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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5화 (25/153)

〈25 화〉

“전하, 아닉시아 향을 납품드린 지 가 꽤 되었는데 괜찮으신가요?”

“아하, 아직 기억하고 계셔주셨군 요. 그 계약.”

“……비꼬시는 거죠. 기일이 지난 건 알아요. 제가 먼저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도 했고, 그간 아닉시아 향이 떨어

질 때마다 세드릭이 닦달했기에 크 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설 마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아닙니다. 아직은 필요하지 않아 서 연락을 드리지 않았던 것뿐이니 까.”

“ 정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으로 세드릭을 만난 지도 벌 써 보름이 지났다. 저번에 건넸던 아닉시아 향은 이미 모두 사용했을 것이었다.

“잘 사용하지 않으셨나 봐요. 요즘 은 조금 괜찮아지신 건가요?”

“뭐, 그럴지도요.”

세드릭이 노골적으로 대답을 얼버 무렸다. 나는 미간을 좁혔으나, 세드 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좋은 가게군요. 레이디 의 노고가 느껴집니다.”

“갑작스러운 칭찬 감사해요. 투자 금은 빠른 시일 내에…… 으음, 그 러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회수

하실 수 있도록 할게요.”

나는 양심껏 중간에 말을 바꿨다.

장사가 아무리 잘 된다 해도 거액 의 투자금을 순식간에 갚는 건 불가 능한 일이었다.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부담을 가지실 필욘 없지만. 번창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해요.”

세드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것도, 헛웃음도 아닌, 그에 게선 드물게 볼 수 있는 4진짜 미 소’였다. 비록 보일 듯 말 듯 흐릿 하기는 했지만.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 하.”

세드릭이 등을 돌리자, 에른이 반 사적으로 세드릭을 따라나섰다.

세드릭이 에른을 쳐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 곁에 꼭 붙어 있어야지, 에른. ……그리고.”

세드릭이 에른을 향해 낮은 목소리 로 속삭였다.

갑옷 너머로 잘도 그 낮은 데시벨 을 알아들었는지, 에른이 고개를 끄 덕였다. 둘은 잠시 무슨 대화를 주 고받았다. 귀를 쫑긋 세워도 내게까 지는 들리지 않았다.

곧 비밀 대화를 마친 세드릭이 내 게 눈인사를 하곤 가게를 나섰다.

커다랗던 존재감이 사라지자, 향수 가게가 아까보다 넓어진 것 같은 착

각이 들었다.

샤를로트와 세드릭이 다녀간 후, 첫날 겪었던 기묘한 불황은 해소되 었다.

하나둘 손님이 유입되자, 다른 사 람들 역시 경계심을 풀고 가게에 발 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직 성공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 만, 이 정도면 스타트로는 괜찮은 수준이었다.

“리나, 손님이 드문 시간대니까 조 금이라도 쉬어. 나 혼자 응대할게.”

“아니에요, 아가씨! 이 정도 피로 쯤은 아가씨의〈자양강장제〉를 맡 으면 금방 해소돼요. 아, 생각난 김 에 한 번 향을 맡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

“……안 돼. 너 그거 중독이야.”

〈자양강장제〉는 내가 리나와 처음 으로 만들었던 향수였다. 기력 상승 효과 때문에 리나를 폭주하게 만들 었던 그 향수.

배합법을 바꾼 후로 그때만큼 비정

상적인 효능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기력 회복에 톡톡히 효과를 볼 수 있는 향수였다.

물론, 몸에 나쁜 성분은 없기에 자 주 사용해도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리나는 좀 자제해야 할 필 요가 있었다. 중독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거야, 리나.

“흐 ”

리나가 슬픈 듯 어깨를 늘어뜨렸 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

다. 나는 리나의 등을 밀어 억지로 휴게실 안에 넣어놓았다.

“에른 경도, 덥지 않으세요? 잠깐 들어가서 쉬고 계셔도 되는데. 전하 껜 비밀로 할게요.”

“괜찮습니다.”

에른이 즉답했다. 나는 뺨을 긁적 였다. 참 충직한 기사님이라니까.

그때 은종이 울렸다.

“어서오세요! 아리엘의 향기 살롱 입니……『

“아리엘 님!”

“아리엘 님! 저희예요!”

꾀꼬리 합창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 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네 명의 소녀들이 공작새의 깃털처 럼 화려한 드레스를 두른 채 손을 흔들었다.

“여기가 아리엘 님의 가게로군요!

너무너무 예쁘고 좋아요!”

“이렇게 멋진 가게를 여셔놓고 어

떻게 저희 사이에 언질 한 번 안 주실 수가 있어요?”

“정말요! 아네트 양이 그것도 몰랐 냐고 저흴 얼마나 놀렸는데요! 저희 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소녀들이 내 앞에 몰려와선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한 번 더 뒷걸음질을 쳤다가 뒷꿈치를 선반에 부딪혔다.

“어, 얘들아…… 찾아와줬구나. 하 하하.”

“당연하죠! 아리엘 님이 무려 가게

를 여셨다는데 저희가 어떻게 안 와 봐요?!”

“개업 파티 때도 저횔 부르셨어야 죠!”

“정말요! 저희 말고 어떤 영애들과 재미나게 노신 건가요?! 저희들이 훨씬 더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데!”

“개업 파티, 안 했어. 안 했으니까 진정해.”

“네에?”

릴리가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저 러다 눈이 빠지진 않을까 싶어 손을 얼굴 밑에 받치고 싶을 정도였다.

릴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구실이 있는데 어떻게 파티를 안 열어요……?”

“……그러게 말이야. 일단은 들어 오렴. 얘들아.”

소녀들의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에 행인들의 시선이 이리로 쏠려있 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소녀들을 가게 안으로 들였다.

“네!”

소녀들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줄지 어 가게에 들어섰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가게 안을 점령하자 넓은 내 부가 조금 비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얘들아. 무슨 일이니?”

“아이, 아리엘 님. 꼭 저희가 용건 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사이인 것처 럼 말씀하시네요. 루나는 너무 속이 상해요.”

“귀여운 척하지 마, 루나.”

“딴지 걸지 마라, 에일린.”

두 소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닥겨 렸다. 그러더니 나를 다시 쳐다보곤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요, 아리엘 님께 드릴 말씀 이 있긴 해요.”

“그래. 뭔데? 말해보렴.”

나는 애써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에일린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저희, 로미나 영애 골탕 먹일 계 획을 거의 다 완성한 참이었잖아요.

실행은 언제 해요?”

“요즘 로미나 양이 아주 아주 건방 져졌거든요. 잘난 콧대를 꾹 눌러 줘야 해요!”

……응?

하하하.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어색 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너희의 천사 같은 외모 에 속아 포지션을 잠시 잊었었구나.

너희는 천사가 아니라 초파리 떼처 럼 날아다니며 주인공을 귀찮게 하 는 악역 무리였지.

“아리엘 님? 저희 계획 실행은 언 제예요?”

소녀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두 손을 모아 물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악녀들의 대장 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이라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어머나, 농담하시는 거죠, 아리엘 님?”

“아리엘 님 혼자 다 짜신 계획이면

서! 파슬리 향수를 이용해서 로미나 양이 짝사랑하는 렌달 영식 앞에서 눈물 콧물 다 쏟게 만들기로 했잖아 요!”

“……파슬리 향수라니?”

“아이, 참. 정말. 저희가 제대로 기 억하고 있는지 시험하시는 거죠? 로 미나 양에게 파슬리 알레르기가 있 잖아요. 그것도 엄청 심한 알레르기 요.”

“향수를 뿌리면 증거도 안 남을 테 니 몰래 로미나 양에게 칙칙 뿌리 면…… 후후후. 에일린, 전에 로미나 양이 실수로 파슬리 들어간 잉어찜 먹었을 때 어땠는지 봤지?”

“그럼, 그럼. 얼굴이 시뻘게져서 콧 물을 질질 흘렸었잖아? 정말 대단했 지.”

“그 꼴을 렌달 영식 앞에서도 보이 면…… 킥킥킥. 창피해서 한 달은 두문불출할걸?”

“아하하,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 다.”

소녀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곤 키득 거리며 웃었다.

등골로 짜릿한 소름이 내달렸다. 그래, 너희가 괜히 악녀 군단이 아 니었구나.

다행히 때마침 리나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자아, 일단 좀 먹으렴. 얘들아, 먹 고 생각하자.”

생각하긴 뭘 생각해.

차를 권한 건 이 아이들을 떨쳐낼 방법을 강구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 었다.

방법만 떠오르면 너흰 당장 퇴출이 다. 이 조그만 골칫거리들아.

“네에, 아리엘 님.”

쪼르르 나란히 접객실 소파에 앉은 소녀들이 각자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오독오독 시원찮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답답해 보여 나도 모르 게 채근하고야 말았다.

“팍팍 좀 먹으렴, 얘들아.”

“살찌는데……/

“그냥 먹어. 너희 나이엔 다 키로 가.”

“네에에.”

소녀들이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려 서 쿠키를 똑똑 부러뜨려 먹었다.

나는 그제야 편안히 찻잔을 들 수 있었다.

‘……얹힐 것 같아.’

나는 찻잔을 조용히 다시 내려놓았 다. 여덟 개의 눈이 나만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으니 따뜻한 찻물도 제 대로 내려가질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얘들아, 들어보니 로미나 영애에 게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은 데, 알레르기 환자를 그런 식으로 괴롭혔다간 죽을 수도 있어.”

“에이, 그 정도는 아리엘 님께서 조절하실 수 있잖아요.”

“……아니. 나는 안 할 거야.”

“헉, 조절을 안 하신다고요? 역시 아리엘 님께선 화끈하세요!”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소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겐 이 소녀들의 악역 놀이에 어 울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난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로미나 양을 괴롭히지 않을 거야.”

“네? 어째서요?”

소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나쁜 일이니까.”

“네에에? 하지만 로미나 양이 먼저 저횔 건드렸는걸요?”

“……어떤 식으로 건드렸는데?”

“제가 안짱다리라면서 놀렸어요! 에일린에겐 노래를 못 한다면서 비 웃었고, 얼마 전엔 사람들 앞에서 사샤에게 다크서클을 지적하기까지 했어요. 사샤가 다크서클 때문에 얼 마나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잘 알면 서!”

“사샤가 그날 무도회를 얼마나 손 꼽아 기다렸는데……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 했어요. 진짜 나쁜 애예요!”

“……다크서클?”

나는 사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분으로 가리려는 노 력이 엿보이긴 했으나 사샤의 눈가 아래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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