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화〉
“언제 오셨습니까? 기척이라도 내 시질 않고.”
“방금요. 그냥 잠깐 구경 좀 했어 요.”
“무엇을?”
“ 전하를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듯 세드릭 이 미간을 좁혔다.
저를?”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네. 하도 집중하고 계시기에 신기 해서요.”
“역시 오래 기다리셨나 보군요.”
미안한 듯 세드릭이 서류 더미를 덮고 발걸음을 옮겼다.
급한 일 아니었나?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기 위해 몸
을 움직였을 때였다.
“으앗!”
순간 구두 굽이 휙 꺾였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앞 으로 엎어졌다. 팔을 허우적댔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가까워지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코 한 번 깨지겠네.
……그러나,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 지 않았다.
이런.”
가까이서 혀 차는 소리만 들릴 뿐 이었다.
세드릭이 내 허리를 끌어당기자, 순간 그의 체향이 내 코끝을 스쳤 다.
무척 독특한 향이었다. 옅게 희석 한 사향 같기도 하고, 소나무 향 같 기도 한…… 좀처럼 정체가 잡히지 않는 희미한 냄새.
본능적으로 향의 정체를 찾아내려 던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 마터면 냄새를 맡겠답시고 세드릭의
쇄골에 코를 묻을 뻔했다.
나는 허겁지겁 그의 품에서 벗어났 다.
“괜찮습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그 역시 조금 놀 라기는 했는지, 평소보다 묘하게 부 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 를 들었다.
“네, 괜찮아요. 하마터면 전하의 대 리석을 코피로 물들일 뻔했네요. 감
사합
내 목소리가 문득 멎었다.
세드릭의 얼굴이 두 뼘도 채 떨어 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득 쓸모없는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마냥 피처럼 붉은 줄만 알았던 그 의 눈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만 화경처럼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다 는 걸.
완벽히 깎아내린 루비처럼 그의 눈 동자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발했 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세드릭에게서 물러섰다. 몇 발자국 떨어진 뒤에야 나는 간신 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남주인공의 미모를 코앞에서 맞닥 뜨리다니. 이거 까딱했다간 정말 큰 사달이 날 뻔했어.
나는 눈을 깜빡거려 방금 본 것의 잔상을 지워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려요, 전하. 바쁘실 테니 본론부터 단도직입적으 로 말씀드릴게요.”
세드릭이 대답 대신 어딘가를 가리 켰다.
“일단 좀 앉으시죠. 레이디.”
“……아. 네.”
소파에 앉자, 시종이 내 앞에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세드릭의 앞 에는 차 대신 와인잔이 놓였다.
나는 향긋한 차의 향을 맡으며 준 비해왔던 대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세드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세드릭이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핏빛 액체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와인잔 안을 맴 돌았다.
“단도직입적으로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 곤 오는 내내 속으로 되뇌었던 대사 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좋아, 대본은 완벽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반스 전하.”
“네.”
“제 향수 사업의 투자자가 되어 주 세요.”
와인잔을 흔들거리던 손이 뚝 멎었 다.
세드릭이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올 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해명해보라는 듯.
“전하께서도 제 조향 실력에 대해 서는 아시리라 믿어요. 제 입으로 읊기에는 부끄럽지만, 전하께서 의 뢰하셨을 숱한 조향사들 중 아닉시 아 향을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한 건 저뿐이었을 테니까요.”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 서 말했다.
“아직 제도에서 향수는 그리 보편 화되지 않았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 새로운 사치품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수요도 충분하고 경 쟁자도 아직 많지 않은 지금이 바로 사업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을 때라 고 생각해요.”
세드릭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 올라있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와인 잔을 기울일 뿐.
그러나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가 입을 열었다.
“리키온.”
“예! 전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이 얼 른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매그너스가 새로 지은 향수 가게 의 예상 매출이 어떻게 되지?”
“아, 바로 보고서를 대령하겠습니 다!”
나는 놀란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그가 매그너스가 새로 오픈한 가게 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매출을 예상해볼 수 있다 는 것도 놀라웠다.
잠시 후, 보고서를 받은 세드릭이 빠르게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들이부은 자본이 있으니, 한동안 매그너스의 가게는 잘 나갈 겁니다. 게다가 그는 화장품 산업에서 탄탄 한 유통 경로를 갖추고 있고요. 이
런 경쟁자를 상대로 살아남기란 힘 들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투 자를 부탁드리고자 찾아온 겁니다.”
세드릭이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긴장을 숨기며 머리를 굴렸 다. 그래. 다짜고짜 믿고 투자하라고 하면 수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경험상 부자들이 오히려 돈 쓰는 데에 더 철저하고 꼼꼼했다.
물론 나 역시 말 몇 마디로 투자 금을 받아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파우치 속에서 서류를 꺼내 세드릭
에게 건넸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전하.”
“이건……:
“사업계획서랍니다.”
세드릭의 기다란 손가락이 흰 서류 를 훑었다. 탐색하듯 느릿한 손짓이 었다.
“본격적이 군요.”
“물론이죠. 제 전부를 걸 각오인걸 요.”
나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내 미소 에 세드릭이 시선을 두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나는 주박이라 도 걸린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짧은 한순간 내 곳곳을 파헤치고 있었다. 내 본심과 진심, 거짓말과 비밀. 그 모든 것들을.
……실컷 그렇게 쳐다봐라. 난 꿀 릴 게 없는걸.
나는 당당히 어깨를 폈다. 내 비록 세드릭의 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며 찾아온 입장이긴 하지만, 그 외 시 커먼 속내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지않아 세드릭이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볍게 한숨이 홀러나왔다.
사락, 사락.
한동안 넓은 방 안을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채웠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세드릭의 눈빛 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가 내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계획서를 아버지인 윈스턴 백작에게 들고 갔더라면, 그는 코웃 음만 쳤을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아니었다. 이 순간 나는 그의 대등 한 사업파트너였다.
“작성에 오래 걸리셨겠군요.”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세드릭 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내겐 시간이 많았다. 눈 을 감으면 수많은 공상들을 전부 하 나씩 실현해볼 수 있었다. 이 향수 가게는 그중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자 해 빚어낸 공상이었다.
“구상하고 있던 걸 옮겨 쓴 정도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세드릭이 내게 시선을 던졌다. 서 류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눈빛이었지만, 그 안엔 미묘한 빛도 함께 담겨 있었다.
어쩌면 호기심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을 법한 빛이.
“지금껏 레이디에 대해 잘 알고 있 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부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하하…… 그런가요.”
지레 찔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 었다.
나는 파우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계획서만으로 설득하긴 힘들 것 같 아 미리 세드릭의 취향을 분석해 만 들어 온 향수들이 있었다.
최후에는 이 향수들을 꺼내 그를 설득할 생각……-
“좋습니다.”
응?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세드릭이 서류를 치우며 말했다.
“리키온. 금고에 다녀와.”
“넵, 전하!”
잠시 후, 리키온과 시종들이 두 개 의 거대한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세드릭이 매듭을 풀자, 꾸러미의 입이 벌어지며 눈부신 황금빛이 뿜 어져 나왔다.
“각각 이천오백만 비스씩, 총 오천 만 비스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시 겠습니까?”
오천…… 네?!
예상치 못한 금액에 나는 눈만 끔 뻑 였다.
이 사람이 설마 지금 나를 놀리 나? 그러나 세드릭의 눈은 평소처럼 장난기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꾸 러미를 살폈다. 그리고 하마터면 혀 를 씹을 뻔했다. 그 안에는 정말, 말 그대로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상에. 이 돈이면 향수를 대체
몇 병 만들 수 있는 거지
계산도 안 된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제게 오천만 비스를 투자하시 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모자라십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딸꾹질이 나올 것 같다. 나는 간신 히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저번 꽃집 청년에게 상가 가격을 물었을 때, 청년은 이천만 비스 쯤
될 거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한쪽 꾸러미에만 손을 뻗어 끌어당겼다. 세드릭이 그런 나를 의 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충분하고도 남겠지.
나는 남은 쪽 꾸러미를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투자금이란 게 말이 좋아 투자금이 지, 결국엔 빚이나 다름없었다. 저 돈을 다 갚으려면 대체 향수 노예짓
을 몇 년간 해야하는 거야?
게다가 상대는 귀족이었다. 투자금 회수가 어렵다고 여겨지면, 무슨 짓 이든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살던 세상에 과유불급이란 말 이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충분하 고도 남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저 돈을 홀랑 다 받았다가, 만에 하나 쫄딱 망했을 때를 생각해 보
자.
그럼 난 원작 공인 미친개의 노예 가 되어 죽을 때까지 아닉시아 향수 나 만들며 살아야 했다.
세드릭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괜히 긴장이 되어 금화 꾸 러미를 더 끌어당겼다.
머지않아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 다.
“좋습니다. 리키온.”
“예, 전하.”
“계약서를 가져와.”
조금 뒤, 나와 세드릭은 계약서 위 에 나란히 날인했다.
동시에 내겐 세드릭 에반스라는 든 든한 투자자가 생겼다.
물론 이천오백만 비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