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화〉
“마음에 든다, 라.”
나는 매그너스의 말을 되풀이하며 천천히 걸었다. 라일락 향수가 놓인 매대를 향해.
시향지를 집어든 나는 천천히 향을 들이마셨다.
“라일락. 자스민. 케일런, 그리고
라커드. 맞죠?”
나는 느릿느릿 향수에 첨가된 재료 들을 읊었다.
매그너스가 눈을 끔뻑였다.
“흐, 흠. 맞을 겁니다. 자세한 배합 은 우리 측 조향사가 알고 있어 서……/
“그래요? 그럼 그 조향사님께 전해 주세요. 라커드와 자스민은 궁합이 전혀 안 맞는 조합이라고.”
“……예?”
“말하자면 허브계의 앙숙이랄까.
둘이 만나면 미묘하게 쓴 향이 감돌 뿐 아니라, 향수가 금방 상해버려요. 특히나 이런 여름철엔 더더욱 주의 해야겠죠.”
“아, 이 씁쓸한 향의 정체가……/
리나가 다시 한번 시향지를 킁킁대 며 말했다.
곱지 않은 눈으로 리나를 노려본 매그너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시향지 를 맡았다. 그리곤 잠깐 눈동자를 굴리다 변명했다.
“이 쌉쌀한 향은 여름철의 풋내를
표현해본 겁니다. 의도한 것이지요.”
꽤 시적인 변명인걸. 나는 픽 웃음 을 흘렸다.
“풋내, 좋죠. 하지만 잘못 조합했다 간 그 풋내가 독으로 변할 수도 있 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도, 독이라니!”
매그너스가 역정 내듯 외치곤 곧바 로 목소리를 죽였다.
“말씀 조심하십시오, 영애! 우리
향수에 독이 들어 있다니. 비방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사실을 말하는 것도 비방이 된다 면, 네. 저는 지금 비방을 하고 있 는 것이겠네요. 하지만 확실히 말씀 드릴게요. 라커드와 자스민은 초보 자가 함부로 배합해서는 안 되는 허 브들이 에요.”
매그너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 졌다.
“초보자라니, 말조심하시오, 윈스턴 영애! 우리 살롱의 조향사들은 하나 같이 제국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교
육을 받은 인재들이오! 그러는 영애 께선 도대체 어느 잘난 기관에서 교 육을 마쳤기에 우리 조향사들을 말 도 안 되는 헛소리로 비방하는 것이 오?”
“교육 안 받았는데요.”
“하!”
전문적인 화학 교육을 말하는 거라 면, 난 받은 적이 없었다.
매그너스가 커다랗게 헛웃음을 쳤 다.
“그런 주제에 어찌 감히 전문가들
을 함부로 깎아내리시오!”
“라커드와 자스민을 함부로 배합하 면 안 된다는 건 교육을 안 받은 저조차 잘 알고 있는 사실이란 이야 기예요.”
매그너스가 이를 악물곤 나를 노려 보았다.
“그 말씀에 책임질 수 있으시오, 영애? 이건 명백한 영업 방해요.”
“방해할 의도는 없었는데 죄송하게 됐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거짓말을 했 다. 그리곤 향수병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확실한 건, 이 향수. 일주일이면 상해요.”
“아리엘 윈스턴 영애!”
매그너스가 붉어진 얼굴로 씩씩댔 다.
그러더니 곧 생각을 고쳐먹은 듯, 여유 넘치던 처음의 가면을 뒤집어 썼다.
“계속 멋대로 이야기해보시오. 영 애가 아무리 헛소문을 퍼뜨려봤자, 내 가게는 머지않아 제도의 명물이 될 테니.”
“유행을 타려면 배를 잘 골라야 하 는 법이지. 내 배는 튼튼하게 잘 준 비되었는데, 영애는 글쎄……-”
매그너스가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 를 훑어보았다.
“배는커녕 남을 비방하기 위한 입 만 준비하신 것 같군.”
“후 ”
나는 가볍게 웃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남작님. 아무래도 제 조 언을 조금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 으신 모양이네요.”
사실 그의 약점을 굳이 밝힌 것은 그를 비방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여름철에 곧 상할 향수를 구매해가는 손님들이 걱정되었기 때 문도 있었다.
하지만 들을 준비가 되지도 않은
귀에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좋은 말 을 쑤셔 넣어줘야 할 필욘 없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실례 했어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한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매그너스는 눈만 멍하니 끔뻑일 뿐 나를 잡지 못했다.
뒤따라오는 리나와 에른의 발소리 가 들렸다. 가게를 벗어나자 리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는 리나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 다.
“그럼, 당연하지. 괜찮지 않을 일이 뭐 있니?”
“다행이에요, 아가씨.”
나는 리나 몰래 쓴웃음을 감췄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매그너스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유행은 먼저 선 수 치는 사람이 선도하게 되어 있었 다. 처음 시작이 누구든, 먼저 크게 판을 벌려 성공시키는 사람이 나타 나면 그 뒤부터는 그 한 사람의 독 식 체제가 되는 것이다.
매그너스의 향수 가게는 이미 재력 과 거대한 유통망으로 반쯤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저 인간은 나를 싫어하지.’
매그너스는 향수 사업을 독식한 뒤
자신의 제안을 걷어찬 나를 몰아내 려 할 것이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영세 상인이나 마찬가지인 나는 그 의 압박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 지;
가짜가 내 향수의 이름을 이용해 시장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걸 다 떠 나서 내 자존심의 문제였다.
내 향수에선 그따위 쓰디쓴 향은 안 난다고!
“일단, 방문판매상 신세에선 벗어 나야 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내 향수 사업은 입소문에 의지한 방 문 판매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준으론 매그너스를 상대할 수 없 었다.
일단은 가게가 있어야 한다. 오롯 이 향수 제작과 판매에 힘을 쏟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매그너스의 가게 정도는 아니더라 도,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 체가 중요했다.
결론을 내린 나는 리나에게 말했 다.
“리나, 은행에 가자.”
“네, 아가씨!”
우리는 은행을 향해 마차를 달렸 다.
후 쏘 #
계좌의 잔액을 확인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목돈은 안 모였네.’
당연한 일이긴 했다. 향수를 팔기 시작한 지 이제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까.
향수가 결코 저렴한 값은 아니었지 만, 재료비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 문에 생각보다 대단한 금액을 저축 할 순 없었다.
세드릭이 아닉시아 향 대금을 열 배로 지불하기 시작한 뒤부턴 저축 액이 크게 늘긴 했지만……,
‘ 잠깐.’
나는 문득 떠오른 이름에 숨을 멈 췄다.
세드릭 에반스.
제국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공작 가의 가주이자, 선조부터 내려온 가 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사업가.
그러니까, 즉, 부자란 소리였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가게를 열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 이 없으면 투자자라도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단한 인맥도, 자금도
없는 젊은 영애가 투자자를 구하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발로 뛰어야지. 뭐.
일단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에른 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른 경. 세드릭 전하를 뵙고 싶 군요.”
에른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갑자기 튀어나온 세드릭의 이름 에 소스라치게 놀란 리나와는 대조 적인 반응이었다.
“약속을 잡아드릴까요?”
“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뵈었 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신뢰감을 주었다.
쏘 쏘 쏘
……그리고, 에른은 정말 일 처리 가 빨랐다.
무척이나.
오늘이 채 가기도 전 나는 세드릭 공작저에 초대받았다.
“아가씨, 어떡해요! 아무 외출복이 나 입고 공작님을 뵐 수는 없는데, 아아, 시간이 모자라……!”
리나가 시계를 바라보며 절망스러 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 외출복이어도 돼. 이야기만 나누려는 거니까.”
하긴, 목적이 목적이다 보니, 기왕 이면 단정한 차림이 좋을 것 같긴 했다.
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정숙하고 차분한 외출용 드레스였 다. 치맛단은 폭이 치렁치렁하지도 너무 좁지도 않아서, 사무적인 느낌 을 주기에 딱이었다.
“지금도 완벽해.”
“하지만……,”
“쉿, 리나. 이거보다 더 예뻐 보여 서 뭐 하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
이인걸.”
‘전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 고 나면, 우리는 그저 향수 제작자 와 물건을 납품받는 소비자 관계일 뿐이 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미래에 투자자 와 경영인으로 바뀔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에반스 공작저 앞에 도착했다. 공작가의 집사가 정 중히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리엘 님. 주인님
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거대한 공작저의 홀을 천천히 걸었다.
온 저택에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 기가 감돌았다. ‘유서 깊은 공작 가 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저택이 었다.
감탄하며 홀을 걷던 나는 머지않아 접견실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아리엘 님.”
“아, 감사해요.”
나는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 곤 어쩐지 긴장한 발걸음을 안으로 디뎠다.
세드릭 에반스는 저 반대편의 커다 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엔 시가를, 한 손엔 펜대를 쥔 채.
굉장히 집중하고 있는지, 그는 내 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까딱까딱,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시가가 천천히 흔들거렸다.
가만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눈매 는 그림자가 져 신비로워 보였다. 펜대를 쥔 손은 검을 잡는 자답지 않게 섬세하고 유려한 선을 그렸다.
까딱하면 폭주해서 수도를 초토화 시킬지도 모르는, 미친개라곤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정적인 풍경이었 다.
잘났네;
나는 순수하게 인정했다. 이 남자 는 일에 몰두한 순간조차도 한 폭의 삽화 같았다.
뭐, 이 정도는 되어야 남자주인공 자리쯤 꿰찰 수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세드 릭이 고개를 들었다.
“ 아.”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루비처럼 붉 은 눈동자가 샹들리에 빛을 받아 반 짝였다.
“레이디. 이런.”
세드릭은 조금 당황한 듯 몸을 일 으켰다.
언제나 여유만만한 그에게선 보기 힘든 모습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