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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4화 (24/153)

〈24 화〉

호보 쑤

“안녕히 가세요, 손님. 또 뵈어요!”

“ 번창하세요.”

기운을 북돋워 주는 오렌지 향수와 잠이 잘 오는 라벤더 향수를 구입한 손님이 만족한 얼굴로 가게를 빠져 나갔다.

“우와, 드디어 손님이 멎었네요.”

리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 다.

“미안, 리나. 오늘 너무 힘들었지.”

나도 나와 리나, 두 명으로 이렇게 까지 빠듯할 줄은 몰랐다.

첫날은 성공적이었다. 꽤 많은 손 님들이 가게를 찾아주었고, 그 중 상당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향수를 사갔다.

그 많은 손님들을 단둘이서 상대해 야 했던 우리는, 늦은 오후 즈음이 되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에른이 가끔 자기도 도울 일이 있 겠냐 물었으나 그저 고개를 저었다. 덥지 않냐 설득해도 절대 갑옷을 안 벗는 남잔데, 건틀릿을 낀 손으로 향수병을 쥐었다가 무슨 사달이 날 줄 알고.

“아니에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 롯이 이룩해내신 가게에 제가 도움 을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 나 뿌듯한데요!”

내가 오롯이 이룩한 가게라니.

그 거창한 수식어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걸.

물론 아이디어는 내 것이었다. 가 장 중요한 상품들 역시 내가 개발한 것들이고. 가게 입지 선정, 리모델링 역시 내가 도맡아 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오롯이’ 이룩해 낸 거냐고 묻는다면 역시 양심에 찔 린단 말이지.

문득 투자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 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다. 아닉시아 향 은 아직 잘 쓰고 있을까?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모자라거나 문제가 있 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내며 리나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리나. 오늘 장사는 전부 네 덕분이야. 이번 달 봉급은 기대해도 좋……/

딸랑.

일레인 산 은종이 내는 아름다운 화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세요. 아리엘의 향기 살롱

말꼬리가 허공에서 뚝 잘렸다.

순식간에 공기가 색깔을 바꿨다.

온통 연한 파스텔톤인 가게에 홀로 새까만 남자가 발을 들였다. 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성마 저 흐릿한 초저녁에 이른 밤을 몰고 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이름입니까. 괜찮은 것 같군 요.”

“뭐,난 작명 센스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전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곤 뜻밖의 손님에게 다가갔다.

세드릭 에반스가 씩 미소를 지었 다.

“잘 지냈습니까?”

“정신없이 바쁘긴 했지만 잘 지냈 어요. 전하께선 여기까지 어쩐 일이 세요?”

“그냥 구경차 왔습니다.”

구, 구경?

나는 낯선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그는 제 말을 증명하듯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투자 자에게 평가받는 기분이 된 나는 침 을 꿀꺽 삼켰다.

세드릭이 향수 선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것이군요. 샤를로트가 침이 마 르도록 칭찬하던 향수가.”

세드릭이〈첫사랑의 법칙〉을 쥐었

다. 그의 손안에 있으니 안 그래도 작은 향수병이 한 입 거리처럼 조그 마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샤를로트와 세드 릭은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했지.

나는 무심코 물었다.

“친하신가 봐요, 샤를로트 양과.”

“그냥 부모님 대의 친분입니다. 단 둘이 시간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습 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뭐, 둘이 데면데면한 사이이든 절 친한 친구이든 나와 상관없는 문제 이긴 했다.

나는 예의상 물었다.

“시향해 보시겠어요?”

“안 그래도 시도하고 있는 중인 데.”

세드릭이 향수병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이거, 어떻게 여는 겁니까?”

“……네? 아, 아! 이리 주세요.”

나는 세드릭에게서 향수병을 건네 받았다. 간단히 뚜껑을 눌러 돌리자 손쉽게 병이 열렸다.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시향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시향 종이가 모두 떨어져 있었다.

‘이런, 안 채워 놓았던가?’

피곤한 나머지 나도, 리나도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잠깐 눈 좀 감아 보세요, 전하.”

“눈을?”

“네. 향수를 뿌려 드릴 테니까요.”

세드릭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까지 감아야 합니까?”

“어머, 당연하죠. 다른 감각은 모두 차단하고 오롯이 후각에만 집중하셔 야 하니까요.”

“다른 감각은 모두 차단하고.”

세드릭이 진지하게 되뇌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을 흘렸다.

“네, 후각에만 집중하시는 거예요.”

“검 끝에 마나를 모으는 느낌입니 까?”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아마 비 슷할지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느낌일걸요. 아마도.”

“좋습니다.”

세드릭이 눈을 감았다. 그리곤 어 쩐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십시오.”

“……네.”

뭐지, 이 남자. 왜 이렇게 진지해?

음,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시향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나 역시 처음 시향할 때는 세드릭 못지 않게 경건한 자세로 임하곤 했었다.

좋아, 세드릭 에반스. 의외로 향수 를 대하는 자세가 잘 되어 있군.

나는 그 못지않게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향수를 분사했다.

세드릭이 숨을 삼켰다. 그러곤 잠 시, 눈을 감은 채 미동도 보이지 않 았다.

나는 순간 긴장도 잊고 눈 감은 채 서 있는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집중한 듯 굳게 다물린 입매부터 강 인해 보이는 턱선까지. 신의 조각가 가 한칼에 내지른 듯 거침없으면서

도 섬세하고 완벽했다. 사람이 아니 라 정말 조각상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현실감 없는 외모였다.

그 순간 번쩍, 세드릭이 눈을 떴 다.

‘깜짝이야.’

마음 놓고 남자주인공의 미모를 감 상하고 있던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열 었다.

“어떠신가요?”

“……글쎄요. 전 묘사엔 별 재주가

없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그렇지. 김이 새는 기분이었 다. 원작 공인 일 중독에 전투광인 남자가 어떻게 향의 심오한 세계까 지 이해하겠어. 향수와 세드릭은 서 로 다른 외국어로 쓴 글자마냥 이질 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향수병을 한 번 쓰다듬은 세드릭이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피에 젖은

루비처럼 붉은 시선이 내 시선과 부 딪혔다.

“매혹적이군요.”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때로는 열 가지 묘사보다 한 가지 단어가 더 마음에 와닿을 때도 있 다.

그리고 세드릭 에반스에겐, 그런 단어를 말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 다.

나는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설마 세드릭의 입에서 이렇게나 직

설적인 칭찬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끝이 갈라진 목 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해요, 전하. 맘에 드신 것 같 아 다행이네요. 어…… 한 병 드릴 까요?”

“괜찮습니 다.”

“……아, 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왜 그런 소릴 했담.

나도 모르게 던진 말인데, 막상 이 남자에게서 향긋한 라일락 내음이

풍기는 상상을 하자 피가 식었다. 안 어울린다.

“실은 오는 길에 매그너스의 가게 도 들러보았습니다만……/

“그 모습 그대로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세드릭이 직접 향수 가게에 들어갔다고? 투자 한 가게도 아닌데?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매그너스는 바지에 실례라도 한 거 아닐까?

세드릭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 쩐지 짓궂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뇨, 나름의 변장은 했습니다.”

“안 통했을 것 같은데요.”

매그너스가 심어놓은 소년처럼 후 드를 뒤집어쓴다고 해서 이 범상치 않은 체격과 존재감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매그너스 역시 비슷한 상 품을 내놨더군요. 공교롭게도 제목 까지도 흡사한.”

“네에. 그렇더군요.”

나는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슬쩍, 넌지시 물음을 던졌 다. 이런 거 내 입으로 물어보기 조 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투자자의 의 견은 중요하니까.

“어떻던가요?”

“형편없던데요.”

세드릭이 즉답했다.

“개집 방향제로나 쓰면 딱일 것 같 았습니다.”

흐음.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후각이 꽤 섬세하시네요, 전하.”

“별 말씀을.”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매그너스의 향수에 대한 험담을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가면무도회 날, 세드릭은 내가 늘 뿌리고 다니는 향수의 재료를 꽤 정 확히 맞췄었다. 물론 사소한 재료들 까지 전부 다 알아채지는 못했겠지

만, 그래도 놀라운 실력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허브에 대해 꽤 조예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전에 제 향수의 재료를 맞추셨던 것도 그 렇고.”

“그건 전장에서 익힌 지식입니다.”

세드릭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독초와 약초를 구별하려면 식물학 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니까.”

“……아. 그러셨군요.”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작을 통해 세드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부분이 더 많 았다. 특히 세드릭의 과거에 대해서 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원작에서 유일하게 묘사되었던, 이십여 년 전 의 그 사건을 제외하면.

‘이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건 몹시 갑작스러운 의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뜬금없는 의문을 떨쳐냈다.

“그나저나, 레이디. 그거 아십니 까?”

“네?”

“남 앞에서 눈을 감아 본 건 방금 그게 처음입니다.”

“어머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요?”

“글쎄. 영광이라고 느끼실 것 같진 않은데요.”

“들켰네요.”

가볍게 대답하면서도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세드릭 에반스는 어딘가 이 상했다.

분명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이기 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무언가가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 개를 갸웃거리며 세드릭을 살폈다. 턱선이 약간 더 갸름해진 것 같기도 하고. 눈매가 약간 더 깊어진 것 같

기도 하고…… 조금 마른…… 건가?

아, 참.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려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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