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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6화 (16/153)

〈16화〉

“됐다! 리나, 지금 바빠?”

“앗, 조향실에 들어가시려고요? 저 도 갈게요!”

리나와 함께 조향실 문 앞에 도착 한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붙여 준 호위 기사, 에른 가드너가 그림자처럼 내 뒤에 서 있 었다.

“……전 이제 조향실에 들어갈 건 데요.”

“저도 가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여긴 안 돼요. 저와 리나만 출입하는 곳이라.”

“전 그냥 그림자라고 생각하십시 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에른을 조향 실에 들였다. 그리곤 향초와 보울을 건넸다.

“들어오신 김에 혹시 도와주실래 요? 아르바이트비는 따로 드릴게 요.”

에른이 낯선 눈으로 보울을 바라보 았다.

아니, 낯선 눈이란 건 내 추측일 뿐이다. 투구에 가려져서 당최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 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한 달 만에 ‘아 리엘 조향실’에 새 일손이 늘어난 순간이 었다.

셋이 함께하니 작업시간이 훨씬 단 축되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재료 들을 줄줄이 늘어놓은 오르간을 바 라보았다.

좋아, 일단 에센셜 오일들은 완성 했고. 남은 건 배합이다.

나는 미리 적어 놓은 레시피대로 신중히 오일들을 배합했다. 우선 소

나무 에센스와 싱그러운 베르가못 을. 또 상쾌하고 청량한 향을 더하 기 위해 레몬과 뱀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장의 허브를 첨가했다.

“이제 이틀 정도 놔둬야 하긴 하지 만…… 효과가 궁금하니까 이번만 숙성을 생략해 볼까.”

곧 새 향수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 이 완성되었다.

나는 향수병을 먼저 내 코끝에 가 져다 대고,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흠.”

리나가 긴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 았다. 에른 역시 투구를 쓴 채로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잎에 대고 숨을 쉰 것처럼 청량 한 내음. 시원한 향기가 온몸을 타 고 돌았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휘 감긴 듯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저도요! 저도 맡아볼래요!”

리나가 얼른 자원했다. 나는 웃으 며 그녀에게 향수병을 건넸다.

향을 맡은 리나의 눈이 커다래졌 다.

“와, 우와……-”

“ 괜찮아?”

“소나무 숲에 온 것 같아요. 삼림 욕을 하는 기분이랄까…… 와, 졸음 도 순식간에 가셨어요!”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리나 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리액션으로 항상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번엔 에른을 돌아보았다.

“자, 에른 경도 맡아 봐요.”

“……저도, 말입니까?”

“같이 만들었으니 완성품도 같이 확인해 봐야죠.”

에른이 천천히 내가 내민 향수병을 받아들었다. 커다란 갑옷을 입은 남 자가 조그마한 향수병이 깨질세라 조심조심 두 손으로 코끝에 가져다 댔다.

“어때요?”

리나 외에 다른 사람이 프로토타입 을 테스트해 보는 건 이번에 처음이 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아.”

에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향 수병을 든 채 멍하니 굳어 있을 뿐 이었다.

“왜 그래요?”

별론가?

역시 숙성을 시켰어야 했나. 머쓱 해진 나는 도로 향수병을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커다란 손이 향수병을 놔 주지 않았다.

에른 경?”

좀 놔 봐요. 부서지겠어.

에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 가 입을 열었다.

향수입니까,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리나와 어리둥절 시선을 마주 쳤다. 설마 시비인가? 이까짓 걸 향 수라고 만들었냐는……?

에른이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생각보다 정 말…… 이상적인 소나무의 향기가 나서 순간 놀랐습니다.”

“그래요?”

나는 화색을 띠었다. 칭찬인 거지?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에 듭니다.”

참 간결한 대답이었다. 리나처럼 다채로운 미사여구 같은 건 하나도 없는.

하지만 왜인지 담백한 에른의 대답 역시 리나 못지않게 기뻤다.

“정말요? 이걸로 장사를 할 생각인 데, 얼마나 팔릴까요?”

에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곧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도 사람들은 모두 살 것 같습니 다.”

“네? 아하하.”

그 과장된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 뜨리고 말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네. 제도 사 람들이 합심해서 하나씩만 사 주면, 억만장자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잖

아?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요. 흠, 일단 두 사람에게 통과했으니까…… 시제 품은 일단 성공이라고 생각하면 될 까.”

나는 노트에 첫 번째 프로토타입의 결과를 적었다.

조금 더 완벽하게 다듬은 뒤 살롱 에 가지고 가야지. 이번에도 샤를로 트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펜을 놀렸다.

쑤 쑤

나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 듬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다름 아 닌 새 향수를 사람들 앞에 처음 선 보이는 날이었으니까.

이 이벤트를 위해 장소도 아주 신 중히 골랐다.

고민 끝에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아틀란테 백작 영애의 회원제 사교 클럽.

사교계에서 한가락 한다는 인물들

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라 할 수 있 는데, 샤를로트 덕분에 나도 한 발 을 걸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샤를로트 영애.’

나는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샤를로트는 내게 초대장만 건네줬 을 뿐, 다른 스케줄 때문에 참석하 지 못했다. 오늘은 온전히 혼자만의 능력으로 향수 영업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각오를 다진 나는 드레스룸에서 나 왔다.

아탈란테 백작가의 집사가 나를 맞 았다.

“준비되셨으면 입장을 도와드리겠 습니다.”

“네, 부탁해요.”

유서 깊은 아탈란테 백작가답게, 저택은 무척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같은 백작이지만 가문에 힘이 부족 해 딸까지 팔아먹으려 하는 윈스턴 백작가와는 차원이 달랐다.

“윈스턴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

다.”

집사가 살롱의 문을 열었다.

나는 살짝 심호흡하곤, 우아한 미 소를 입가에 걸쳤다. 열린 문 너머 로 사교 클럽 회원들의 시선이 일제 히 내게로 쏠렸다.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장사를 하기 위해선 일단 좋은 인 상부터 남겨야지.

긴장을 숨기고, 미소를 머금은 채 살롱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디딘 순

간이 었다.

“아리엘 님! 어서 오세요!”

……응?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 다.

맙소사. 며칠 전 무도회에서 맞닥 뜨렸던 소녀들 중 하나, 루나가 나 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세상에, 아리엘 님! 아리엘 님도 회원이 되신 건가요? 아리엘 님과 같은 클럽의 회원이라니, 너무너무

영광이에요!”

루나가 한달음에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하하, 억지웃음을 걸쳤다.

“아, 안녕, 루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저도요! 아버지께서 억지로 밀어 넣으신 모임이라 지루했는데, 아리 엘 님을 만날 줄이야! 집에 가면 아 버지께 감사하다고 해야겠어요.”

루나가 속닥거렸다.

아버지가 억지로 밀어 넣은 모임이 라니…… 여긴 분명 웬만한 사교계 인사조차 쉽게 들어올 수 없는 클럽 인데.

생각을 마치기도 전 루나가 손을 흔들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여러분! 여기 이 분은 제가 경애 하는 아리엘 윈스턴 영애세요.”

“어서 오십시오, 윈스턴 영애.”

“뵙게 되어 반가워요.”

루나가 나를 소개해주자, 클럽 회

원들이 한결 가벼운 분위기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레몬색 머리를 한 금발의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루퍼트 제 논이라고 합니다.”

루퍼트 제논?

들어본 적 있는 듯 익숙한 이름에 나는 머릿속을 뒤적였다. 그러고 보 니 사교계에서 몇 번 제논 남자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 같긴 했다.

아마, 꽤 잘나가는 유통회사의 대

주주라고 했던가?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아 름다우시군요.”

루퍼트가 내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나는 당황 반, 진심 반으로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저 역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제논 남작님. 아리엘 윈 스턴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레이디의 손등에서 마치 솔잎처럼 상쾌한 향이 나는군요.”

어라? 이 사람 코가 좋네.

나는 활짝 눈꼬리를 접으며 말했 다.

“어머나, 정확히 맞추셨네요. 소나 무 숲을 컨셉으로 향수를 만들어 보 았거든요.”

“레이디께서 직접……?”

루퍼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맙소사. 샤를로트 영애에게 듣기

는 했지만, 정말 재능이 뛰어나신 분이시군요.”

“과찬이세요, 부끄럽네요.”

“아니, 절대 과찬이 아닙니다. 이 봐, 슈렌. 자네도 정원에서 소나무 가꾸는 게 취미라 하지 않았던가?”

루퍼트의 호들갑에 클럽 회원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 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때 루나가 사람들을 헤치곤 내게 다가왔다.

“아리엘 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이 중요한 순간에?

아쉬움이 들었지만, 루나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우리는 살롱 한 편에 마련된 자그 마한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아리엘 님, 루퍼트 경이 아무래도 아리엘 님께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요. 여우 같은 남자가 보는 눈만 높 아선!”

루나가 꼭 주먹을 쥐곤 씩씩댔다. 나는 풋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부른 거야? 그거 알려주려 고?”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은, 저 사람. 굉장한 바람둥이거든요.”

루나가 속삭였다. 나는 한쪽 눈썹 을 들어올렸다. 뭐, 화려하게 생긴 외모긴 했다. 얼굴값을 하게 생겼달 까.

“그러니?”

“네, 한 번엔 한 사람만 만나기는 하는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텀 이 엄청나게 빠르거든요. 물론 아리 엘 님께서 알아서 잘 처신하시겠지 만, 루나는 조금 걱정이 돼서……;

흐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도 그 렇고, 내게 보이는 눈빛도 그렇고, 저 루퍼트라는 남자가 내게 관심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슬슬 새 애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던 참

이었다. 옆구리가 시리다거나 외로 워서는 아니었다.

‘새 연인을 만들면, 더 이상 나와 세드릭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더불어 매일같이 귀찮게 선 자리를 들이미는 윈스턴 백작에게 핑곗거리 를 댈 수 있을 것이고.

“괜찮아, 걱정하지 마, 루나.”

나는 루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내가 루퍼트 남작의 바짓가랑일 붙잡고 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리엘 님? 그 말씀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루퍼트와 뭘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니었지만, ‘루퍼트 제논’ 정도면 썩 괜찮은 새 연애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할 것도 아니고, 잠깐 눈속임 용으로 만나는 건데 뭐.

‘지금 내 상황에서 바람둥이라는

건 오히려 플러스지.’

정리할 때가 됐을 때, 그가 내 치 맛자락을 붙잡고 우는 일은 없을 테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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