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5화 (15/153)

〈15 화〉

“와, 생화가 가득하네요.”

나도 모르게 감탄하자 주인이 생긋 웃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제일 신 경 써서 가꾸고 있는 곳이거든요.”

“어머나, 히비스커스까지이건 지금 피지 않는 꽃 아닌가요?”

“정원 겸 작은 온실 같은 느낌으로 꾸몄거든요. 그래서 히비스커스 외 에도 제철 아닌 꽃들을 보실 수 있 을 거예요.”

“향이…… 무척 좋네요.”

나는 히비스커스에 코끝을 가까이 했다. 향긋한 냄새가 금세 스며들었 다.

“온실 속에서 기른 꽃은 대부분 향 이 약하던데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어머, 감사합니다. 영애. 꽃에 조 예가 깊으신 것 같네요.”

“조예가 깊다기보단…… 좋아해요.

그냥.”

빙의하기 전의 생에서부터 꽃을 참 좋아했었다. 어쩌면 향수에 빠지게 된 이유 역시 단순히 꽃향기가 좋아 서였는지도 몰랐다.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된 뒤부턴, 문병으로 받은 꽃다발도 모 조리 치워버렸지만.

볼 때마다 알고 있는 꽃향기를 더 는 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쳤으 니까.

옛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나는 얼른 표정을 감추곤 주인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꽃에 관한 이야기였다.

‘앗, 잠깐. 너무 우리끼리만 이야기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살짝 세드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그는 지루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턱을 괸 채 가만히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나를.

아.’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도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대화 즐거웠어요, 로젤리아.”

“호호. 저야말로 조예가 뛰어나신 분과 이야기해 영광이었습니다.”

로젤리아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세드릭 앞에서 띄워주니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로젤리아가 나가자, 작은 정원에는 나와 세드릭만이 남았다.

방금까지 로젤리아와 쉼없이 수다 를 떨었기 때문인지, 이 정적이 괜 스레 더 의식되었다.

그러나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세드 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을 겪은 건 오늘이 처음이 십니까?”

그런 일? ……아, 그 파파라치. 나 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아리엘 윈스턴이 세드릭의 연인으 로 유명한 건 사실이었지만, 일간지 를 장식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아리엘이 신문에 실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혹시?

나는 짧은 가설에 눈을 가늘게 떴 다.

세드릭의 연인일 때는 세드릭이 무 서워서 건드리지 못하다가, 헤어졌 다는 이야기가 파다해지니 이제서야

깔짝대는 건가?

이런 재수 없는 것들!

나는 아까 치안대로 끌려가던 남자 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앞으로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세드릭이 말했다. 고민에 잠긴 듯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가 전하의 전 연인이어서요? 그 런 거라면 제 화제도 곧 사그라들지 않을까요.”

“뭐. 그것도 있지만. 레이디께서 제 조향사라는 사실만으로 관심을 가질 이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건 대외 비밀이 아니었던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드릭이 광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측근들 외에 거의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아리엘이 광증을 가라앉히는 아닉시아 향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 실 역시 비밀이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완전히 비밀에 부쳐 주시지는 않 더군요.”

누가?

……설마, 내가?

세드릭의 쓴웃음을 마주하며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작중 아리엘과 세드릭의 계약 연애 에는 분명 비밀 엄수라는 조항이 적 혀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걸 지키지 않았 다. 내 남자의 향을 직접 제조하는

로맨틱한 조향사, 따위의 타이틀을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싶었던 게 아 닐까 싶다. 아닉시아 향에 대해서까 지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세드릭에 게 향수를 만들어준다는 사실 정돈 여기저기 흘렸을 확률이 높았다.

“뭐.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내 표정을 본 세드릭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아뇨, 정말 죄송해요.”

내 치부를 누군가 은근슬쩍 사람들 에게 흘렸다면 나 역시도 무척 불쾌 했을 것이었다.

재차 사과하자, 세드릭이 쓰게 웃 었다.

“레이디께선 정말 이상하시군요.”

“네?”

“요즘 들어 이상해지셨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무슨 뜻이지. 나는 바짝 긴장했다.

에이. 설마 알맹이가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당사자인 나조차 믿기지 않는 일을 이 남자가 어떻게 알겠어.

어느새 씁쓸한 표정을 지워낸 세드 릭이 여유로운 미소를 걸쳤다.

“뭐, 아무튼. 사과를 받자고 한 말 은 아니지만,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 네?”

“들어주신다면 흔쾌히 용서해 드리

죠.

부탁이라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나는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무슨 부탁인가요?”

“호위를 하나 붙여 주십시오.”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상상도 하 지 못한 내용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횡설수설했다.

“……제가 전하께요? 어, 호위 라…… 죄송해요, 제가 그런 방면엔 문외한이라. 공작님을 호위할 정도 면 고급 인력이어야 하는데, 제 지 갑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아뇨, 당연히 제가 레이디께 호위 를 붙여드린다는 얘깁니다.”

“네? 저한테요? 호위를?”

내 눈이 동그래졌다.

웬 호위? 나는 공작도, 공주님도 아닌데?

“항상 사용인 한 명만 대동하고 다 니시는 것 같더군요. 제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요. 안전에 좋지 않습 니다.”

세드릭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능청스러 운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누가 보면 정말 나를 걱정해주는 줄 알 것이다.

“그러니 제가 호위를 한 명 붙여드 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호위까지는……,”

“에른.”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의 뒤에 동상처럼 서 있던 기사가 걸어 나왔다.

“예. 전하.”

“오늘부턴 윈스턴 영애를 호위하도 록.”

“예, 전하.”

“네?!”

나는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호위 기사가 처벅처벅 걸어 내게로 다가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전 괜찮은데요!”

“실력 하난 제국에서 제일가는 자 입니다. 그 누구도 레이디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해줄 겁니다.”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나는 호위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기사는 투구로 온통 얼굴이 가려져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조 차 알 수 없었다.

세드릭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 다.

“요즘 귀족 가문 영애들은 호위 한 둘씩은 기본적으로 거닐고 다닙니 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분은 전하 의 직속 호위 기사잖아요! 부담스럽 다고요!”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월급까지 바라

다니 강도예요?!”

세드릭이 설핏 미소를 짓곤 에른을 쳐다보았다.

“빈틈없이 모셔라.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놈이 있으면 볼 것 없이 실 력을 발휘하도록.”

“예, 전하.”

에른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땅 에 붙였다.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투구 사이로 유려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솔직히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든든 함이 끓어오르는 외모긴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 하고 있으니,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도 쿨쿨 숙면할 수 있을 것만 같았 다.

하지만. 나는 못내 미심쩍음을 감 추지 못하고 물었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세드릭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잘생기긴 엄청나게 잘생겼네.’

은은한 조명 아래 화려하게 반짝이 는 적안. 유려한 콧대와 그에 비해 단단해 보이는 턱선.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 고 있었다.

과연, 이 정도 미모는 지녀야 남자 주인공을 해먹을 수 있는 건가. 그

런 때아닌 잡념에 빠져 있을 때였 다.

고개를 든 세드릭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간의 정이라고 해 둘까요.”

“ 예?”

“계약 관계라곤 해도 제가 그간 연 인으로서 썩 완벽히 처신했던 건 아 니지 않습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 다. 말의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치고 는 부당하리만치 매력적인 웃음이었

다.

“그런 걸 신경 쓰고 계셨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 아무튼.”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스 레 화제를 돌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는 제 ‘호의’를 받아 주셨으면 합니 다.”

나는 세드릭의 ‘호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사가 더없이 믿음직 한 모습으로 내게 부복하고 있었다.

하아. 그래-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그냥 못 이기는 척 들어줄까.

뭐, 내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당분간만이에요.”

파파라치들이 질려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만.

“잘 부탁해요. 기사님.”

에른이 투구를 쓴 채 내 손등에 정중히 키스했다. 금속의 차가움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세드릭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나는 윈스턴 저택 정원의 흔들의자 에 앉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 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 요, 아가씨?”

“새 향수 생각.”

라일락 향수는 일단 대히트를 쳤 다.

이름도 지어 주었다.〈첫사랑의 법 칙〉.

이름이 갖는 효과는 중요했다. 그 냥 ‘그 라일락 냄새나는 향수’라고 불리는 것보단 특정한 이름이 있는 편이 훨씬 더 유명세를 타기 유리하 니까.

아무튼, 지금은 무척이나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열기가 식기 전 후 속작까지 사람들의 호감을 사야 했 다.

‘이번엔 좀 기능성이 첨가된 향수 를 개발해 볼까?’

가령, 저번에 만들어 봤던 향수처 럼 기력이 회복된다든가.

처음 만들었을 땐 배합을 살짝 삐 끗해서 리나를 폭주하게 만들었지 만, 배합을 잘 조절한 끝에 지금은 딱 적절한 수준으로 기력 상승 효과

를 볼 수 있었다.

‘향은 기능이랑 어울리게 상쾌한 쪽으로…… 그래. 깨끗한 소나무 향 이 좋겠어.’

나는 노트에 새로운 배합식을 정신 없이 적기 시작했다. 곧 그럴듯한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물론, 아직은 이론일 뿐이지만. 이론을 현실로 구 현하기 위해선 실험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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