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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3화 (23/153)

〈23 화〉

뽀 쑤호

“아가씨, 이건 어디다 놓으면 될까 요?”

근육이 불끈 솟은 배달부 둘이 물 었다. 나는 배달부들이 들쳐멘 것을 보고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

“저기요. 저쪽에 놔 주세요!”

배달부가 조심조심 내가 지시한 곳 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나는 얼른 그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향수 오르간이었다. 선반마다 향수 병과 플라스크를 가득 채울 수 있 는.

앞으로 모든 조향 작업은 이 위에 서 이루어질 것이다. 즉, 이 건물에 서 가장 성스러운 물건이었다.

배달부들이 돌아간 뒤 나는 오르간 앞에 앉았다. 그리곤 향기 노트를 펴 보았다.

내 첫 번째 주력 상품은,〈첫사랑 의 법칙〉이었다. 매그너스가 비슷한 상품을 팔고 있긴 했지만, 레시피를 굳이 수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기도 했 고, 레시피까지 바꿀 정도로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 다.

두 번째 주력 상품은,〈아침 산책〉 이었다. 시원한 소나무 향에 레몬같 이 상큼한 끝마무리가 인상적인 향 으로, 특히 남성 손님에게 인기가 좋았던 향수였다.

세 번째는 여태 선보인 적 없는 향수였다. 짙은 장미 향에, 은은한

삼나무 향과 여러 방울의 화이트 머 스크를 배합한 것. 고전적인 장미 향인 듯하면서도 코끝에 매혹적인 잔향이 끈질기게 맴도는, 내가 최근 개발한 향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이름은〈장미 정원〉. 나는 이게 앞 의 둘을 제치고 가장 잘나가는 상품 이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이런저런 제품들 까지. 검토를 마친 나는 회심의 미 소를 지었다. 이대로라면, 세드릭의 빚을 갚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뭐, 내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가자 어느덧 저녁별 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오후 내내 향수를 살펴보느라 뻐근한 어깨를 이쪽저쪽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 야 하려나.’

세드릭의 저택에 찾아가 다짜고짜 사업 계획서를 내밀었던 날. 감사 인사를 전하긴 했지만, 그거로는 충 분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

다.

‘식사 대접이라도 한 번 해야 하 나?’

성의 표시라는 게 원래, 말로 때우 기보단 정성을 보여야 하는 거니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졸음이 몰려왔다. 개업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자 볼까. 결심하 자 기다렸다는 듯 그간의 피로가 한 꺼번에 나를 덮쳤다.

쓰 # 쏘

그리고 대망의 개업 날.

완벽히 리모델링한 건물, 손님들을 유혹하도록 은근히 흘러나오는 향. 잘 단장된 내부까지.

모든 게 완벽했으나, 어째서일까.

‘안녕.’

나는 지나다니는 파리를 보곤 속으 로 생각했다.

‘오늘 네가 첫 손님이구나.’

그래.

손님이 없었다.

거리 자체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 었다. 3번가는 휴일을 맞아 꽤 북적 였고, 내 가게를 향해 기웃기웃 관 심을 갖는 사람도 몇 있어 보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가게 안으로 들 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도.

‘이건 다분히 이상한 상황인데.’

막 개업한 가게. 외관상 하자도 없 고, 인기 없는 업종도 아니었다. 이 렇게까지 손님이 없을 이유는 없었 다.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문밖으 로 몸을 내밀자, 때마침 수상한 광 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찍이서 내 가게를 발견한 행 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호기 심 어린 눈으로 인테리어를 이곳저 곳 살펴보았다.

곧 행인이 결심한 듯 이쪽을 향해 새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순간이었 다.

‘뭐지?’

웬 후드를 뒤집어쓴 인간이 난입해 선 행인을 가로막았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둘이 무어라 대화하고 있 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 내용을 뻔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드가 무어라 입을 나불대자, 행 인의 표정이 곧 사색으로 변했다. 행인이 강도라도 만난 듯 서둘러 등 을 돌려 멀어져갔다.

그리고 의문의 후드 인간은 다시

골목길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설마.’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내 장사를 방해할 만한 인간은 지금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폰타 매그너스, 나잇살깨나 먹은 인간이 설마 이렇게까지 유치한 협 잡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냉큼 골목길을 향해 발을 내 디뎠다. 뒤에서 에른이 갑옷을 절그

럭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은 막다른 길이었다. 안으로 몸을 들이자마자 숨어 있던 후드 인 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요.”

후드 인간이 막다른 곳으로 걸어가 며 후드를 더욱 푹 눌러썼다.

나는 팔짱을 꼈다.

“ 야.”

“안 들리냐?”

“들리게 해 드릴까요, 아가씨?”

에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후드 인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 러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에른. 귀는 멀쩡해 보이 는걸요. 그렇죠?”

“……무, 무슨 용건이시죠?”

드디어 후드 인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가녀린 소년의 것이었다.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뭐, 보아하니 고용된 신세 같으니, 간단하게 하나만 묻죠. 당신 고용주, 폰타 매그너스 남작이지?”

I 아

내 입에서 매그너스의 이름이 나오 자, 소년이 꽤나 놀란 듯 어깨를 푸 드덕 거렸다.

매그너스 놈, 돈 좀 더 쓰지. 고용 을 해도 이런 풋내기를 고용하다니. 한심함에 한숨이 나왔다.

“아, 아, 아, 아닌, 아닌데요……!”

“흐음, 좋아. 완벽히 이해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 소년 의 마지막 반응이 쐐기를 박았다. 폰타 매그너스는 사람까지 심어가며 내 영업을 방해하고 있는 게 맞았 다.

그렇게 거대한 매장을 가진 사람 이, 고작 방 두 칸짜리 영세 가게에 이런 비겁한 수까지 쓰다니.

‘뭐, 어떻게 보면 고마워해야 하

나?’

나를 견제가 필요한 경쟁자라고 생 각한다는 거니까.

비단 이 소년 하나만을 심어놓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거리 전체에 내 가게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놓 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랬 을 확률이 높았다.

‘좋아. 폰타 매그너스.’

이렇게 더럽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는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이쪽

역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머나.”

곱게 차려입은 영애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꽃잎처럼 펼쳐진 우아한 외출용 드 레스, 큰 챙 모자 아래 언뜻 비치는 눈부신 미모와 어깨 위로 펼쳐진 백 금발.

샤를로트 제노스. 그녀의 등장만으 로도 조명을 켠 것 마냥 거리가 밝

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샤를로트를 맞으 러 나갔다.

“샤를로트 양, 와줘서 고마워요.”

“어머, 뭘요. 아리엘 양께서 가게를 차리셨다는데 당연히 와 봐야죠. 그 런데, 와아…… 이건 정말 예상외인 데요?”

가게를 둘러보며 샤를로트가 연신 감탄했다.

“윈스턴 영애께서는 조향뿐만 아니

라 여러모로 센스가 뛰어나신 분이 셨군요? 진작에 알아보긴 했지만 요.”

나는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샤를로트는 혼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도 대여섯 명의 레이디 들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얼른 다 른 영애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초대해주셔서 저희야말로 영광이 죠. 사실 향수는 처음이라,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얼른 샤를로트 양을 따라 왔답니다.”

“그러셨군요!”

나는 향수가 처음이라는 율리아를 얼른 매대로 모시고 갔다. 신작 중 하나인〈장미 정원〉을 시향하자, 율 리아의 눈빛이 몽롱하게 녹아내렸 다.

“강렬해…… 뭐, 뭐가 들어 있는 거죠?”

“음, 일단은 장미가 메인이랍니다. 이름처럼요.”

“제 어머니께서도 장미정원을 가꾸 고 계시지만, 만발해도 이렇게 강렬 한 향이 나진 않는데……/

율리아가 감탄을 내뱉으며 한 번 더 시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그런데요, 아리엘 양.”

“네?”

“이거…… 향이 조, 조금 야한 거 아닌가요?”

“ 아.”

나는 율리아에게 한쪽 눈을 접어 보였다.

“애인이 있으신 분께 특별히 추천 하는 향수이기는 해요.”

“아……!”

율리아가 짧게 감탄하더니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하나 주세요.”

“네! 금방 포장해 드릴게요. 첫 번 째 손님이시니까 서비스도 많이 넣 어 드리죠.”

나는 율리아를 위한 쇼핑백에 미니 어처 향수를 몇 개 함께 포장해 넣 었다. 미니어처 향수라고는 하나 밋 밋하지는 않았다. 날개와 하트로 장 식한 작은 향수병은, 인테리어 소품 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앙증맞았 다.

그걸 발견한 다른 영애들이 눈을 빛냈다.

“방금 같이 넣은 건 뭔가요, 아리 엘 양?”

“아, 율리아 양께서 저희 가게의

첫 손님이시라, 그 보답으로 드린 선물이었어요.”

“앗! 저도 지금 막 하나 사려고 했 었는데요!”

다른 영애가 얼른 향수병을 하나 집더니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풋 웃곤 고개를 끄덕 였다.

“네에, 영애께도 하나 드릴게요. 아 직은 넉넉하거든요.”

“어머나,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도요!”

영애들이 각자 향수병을 들고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팔랑팔랑 흔 들었다. 그 모습이 병아리 떼 같기 도 해서 나는 또 웃음을 흘려 버렸 다.

나는 살짝 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 다. 널찍한 문 너머로,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안 을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후드 소년이 나타나 행인들을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혼 자서 상대하기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나는 내심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예쁜 새 가게, 향긋한 내음. 그 안 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 의 웃음소리.

목석이 아니고서야 한 번쯤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게다가 세논 지구는 쇼핑의 명소. 즉, 이 거리를 찾은 사람들은 대부 분 쇼핑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나온 자들이 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이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딸랑.

샤롤로트 영애의 일행들을 제외하

고 첫 번째 ‘진짜’ 손님이 가게 종 을 흔들었다.

일레인 산 은종이 맑은 울음을 가 게 가득 퍼뜨렸다.

나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오세요, 손님. ‘아리엘의 향기 살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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