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22화 (22/153)

〈22 화〉

호호소

“저어, 전하.”

서류를 정리하며 리키온이 조심스 레 물었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턱을 괴었다. 창가 너머로 아리엘 윈스턴이 탄 마 차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윈스턴 영애, 역시 아직 전하께 사심이 남아있으신 것 같지요?”

리키온이 아리엘의 서류를 한데 모 으며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이런 명분까지 만들며 전하를 찾 아오실 정도니 말입니다.”

“ 명분?”

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서린 불쾌한 기운을 리키온은 놓치지 않았다. 리키온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아직도 배움이 더 필요한 것 같 군. 리키온.”

드디어 창에서 시선을 뗀 세드릭이 리키온을 직시했다. 리키온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 계획서를 읽어보고도 그런 소 리가 나오나?”

“무, 물론 읽어보았습니다. 전하.

흠잡을 데 없는 구상이라고 생각하 기는 했지만……/

아리엘의 사업계획서는 과감할 뿐 더러 통통 튀고 신선했다. 그러면서 도 현실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훌륭한 계획서였다. 마치 오래전부 터 고민을 거듭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전하께 투자를 요청하러 온 데에는 다른 이 유도 있지 않았을까요?”

세드릭은 누군가에게 ‘투자’ 따위

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투자를 하 느니 차라리 통째로 사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사업가로서의 세드릭 에 반스는 명백한 포식동물이었다.

그 흉흉한 평판에도 불구하고 아리 엘 윈스턴이 굳이 세드릭 에반스를 찾아온 데에는, 역시 흑심 또한 섞 여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리키온의 짐작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겠지-예전이라면.”

세드릭이 나지막이 뱉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드릭은 조금 전 아리엘의 눈빛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청록색 눈동자에는, 예전 과 달리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애정도, 절박함도. 집착도.

‘뭐. 투자금을 건넸을 땐 확실히 기쁨으로 빛나긴 했지만.’

금화를 본 순간, 환해지던 아리엘 의 얼굴을 떠올리던 세드릭이 픽 웃 음을 흘렸다.

세드릭은 사업가였다. 상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는 지 쯤은 한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세드릭의 눈엔 아리엘은 투자자를 간절히 찾아 헤매는 어린 사업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리엘 은 오롯이 사업만을 생각하고 있었 다.

‘한데, 나는

솔직히 말해, 세드릭은 조금 전까 지만 해도 아리엘에 대한 의심을 버 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그 오랜 짝사랑을 단 념 했을까?

이 또한 관심을 끌어보려는 새로운 수법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오늘, 그녀를 마주하고 나 서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 있 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아리엘 윈스턴은 더 이상 세드릭 에반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의 깊고 질척이던 감정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쏘 쓰 쏘

“흐 흐흐 흐 ” 다 9 — 13 9 I그 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내 디뎠다. 걸음, 걸음이 날아갈 듯 가 벼웠다.

리나가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 었다.

“아가씨,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기 분이 무척 좋아 보이세요!”

응, 있었지, 좋은 일.

금고에 고이 잠들어 있는 금화들을 떠올리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나는 리나를 향해 눈을 접으며 다 른 질문을 했다.

“리나는 내가 윈스턴 저에서 나오 면, 나 따라나올 거야?”

“네? 아가씨께서 집을 나오신다고

요?”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작 은 고개가 당차게 위아래로 움직였

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물 론이죠! 전 아가씨의 전속 사용인인 걸요. 아가씨 곁이 아니면 제가 어 딜 가겠어요?”

“그래, 고마워. 나 따라오기로 약속 한 거다?”

“그야 당연하죠, 아가씨! 당연한 걸 계속 물어보시면 저 섭섭해요! 그나저나 저희 어디로 가고 있는 건 가요? 이쪽은 향신료 시장이 아닌 데……,”

“도착하면 금방 알게 될 거야. 리 나.”

나는 씨익 웃으며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황실 토지청. 건물 안으 로 들어서자 황실 공무원 정복을 차 려입은 여성이 나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찾아오 셨나요?”

“세논 지구에 상가를 하나 구입하 고 싶어서요.”

‘‘힉?”

옆에서 리나가 이상한 소리를 냈

다. 리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반면 공무원은 미동 없이 그린 듯 한 미소로 대답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뒤는 행군의 연속이었다.

건물을 소개받고, 마차로 직접 이 동해서 둘러보고. 입지를 살피고 고 개를 젓는 일이 수십 번 반복되었 다.

길고 긴 고난이었지만 마침내 나는 찾아낼 수 있었다.

완벽한 새 보금자리를.

에른이 정중히 내게 손을 내밀었 다.

나는 기꺼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곧장 내 어깨로 눈부신 햇살이 쏟 아져 내렸다. 기온도, 습도도 모든 것이 완벽한 날씨였다.

“ 와아아

리나가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간 새 단장을 끝낸 세논 지 구 3번가 156번지, 즉 나의 새 보 금자리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연한 베이지색의 벽돌 외벽, 그 위 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 건물은 세논 지구 특유의 아담하면서 우아 한 분위기를 그대로 빚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게는 겉보기에는 소담했으나, 안 으로 들어가면 꽤 널찍한 넓이를 자 랑했다. 세로로 긴 매장 안은 손님 들이 천천히 돌아다니며 향을 시향

하기에 충분히 쾌적해 보였다.

나는 간단히 한 마디로 평가를 내 렸다.

“썩 괜찮네.”

“썩, 이요? 너무너무 예쁜 건물이 에요, 아가씨! 에른 경, 경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게 생각합니다.”

투구 속에서 담담한 대답이 흘러나 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고용주를 위한 아부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용주는 내 가 아니지. 에른은 세드릭이 내게 붙여준 기사니까……,

‘아, 여기서 그 남자 생각이 왜 나 는 거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장사 전부 터 투자자를 자꾸 떠올렸다간 기세 가 꺾이게 마련이다. 다른 생각이나 해야지.

문득 시야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화사한 금발을 한 청년이 헤벌쭉 입 을 벌리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 꽃집 청년!’

나는 단번에 청년을 기억해내곤 환 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향수 재료 를 구입하러 저 청년의 꽃집을 찾은 이후로, 어느새 단골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손을 활짝 들어 흔들자 청년이 깜 짝 놀란 듯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 다.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닌데, 아

직도 저렇게 부끄러워한다니까.

“아, 안녕하세요, 아리엘 님. 혹시 여기로 이사 오신 건가요?”

“이사라기보다, 새로 가게를 열려 고 해요.”

청년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청년에게 다가가 은근한 미소 를 지었다.

“향수 가게인데요.”

“아, 그러시군요! 아리엘 님께선 조향에 조예가 뛰어나시니까 분명

잘 되실 거예요……!”

“네, 감사해요. 그런데 덕담 말고도 저희 따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네? 나, 나눠야 할 이야기요?”

청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양 관자놀이부터 콧잔등까지가 전부 분홍빛으로 물드는 게 조금 신기했 다.

“네. 꽃집 가게와 향수 가게. 뭐 떠오르는 거 없으세요?”

“어어어……

“어허, 참. 그 말인즉 제가 앞으로 도 당신 가게의 단골손님이 될 거라 는 이야기죠.”

“아!”

청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는 살짝 느리지만, 본질적으론 착한 청년이었다.

구슬리기도 좋으면 더 금상첨화일 텐데. 나는 더욱 은근한 미소를 지 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계속 거래 를 할 사이니 서로의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해보는 건 어떨까요?” “시, 시, 신뢰 말씀이신가요. “네, 예를 들면……

나는 청년에게 손짓을 했다. 멍하 니 나를 쳐다보고 있던 청년이 뒤늦 게 깨달았는지 재빨리 고개를 내게 로 기울여 주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쪽의 물건을 제게만 판매한다거 나.”

“어…… 네에?”

“전부 그러자는 건 아니에요. 딱 한 품목. 라일락만 제게 독점으로 팔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라…… 라일락을요?”

“네, 가능할까요?”

청년이 눈을 끔뻑거렸다. 내 제안 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눈 앞의 청년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미끼를 더 던져 주었다.

“대신 물건은 현재 가격의 정확히 2배로 지불할게요.”

“두, 두 배……!”

청년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청 년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 행히 청년은 구슬리기 쉬운 타입이 었다.

“네, 게다가 저는 라일락을 많이, 굉장히 많이 구입할 거랍니다. 그럼 그쪽 마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게 되는 거죠.”

이 청년이 판매하는 꽃들은 다른 꽃집보다 대체로 질이 좋은 편이었 다. 특히 라일락은 더더욱 그랬다.

청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요, 요즘 수도에서 라일락 열풍이 불고 있는 건가요?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라일락 수요가 많이 늘어나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매그너스가 여기도 들렀구만.

나는 모르는 척 달콤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글쎄요. 유행인가? 아무튼, 제 계 약에 응해 주시면 감사의 의미로 선 급금도 드리도록 할게요. 일단 이

정도?”

나는 손가락을 다섯 개 다 쫙 펴 보였다. 청년의 눈이 또 동그래졌다.

“오, 오만 비스나요?”

“네? 아뇨, 무슨 소리세요. 저희 이제 전속이 될 사이인데 겨우 그 정도일까.”

나는 고개를 기울이곤 말했다.

“오십만 비스죠, 당연히.”

“네, 네?”

청년이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나는 몰래 웃었다. 세논 지구에 상 가를 가지고 있는 청년답지 않게 너 무 순수하네.

“어때요. 거래 성립인가요?”

“오, 오십만 비스면 라일락이 대체 몇 송이…… 아리엘 님, 정말 그렇 게나 많은 라일락이 필요하신 건가 요?”

“네. 물론이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해요. 무척. 많이.”

매그너스 놈의 코를 납작 찌그러뜨 리기 위해선 말이지.

청년이 결심한 듯, 답지 않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거래. 하겠습니다.”

“좋아요, 파트너.”

내가 손을 내밀자, 청년이 우물쭈

물하더니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파트너, 성함이 어떻게 되 시죠?”

“아, 라파엘 에드먼드라고 합니 다……!”

“좋아요. 라파엘 씨. 앞으로 우리 잘 해봐요.”

나는 손을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 다.

라파엘이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 면서도 악수에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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