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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8화 (18/153)

〈18화〉

전하께서 왜 여기 계세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 리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행히 아직 세드릭이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직 없는 듯 보 였다.

“있으면 안 됩니까?”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

물론 세드릭이 와선 안 되는 장소 는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안 어울리기는 했 다. 철없는 남녀들이 하룻밤 환상을 꿈꾸며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곳에 세드릭 에반스가 참석하다니.

“방금 그 물음, 반대로 여쭤도 되 겠습니까?”

“ 네?”

“레이디께선 왜 여기 계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벙어리가 되고 말 았다.

‘저기 저 화려한 나비 가면 쓴 남 자 보이시죠? 꽃잎 가면을 쓰고 저 사람한테 접선하려고 했어요. 나비 와 꽃, 하하, 로맨틱하죠?’

안 돼.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그런 소린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최대한 간략하게 대답 하기로 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전하께서 는 이런 곳에 어쩐 일이세요?”

세드릭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의아해 나는 그 를 올려다보았다. 밋밋하지만 고급 스러운 재질의 가면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기다렸던 것에 비해선 시시한 대답 이었다.

하긴, 그렇지. 이런 무도회에 혼자 춤을 즐기러 오진 않았겠지.

새삼 나도, 그도 서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실 분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 셨나 봐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요?”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착 했다면 어서 만나러 가질 않고 왜?

그때 비올라 소리가 귓가를 울렸 다. 모두들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연주되는 왈츠곡. 진짜 무도회의 시 작이 었다.

주변의 남녀들이 둘씩 짝을 지어 밀착하기 시작했다. 아직 짝을 구하 지 못한 사람들도 주변에 있던 이성 의 손을 거침없이 붙잡았다.

손을 맞잡고 있지 않은 남녀는 나 와 세드릭, 둘 뿐이었다.

‘이런, 타이밍 한 번

나는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비운 지 오래된 샴페인 잔을 꼭 쥐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잔의 윗부분을 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잔을 놓쳤다. 바닥 으로 낙하하는 잔을 세드릭이 물 흐 르듯 매끄럽게 잡아채고는, 지나가 던 시종의 은쟁반 위에 그것을 올려 놓았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 곡 어떻습니까?”

참 담백한 청이었다.

여태껏 이 무도회에서 내게 추파를 보낸 남자들과는 대조되는.

나는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새까 만 가면 사이에서 새빨간 적안이 나 를 직시했다. 얼굴의 절반이 가려진 지금, 그 시선은 사람의 것이라기보 다는 짐승이나 마물의 것 같았다. 섣불리 등을 보일 수 없는.

‘춤 한 번쯤이야, 상관없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가면무도회였다. 가면을 쓴

이상, 그 누구도 우리의 정체를 쉽 게 알아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우린 스캔들의 당사자 ‘세드릭 에반스’와 ‘아리엘 윈스턴’ 이 아닌, 그저 가면을 쓴 남녀일 뿐 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세드릭의 손을 잡았다.

“기꺼이요.”

가면 아래로 세드릭의 입매가 슬쩍 호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그가 부드럽게 나를 끌어당겼다. 밀착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려니 고

개를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꺾어야 만 했다.

세드릭이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귓가를 향해 살 며시 속삭였다.

“전하, 송구하오나.”

세드릭이 말해보라는 듯 말없이 나 를 응시했다. 나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저, 춤은 잘 못 춰요.”

평생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 영애 들이야 왈츠쯤은 눈 감고도 추겠지 만, 나는 아니었다.

사교계에 녹아들기 위해 많은 연습 을 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왈츠는 초보자 수준이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올라가 더 과감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쏘 쏘

줌을 마친 우리는 정중히 인사를 나눴다.

나는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 만, 방금 우린 꽤 완벽한 왈츠를 췄 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경탄의 눈 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춤을 출 때 왜 남자의 리드가 중요하다고 하 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런 거에 관심도 없게 생겨 선……/

의외의 면모였다. 역시 귀족은 귀 족이란 걸까.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이상했 는지, 세드릭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가면 너머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나 는 괜히 머쓱해져 고개를 돌렸다.

‘잘난 사람은 얼굴의 반을 가려도 잘났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쓰고도 세드릭은 단연 돋보였다. 가면 아래 로 뻗은 우뚝한 콧날이며, 깎아낸

듯한 턱선, 거기에 훤칠한 몸매까지 갖추었으니 뭇 영애들의 시선을 잡 아끌기엔 충분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나기로 하신 분이 기다리시지 않을까요?”

“축객령입니까, 그거?”

“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봤다. 그냥 물어본 건데 이 날카로 운 대답은 뭐람.

나는 입꼬리를 비죽이며 화제를 돌

렸다.

“그나저나 저인 건 어떻게 알아보 셨어요? 이 자리에만 사람이 수백은 모인 것 같은데.”

벌꿀색 머리칼은 그렇게 희귀한 색 깔은 아니었다. 이 무도회장만 해도 비슷한 머리를 한 여자가 벌써 세 명은 더 있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세드릭이 대답했다.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 모여도

레이디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 냄새.”

“……네?”

냄…… 새?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같은 냄새가 나는 건 당신밖 에 없습니다.”

“……향기라고 해 줄래요?”

같은 뜻이어도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인데…… 내 향수를 얘기한 거였 나.

나는 퉁명스레 중얼거린 뒤 넌지시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이 향?”

“마음에 든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아. 그러셨군요.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원작 공인 일밖에 모르는 남 자가 향기의 예술을 알 리가 있나.

“특이한 향이기는 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내게로 가 까워 졌다.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그가 내 목덜 미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나지막 이 속삭였다.

“사향, 자스민, ……베르가못?”

“……맞아요.”

나는 몸을 물리곤 괴상한 눈으로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안 생겨선 엄청난 개코였 다. 방금 세드릭이 읊은 이름들은

모두 오늘 뿌린 향수의 재료들이 맞 았다.

“굉장히 잘 아시네요?”

“기본적인 소양 정돈 있습니다.”

‘기본적인 소양’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 는 세드릭을 약간 불편하게 쳐다보 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 다.

“또 한 가지 들어가 있는데. 그것

도 맞춰 볼래요?”

“ 0 ”

6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귓가 옆에서, 그가 숨을 들이마시 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세드릭이 옅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 알로나군요.”

“세상에, 어떻게 아셨어요?”

내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알로나는 이 세계에서만 자라는 허 브인데, 민들레나 잔디처럼 길가에 널린 흔하디 흔한 잡초였다. 하지만 향긋하면서도 끝향이 산뜻한, 너무 나도 아름다운 향을 지닌 허브였다.

처음 윈스턴 백작저의 정원을 산책 할 때, 처음으로 알로나를 발견한 나는 코를 박고 한참이나 킁킁댔었 다. 집사가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 었지.

아무튼. 그런 잡초의 향을 공작 전

하께서 알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내 눈빛에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 다.

“할머님께서 화훼 농장을 하실 때, 알로나 밭도 가꾸셨었습니다.”

“정말요?”

나는 놀라움에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내 취향의 향을 지녔다곤 해도, 알로나는 결국 잡초였다. 잡초 로만 이루어진 밭이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가보고 싶어요.”

젠장. 말을 끝맺자마자 나는 후회 했다. 데려다 달란 소리로 들리잖아.

설마, 헤어진 사인데 내 말뜻을 곡 해해 듣진 않았겠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화훼 농장은 할머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매각했습니다. 관리할 사람도 없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다고 여 긴 할아버님의 결정이었죠.”

“……아.”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 죄송해요.”

“아닙니다. 옛날 얘기고. 그나저나 레이디. 다음 납품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계시죠?”

또 그 얘기군. 나는 절레절레 고개 를 저었다. 내가 아닉시아 향을 싸 들고 저 몰래 도망이라도 갈 줄 아 는 건지, 이 남자는 간혹 이런 집착 을 보였다.

“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깜빡했 다간 전하께서 절 잡아먹으려 들 게 분명한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 까요.”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니 었……/

“아아, 여기 계셨군요! 나의 레이 디!”

세드릭의 말을 끊고, 누군가의 외 침이 들렸다.

……아, 설마.

그제야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사 람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

을 엄습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루퍼트가 불쑥 나타나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파우치 밖으로 삐 져나온 꽃잎 가면을 알아보고 온 모 양이 었다.

“레이디 아리엘. 제가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아십니까? 나의 꽃이여!”

……맙소사.

나는 창피함에 입술을 씹었다. 슬 쩍 세드릭을 쳐다보았으나, 다행인 지 불행인지 가면에 가려 그의 표정

은 알아볼 수 없었다.

루퍼트가 세드릭을 흘끔거렸다.

“레이디. 이 분은……?”

“아, 음, 이 분은…… 뭐랄까. 사업 파트너예요. 우연히 마주쳐서요.”

세드릭의 정체를 밝힐 순 없으니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향수를 납품 하고 있는 입장이니 일단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오, 그러시군요……,”

루퍼트가 경계 어린 눈으로 세드릭 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늦게 와 죄송합니다, 나의 레이디. 그럼 이제 가실까요?”

“으 ”

나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루퍼트 경. 오늘 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 나의 꽃, 어디가 아픈가요?

시든 꽃에는 물을 줘야죠. 제가 와 인을 한 잔 가져올 테니……?

“아뇨, 아뇨. 죄송하지만 오늘은 여 흥을 즐길 기분이 아니라서요.”

나는 얼른 루퍼트의 충격적인 대사 를 끊어냈다. 옆에서 세드릭이 헛웃 음 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저번에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 는데, 그새 물 대신 버터를 흡입하 다 온 걸까?

“정말 죄송합니다. 루퍼트 경. 그럼 안녕히.”

나는 꾸벅 인사한 뒤 등을 돌려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조금 느끼하고, 상태가 좋지 않아 도 껍데기만큼은 잘났으니 ‘임시 연 인’ 정도로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 데, 아니었다. 세드릭을 옆에 나란히 놓고 본 순간 나는 내 판단이 틀렸 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람둥이여서 고마워요, 루퍼트 경.’

이렇게 바람맞히고 미안해하지 않 아도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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