱였다.
“손이 많이 가는 친구군.”
챙그랑.
검을 집어던진 세드릭이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비참한 비명이 길고 짧게 여러 번 울려퍼졌다.
리키온은 눈꺼풀을 떨면서도 도망 치지 않고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았 다.
잠시 뒤, 알고 있는 - 정보를 모두 뱉고 축 늘어진 남자가 더러운 바닥 위로 허물어졌다.
리키온이 얼른 세드릭에게로 다가 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재스퍼! 어
서 전하께 약을!”
“필요 없어. 그리고 너, 내가 환자 취급 집어치우라고 했지.”
피에 젖은 단도를 갈무리하며 세드 릭이 투덜거렸다.
재스퍼가 얼른 달려오려다 멈칫했 다. 리키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닉시아 향도 괜찮으십니까, 전 하?”
“괜찮아.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걸까. 피를 많이 보셨
는데. 리키온이 안절부절못하며 세 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졸업은 해야지.”
“네? 무슨……/
“아니야, 아무것도. 돌아간다.”
“넵, 전하!”
세드릭이 등을 돌리자, 리키온과 재스퍼가 얼른 그 뒤로 따라붙었다.
쏘호 쏘
사샤는 코를 움찔거렸다. 기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살짝 맡았을 뿐인데도 향기가 콧속 을 타고 흘러들어와 온몸을 도는 것 만 같았다.
아침 바람처럼 부드럽고, 새의 지 저귐처럼 상쾌하면서도, 새벽이슬처 럼 청량한,
이게 대체 뭐지? 사샤는 결국 천 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나른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본 숙면은 지나치리만큼 달콤했 다. 영원히 이 푹신한 침대에서 일
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기분이라 면 정말 영원히라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침대의 유혹보다도 사샤를 더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대체 무얼까. 이 향기의 정체는.
사샤는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 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는 햇살 이 눈부시게 창을 타고 들어왔다. 사샤는 눈을 끔뻑였다. 여기가 어디 였더라?
조심스레 닫혀 있던 문을 열자마 자, 사샤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꺄아악!”
때마침 문 앞을 지나가고 있던 갑 옷 입은 남자가 그 비명에 발을 멈 췄다.
자기 키의 두 배는 될 듯이 거대 한 갑옷 기사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사샤는 몸을 벌벌 떨었다.
“사, 사, 사, 살려주세요!”
갑옷 기사가 대답 대신 어딘가를 가리켰다. 사샤는 훌쩍이면서도 갑 옷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걸어갈수록 내내 사샤를 유혹했던 그 향기가 점점 더 진해져갔다. 사 샤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점점 가 시기 시작했다.
마침내 계단을 마저 내려간 순간.
“아……,”
사샤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 다.
따사로운 오전의 햇살이 벌꿀색 머 리칼 위로 내리쬈다. 인기척을 느꼈 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처
럼 투명한 청록색 눈동자에 사샤가 가득 담겼다.
“어라, 사샤. 일어났구나?”
아리엘이 눈꼬리를 접으며 말했다.
“몸은 좀 괜찮아? 잠은 푹 잤고?”
“아, 네, 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숙면했어요.”
사샤는 그제야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리엘이 건넨 향을 들이마시자마 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었지.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디에 기대 잠 이 들었는지 떠올린 사샤는 볼을 새 빨갛게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