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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7화 (17/153)

〈17화〉

“……허억.”

세드릭이 목을 부여잡았다. 숨결이 거칠게 토해져 나오며 기도를 긁었 다.

리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재스퍼! 어서 약을 가져오거라!”

후우.

세드릭이 이마를 쓸어올렸다. 살짝 식은땀에 젖은 흑발이 헝클어졌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리온이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의 세드릭 에반스는 어딘가 위 태로워 보였다.

언제나 흔들림 하나 없이 직선처럼 곧은 남자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 다.

“요즘 상태가 조금…… 악화되신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말랬지, 리온.”

소매 단추를 느슨히 풀며 세드릭이 뱉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부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난 한 달간, 세드릭의 컨디션은 무척이나 들쑥날쑥했다. 한 달 전과

달라진 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 그 여자를 정기적으로 만 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겠지만.’

세드릭은 입술을 씹으며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냈다.

그의 오른손이 정복의 단추를 하나 둘 풀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했 다.

“호오, 이건 마치……

“깊은 숲에 들어온 느낌이군.”

신사들이 신기한 듯 턱을 매만지며 수군거 렸다.

나는 뿌듯한 웃음을 간신히 내리눌 렀다.

“레이디, 이건 정말 물건이군요. 향 이 청량할 뿐만 아니라, 몸이 가뿐 해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정말 그렇군요. 게다가 이 정도 은은한 향이면, 사내에게도 어울릴 법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남자들이 뿌리기에도 부

담 없는 향이로군요.”

마지막으로 향을 맡은 남자가 탐욕 스러운 눈으로 향수병을 바라보았 다.

“레이디, 혹시 이런 향수를 또 구 할 순 없을까요?”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의 의미로 그냥 드릴게요.”

“앗! 정말입니까?”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 자 주변 신사들이 앞다투어 남자를

가로막았다.

“잠깐, 새치기는 안 되지! 엄연히 내가 경보다 더 먼저 여기 와 있었 는데!”

“에이, 백작님, 그게 무슨 상관입니 까. 레이디께서 제게 주신다고 하셨 는걸요.”

“불공평해! 레이디 윈스턴, 제게도 기회를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 녀 석은 보나 마나 귀찮다고 몇 번 뿌 리다 말 겁니다.”

“아니, 그렇게 치면 제일 먼저 온 건 나라고!”

점잖은 살롱에 소란이 일기 시작하 자, 나는 얼른 그들 사이에 끼어들 어 중재했다.

“죄송해요, 여러분. 오늘은 제가 사 용할 한 병밖에 가져오지 않아 서…… 하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해주시니, 혹시 원하신다면 자 택으로 한 병씩 보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야! 정말입니까?”

“영광입니다, 레이디!”

나는 대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사 코 거절했다.

장사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밑밥만 깔러 온 거지.

너무 주목을 끌기 전 재빨리 상황 을 정리한 나는, 뒤늦게나마 살롱의 주인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러 갔 다.

“안녕하세요, 아탈란테 영애, 인사 가 늦었습니다, 아리엘 윈스턴이라 고 합니다.”

“아. 샤를로트의 친구라죠? …… 흠, 반가워요.”

아탈란테가 고개를 까딱였다.

대답과는 달리 썩 나를 반기는 기 색이 아니었다. 설마 내가 향수 영 업을 하려고 온 걸 눈치챘나?

지레 찔린 나는 아탈란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나에 대 한 적개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주 희미하게, 탐탁지 않아 하는 듯한 기색은 보였지만.

설마 진짜 들켰나?

그런 생각을 할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하. 너무 골똘히 고민 말아요, 레이디 아리엘.”

루퍼트가 와인 한 잔을 내게 건네 며 말했다. 그가 자연스레 나를 아 탈란테와 떨어진 기둥 뒤로 이끌었 다.

“아탈란테 영애는 원래 낯선 사람 에게 살가운 편이 아니거든요. 게다 가, 레이디를 소개해준 샤를로트 영 애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 고요.”

“……샤를로트 영애와 사이가 안

좋다고요?”

그럴 리가. 모두들 샤를로트를 좋 아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으 니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빡 였다.

“네. 아카데미 시절 둘이 항상 수 석을 다퉜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 후로 죽, 뭐랄까…… 라이벌 같은 관계랄까요.”

“아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쉽지만 오늘은 아탈란테 영애에게까 지 향수 영업을 하긴 힘들 것 같았 다.

“그나저나, 레이디 아리엘.”

루퍼트가 갑자기 깊게 가라앉은 목 소리로 나를 불렀다. 좋게 말하면 운치 있고, 나쁘게 말하면 느끼한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네?”

“첫 만남부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놀라실지도 모르겠지만……

루퍼트가 조심스레 내 손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내 손등 위로 살며 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레이디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당 황스러워하실 걸 알면서도, 이 마음 만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절묘하게 기둥에 가려져 있

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거, 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 나.

나도 루퍼트 정도면 임시 눈속임용 애인으로 썩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 하던 차였긴 했다. 하지만 모임 첫 날부터 남자를 낚아채간 신입 회원 이 되긴 싫었다. 왠지, 좀…… 인상 이 그렇잖아. 남자 만나러 온 것 같 고.

“루퍼트 경. 감사한 말씀이지만, 조 금 갑작스러워서……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레이디와 급하지 않게 천천 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아……-”

“일주일 뒤, 크뤼거 후작저에서 가 면무도회가 열린다는 것 알고 계십 니까?”

“……소문은 들었어요.”

“부디 참석해 주십시오. 레이디와 춤을 출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제게 선사해 주세요.”

으윽…… 이 사람, 대사 하나하나 가 어쩐지 좀 느끼한데.

잘생긴 얼굴만 아니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까스 로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걸치곤 물 었다.

“하지만, 가면무도회잖아요? 절 어 떻게 알아보시려고요?”

“붉은 꽃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와 주십시오, 레이디. 그러면 저는 레이 디만을 위한 나비가 되어…… 레이 디께 날아가겠습니다.”

……와, 방금 건 정말 심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골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얼굴값 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아니, 이건 얼굴로도 용서가 안 되 는 수준인데?

버터를 서른 개 정도 통째로 삼킨 기분이었다. 나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참자, 아리엘. 꼭 연애 상대가 아 니더라도 얼굴을 익혀 두면 도움이 될 사람이야.’

나는 루퍼트에게 조용히 말했다.

“앞서 나가는 발언이라면 죄송하지 만, 전 진지한 관계는 원하지 않아 요.”

나는 어디까지나 대외용 애인이 필 요한 것뿐이었다. 만약 이 남자와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점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루퍼트가 활짝 웃었다.

“이런, 레이디. 그 점마저도 저와 완벽히 들어맞으시는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리만큼 적임자네, 이 사람.

“무도회장에서 뵐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레이디 아리엘. 그날 만을 고대하지요.”

그제야 루퍼트가 내게서 떨어져 나 갔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쏘 쏘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무도회 당일.

이 세계에 온 뒤로 무도회란 무도 회는 다 참석했지만, 가면무도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많은 가면 사이에서 낯선 기분으 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내 팔꿈치를 살짝 쳤다.

“어머, 실례해요.”

사과하는 상대방의 옷깃에서 은은 한 라일락 내음이 풍겼다. 아주 익 숙한 냄새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답니다.”

나는 눈앞의 여성에게 더없이 자애 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향수 를 구입해준 고객님인데, 팔꿈치 좀 부딪혔다고 어떻게 화를 내겠어.

흐뭇하게 웃던 나는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난제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걸 진짜 써야 하나.’

나는 파우치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 민에 빠졌다.

지금 내 파우치 안에는 꽃잎 모양 의 가면이 들어 있었다. 임시로 쓰 고 있는 평범하고 밋밋한 가면과는 딴판으로 화려한 가면이었다.

‘붉은 꽃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와 주십시오, 레이디.’

일주일 전 루퍼트의 목소리가 다시 금 머릿속을 떠돌았다.

목소리 주인의 준수한 이목구비와 그걸로도 용서하기 힘들만큼 느끼했 던 대사 역시.

‘눈속임용 애인이 필요한 건 사실 이지만…… 그 남자가 과연 적절한 상대일까.’

외모와 조건은 분명 합격점이었다. 물밑에서 수소문해본 바로는, 애인 을 갈아치우는 속도만 빠를 뿐, 성 품 자체는 호방하고 괜찮은 자인 것 같았다.

속으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게 한 곡 허락

해주시겠습니까?”

잘 차려입은 신사가 춤을 청해왔 다. 나는 정중히 그를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실례했군요. 그럼 즐거운 밤 되시 길……:’

남자가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채 인사하곤 떠나갔다. 그리곤 곧바로 다른 여성을 찾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도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낯선 이성과의 짜릿한 하룻밤이 목 표일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인지 혼자 있는 내게 쏟아지는 추파의 수 도 엄청났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거절만 하면서 여기에 서 있을 순 없었다. 때마침 저 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루퍼트의 모습이 보였다. 가면을 쓰 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화려한 나비 가면을 쓸 인간은 그 사람밖에 없었 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래, 만나러 가 보자.’

각오를 다진 내가 파우치 안에서 꽃잎 가면을 꺼낸 뒤, 쓰고 있던 가 면을 벗으려던 순간이었다.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이디.”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거 절의 말을 뱉기 위해.

그러나 내 입술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살짝 열린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목소리는.

설마.’

소란스러운 주변 때문에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런 내 추측을 비웃듯, 어느새 정 면에 나타난 장신의 남자가 슬쩍 미 소를 지었다.

가면에 가려 얼굴은 반만 드러나 있었지만, 확실했다.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전하?”

대답 대신, 새까만 가면 아래 드러

난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었 다.

그 매력적인 미소에 어째서인지, 내 몸이 매에게 들킨 사냥감처럼 뻣 뻣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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