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9화 (19/153)

〈19화〉

“세드릭 에반스!”

세드릭이 뒤를 돌아보자 가면무도 회의 주최자, 하이넨 크뤼거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한참 동안 돌

아오지 않기에 찾으러 왔네.”

“아, 미안하군. 잠깐 용건이 있어 서.”

세드릭이 말했다.

용건이라. 하이넨이 눈을 가느다랗 게 떴다.

삼십 분쯤 전, 세드릭과 하이넨은 2층 난간에 기대어 새로 지어지고 있는 레이너 백화점의 주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풍 경화를 보듯 무심히 무도회장을 훑 던 세드릭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멎었다.

‘세드릭? 어딜 가나?,

‘잠깐.’

그렇게 말한 세드릭은 성큼성큼 회 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난데없이 바람맞은 하이넨은, 세드 릭이 홀로 서 있던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우아한 자태를 한 여성이었다. 탐 스러운 벌꿀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 모습에 문득 하이넨의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 여자일 리는 없지.’

아리엘 윈스턴일 리는 없었다. 둘 이 드디어 헤어졌다는 소문이 사교 계에 자자하지 않은가?

세드릭이 아리엘을 닮은, 20대 초 반의 묘령의 여인과 왈츠를 추기 시 작했다. 공작은 제 눈을 믿지 못하 고 벅벅 비볐다.

세드릭 에반스가 춤을? 외국 공주 의 청조차 거절했던 남자가?

놀랍게도 세드릭은 완벽한 매너로

여인을 리드했다. 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이넨은 충격 속에서도 그것을 인 정했었다.

회상을 마친 하이넨이 은근한 목소 리로 물었다.

“용건이란 게 레이디와 춤을 추는 거 였나?”

“뭐야, 보고 있었군.”

세드릭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이넨 이 의문의 여인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하이넨, 하나 부탁하지.”

“어? 자네가 내게? 무엇을?”

하이넨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세드릭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흘 러나왔다.

“뭐라고?”

하이넨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체 그런 건 왜 조사해달라는 건 가?”

“궁금한 게 있어서. 부탁 좀 하지.”

“허, 참…… 그래. 일단 알겠네. 자 네 부탁인데 최선을 다해서 조사해 보지.”

대답을 들어낸 세드릭은 고개를 돌 렸다.

하이넨은 세드릭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의 시선은 무도회장 입구, 조금 전 묘령의 여인이 사라져간 곳 을 향해 있었다.

브 쑤 쑤

[친애하는 아리엘에게.

어느덧 신록의 여름이군요. 아리엘 양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 퍽 오래 된 것 같아요.

괜찮다면 조만간 시간을 내줄 수 있겠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진심을 담아, 샤를로트』

샤를로트에게서 온 편지를 접으며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말마따나 샤를 로트와 만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로트는 사교계 영애들에게 내 향수를 홍보해준 은인이기도 했지 만,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도 했다.

‘친구, 라고 여겨도 되겠지? 음, 아 직은 아닌가.’

나는 수줍게 뺨을 긁적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샤를로트를 만 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었

다. 나는 라일락 향수의 재고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쇼핑할 때가 됐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리나와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에른을 대동하고 재료 쇼핑에 나섰다.

세논 지구는 여전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거리의 향기를 흠뻑 들이 마셨다. 여러가지 꽃으로 황홀하리 만치 향긋한 냄새가 났다. 장미, 작 약, 백합, 라일락, 튤립, 라일락, 그 리고 또 라일락……? ……뭐지?

“리나, 원래 이 거리에 라일락 향 기가 이렇게 강했나?”

“그러게요, 아가씨. 아가씨의 향수 덕에 라일락 향이 유행을 탄 건 아 닐까요?”

으응? 설마. 나는 수줍으면서도 혹 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 다. 사교계 영애들에게 내 향수가 호평을 받고 있는 건 맞지만, 이렇 게 거리에 라일락 향기가 풍길 정도 는 아닐 텐데……,

‘ 응?’

거리를 둘러보는데, 문득 한 가게 가 내 눈에 띄었다.

“저건…… 새 가게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멀리, 못 보던 간판이 불쑥 솟 아 있는 것이 보였다. 층마다 다르 게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한 듯, 큰 건물 자체가 하나의 가게였다.

이 거리에 언제 저렇게 커다란 가 게가 생겼지?

“구경하러 가 보자, 리나.”

“네, 아가씨!”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규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나와 리나는 서둘러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 다. 에른도 잘 따라오고 있는 듯 뒤 에서 강철 그리브가 철컥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가게 앞에 선 나는 감탄으로 입을 벌렸다. 새로 연 가게답게 상가는 무척이나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나처럼 발걸음이 이끌린 사람들인 지 인파 역시 바글바글했다.

“가게 이름이…… 음……?”

간판을 읽던 나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매그너스의 향수 백화점]

향수 백화점? 이렇게 거대한 향수 가게가 생겼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없는데?

아니. 그보다, 저 앞에 붙은 이름.

……불쾌하리만치 익숙한데?

“에른 경, 혹시 말이에요.”

“예, 아가씨. 말씀하십시오.”

“저 매그너스가…… 매그너스 남작 가의, 그 매그너스는 아니겠죠?”

“갈색 부엉이를 보니, 매그너스 남 작가의 고유 문장이 맞는 것 같습니 다.”

간판에 자랑스레 찍힌 문장을 가리 키며 에른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 가게의 주인이 매그너 스 남작, 그 녀석이 맞단 말이지?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장작을 지 펴 주네.’

나는 부득 이를 갈았다.

폰타 매그너스. 내게 향수 사업을 제안하며 말도 안 되는 비율을 들이 밀던 남자.

나를 알기 전까진 향수 사업에 관 심조차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설마, 내 아이디어를 가져다 쓴 건 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눈을 가 늘게 떴다.

“들어가 보자, 리나.”

“네. 아가씨.”

리나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냄새 가 코끝을 찔렀다.

여러 향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게 입구부터 이렇게 냄새가 강 해서야, 시향은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주 위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 게를 둘러보며 코에 시향지를 대거 나, 향수병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저번에 멜리사 양이 뿌리고 온 그 향이지?”

“그런 것 같네.〈첫사랑의 법칙〉과 재료가 같으니까 같은 향수 아닐 까?”

사람들로 가득 찬 가게의 풍경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다시금 살피 고 있는데, 어떤 대화가 내 귀를 사 로잡았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라일락 향수. 라일락 립밤. 라일락 크림, 입욕제……?’

또래로 보이는 영애들이 양손 가득 라일락이 첨가된 제품들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손님

도 신이 나서 라일락 향수를 구매하 고 있었다.

며칠 전 살롱에서 만난 어떤 영애, 영식이 뿌린 향을 발견한 것 같다면 서.

나는 기가 막혀 한숨을 흘렸다.

‘이러다 라일락이란 라일락은 죄다 멸종되겠네.’

나는 매대로 다가가 라일락 향수를 시향해 보았다.

으 ,

나는 대번에 미간을 좁혔다.

내 향수와 비슷한 면이 있기는 했 다. 이 향수에서도 라일락 향이 풍 기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조금도 닮은 점 이 없었다. 내 향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내게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시원한 산들바람. 풀잎에 스치는 햇빛. 촉촉하고 하늘하늘한 꽃잎. 첫 사랑에게 선물하고 싶은 향기.

내가 향에 담고자 했던 그 많은 감각과 느낌들이 이 향수엔 전혀 들 어 있지 않았다.

‘아니, 이걸 어떻게 헷갈리지?’

나는 기막힌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곧 흥분을 가라앉히기로 했 다. 이름이 비슷하니, 내 향수를 제 대로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면 헷갈릴 수도 있었다.

“아리엘 아가씨, 이거, 아가씨 향수 와 너무 다른데요?”

시향지를 집어든 리나가 입을 삐죽

였다.

“그렇지 않나요, 에른 경?”

“저는 향기에 대해선 잘 모릅니 다.”

에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리 나는 개의치 않고 그의 건틀릿에 시 향지를 들려주었다.

결국, 마지 못해 투구를 연 에른이 시향지의 향기를 맡았다.

곧 그가 말했다.

“다릅니다.”

“그쵸? 다르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릅 니다.”

“역시! 아가씨, 에른 경까지도 그 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이런 가 짜…… 흐, 흠. 모조품을 대놓고 판 매하다니. 누가 봐도 아가씨 향수를 흉내낸 거잖아요? 항의해야 해요!”

“ 0 으”

- 도3 .

나는 침음을 흘렸다.

폰타 매그너스가 내 아이디어를 훔 친 건 확실해 보였다.

매그너스가 내 향수를 사업 아이템

으로 무척 탐냈었던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첫사랑의 기억〉이라는 향수의 이름이었다. 누 가 봐도 내 향수를 흉내내기 위한 이름이 아닌가?

정황은 확실하지만, 항의라……,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 보았다. 고개를 쭉 빼도 끝이 보이 지 않을 만큼 거대한 매장이었다.

이런 가게를 수십 개나 가진 사업 가와 이제 막 발돋움하기 시작한 영 세 방문 판매자.

과연 상대나 되는 싸움일까?

어쩌면 그냥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일에만 집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리나 말대로, 매그너스의 향 수는 내 향수의 열화판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영애께서 걸음 하셨군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폰타 매그너스가 싱글거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매그너스 경.”

“제 매장엔 어쩐 일로 방문을 주셨 습니까? 이거, 향수에 조예가 깊으 신 영애께서 자리해 주시니 긴장이 되는군요.”

“어떠십니까, 제가 유통하는 향수 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매그너스가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그의 미간을 뚫어져라 노려보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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