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럴 수가!”
“왜 그래요?”
“가게가 이전했나 봅니다! 아이고, 제가 미처 몰랐네요. 정말 죄송합니 다, 아가씨. 이전한 곳으로 금방 데 려다 드리겠습니다!”
과연, 로스텔라의 입구에는 장소를 이전했다는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 다.
이런. 나는 난감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 장소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꽉 막힌 차도를 통해 이동하려면 한참은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냥 걸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나는 마차 문을 열었다.
“먼저 걸어갈게요.”
“네? 아이고, 아가씨. 발 다치십니 다.”
“바로 근처인걸요, 뭐. 마차론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내 말에 수긍한 마부가 주차만 하 고 오겠다며 마부석에 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길을 나섰다.
‘사람이 진짜 많긴 많네. 그나저나 약도상으로는 이 근처였는데……/
머릿속으로 약도를 떠올리며 차근 차근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핑!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렸다. 핀 볼을 튕기듯 경쾌한 소리가.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 을 돌아보았다.
인파 속에서 남자 하나가 눈에 띄 었다. 남자는 눈에 희한하게 생긴 마도 기계를 대고 있었다.
‘……뭐지?’
저 기계, 어쩐지 내 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음. 기분 탓이겠지.
나는 고개를 젓곤 다시 약도를 바 라보았다. 지도 속의 지형지물을 살 피며 몇 걸음을 더 내디뎠을 때였 다.
핑! 핑! 핑핑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본 그 남자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리곤 눈에 대고 있던 마 도 기계를 황급히 내렸다.
나는 그 기계를 유심히 쳐다보았 다.
저걸 눈에 대고 있던 포즈.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던 마도 기계 속의 수정구.
혹시, 저거. 카메라인가?
‘이 세계에도 카메라와 같은 기계 는 있을 테니까.’
그럼 나 지금, 저 남자한테 몰래 사진 찍힌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남자를 부르자,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그가 몸을 틀곤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눈을 찡그리곤 한 번 더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거기 손에 기계 든 남자 분.”
남자가 몸을 굳혔다.
인파를 사이에 두고, 우리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몇 초 뒤.
“어? 저기요!”
남자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수상쩍은 녀석이다! 내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경보가 울렸다. 생각하기 도 전에 발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저기요!”
“따, 따라오지 마세요!”
“야! 거기 안 서!”
나는 구두 신은 발로 힘차게 달렸
다.
하지만 남자의 달리기 실력이 좀 더 좋았다. 게다가 남자는 빼곡한 인파 사이를 다람쥐처럼 날래게 파 고드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 결국 나와 남자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저 남자 좀 잡아주세요!”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워 낙 인파가 많은 탓에 목소리가 묻혔 다.
그렇게 얼마 정도를 달렸을까. 다 행히 외곽으로 접어들었는지, 사람
들의 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남자의 등이 훤히 보였 다. 나는 구두까지 벗어 손에 쥐고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고!”
“으악, 무슨 발이 저렇게 빨라!”
그렇게 말하는 지가 더 빠르면서!
나는 악으로 달렸다. 남자와의 거 리가 조금씩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으아악으
남자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난 남자의 옆에 선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기다란 다리로 멋지게 발을 걸어 쓰러뜨린 누군가가 내게 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몸이 움찔 굳었다. 어라……,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누굽니까, 이 남자는?”
나는 무릎을 짚고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 었다.
이런 장소에서 저 남자와 맞닥뜨릴 줄이야.
“고, 헉, 헉. 공작 전하.”
“……숨 좀 고르십시오.”
헥헥대는 스스로가 창피했지만 어 쩔 수 없었다. 허파가 뒤집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세드릭은 나동그라진 남자의 어깨를 한쪽 발 로 밟고 있었다. 남자는 버둥거릴
뿐 핀셋에 걸린 곤충처럼 옴짝달싹 못 했다.
겨우 진정한 나는 남자에게로 성큼 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손을 내밀었 다.
“저기요, 도망가시던 분. 그거 이리 줘요.”
“흐, 흑. 다, 달라니 무엇을……-”
“소중히 껴안고 있는 그 기계, 제 게 넘기시라고요.”
나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 다.
죽상이 된 남자가 마지못해 내게 마도 기계를 내밀었다.
나는 기계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생김새가 좀 다르긴 하지만, 확실히 내 세계의 카메라와 기능은 비슷해 보였다.
그러니까…… 으음. 찍은 사진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마도 기계를 이리저리 돌렸 다. 부품을 당기고 긁자, 남자가 아 이고 앓는 소리를 냈다.
“허엉, 비싼 거예요……,”
“무슨 기계가 영 복잡하게 생겼네.
이거 찍은 사진은 어떻게 보나요?”
“잠시.”
세드릭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기계를 이리저리 조작했다.
그러자 기계 뒤편에 박힌 수정구에 영상이 떠올랐다.
“아! 이거다. 감사해요, 전하.”
“천만의 말씀을.”
나는 마도 기계에 떠오르는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수정구 안에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갇혀 있었다. 전부 몰래 찍힌 듯, 이쪽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도 아니면 돈이 무척 많아 보이는 사람 들이었다. 나도 얼굴을 아는 유명인 사들이 몇 있었다. 샤를로트의 모습 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모습이 보였 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엎어져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파파라치군요, 당신.”
이 세계에도 ‘파파라치’라는 용어 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뜻이 통했는지 남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같이 수정구를 구경하던 세드릭이 남자의 멱살을 들어올렸다.
“감히 누굴 찍어. 죽고 싶나?”
“히, 히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 다! 집에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어 서요! 빵값이 없어서 그만!”
빵값?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이 사진을 누군가에게 팔아치 우려 했다는 건데.
“대체 누가 제 사진을 사 간다고 한 거죠?”
“그, 그게…… 그, 그러니까……,”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마레유 일간지, 샌즈 주간지도 산 다고 했고, 푸치 신문도……
“마레유? 샌즈?”
“모두 삼류 가십지들입니다. 레이 디가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남자의 멱살 을 더욱 높이 들어올렸다.
“이런 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히익! 살려주세요!”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남자가 눈 을 질끈 감았다.
세드릭이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 려 하는 게 문득 낯설었다.
좋아하는 상대는 아니더라도, 곤경 에 처한 레이디를 모른 척하진 않는 다는 건가.
“파파라치를 처벌하는 법령도 있나 요?”
“물론입니다.”
“그럼 법대로 하죠. 법대로.”
“흐음. 그럴까요. 레이디께서 원하 신다면.”
“끄악!”
세드릭이 멱살을 놓자 남자가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잠시 후 신속히 출동한 치안대가 남자를 잡아갔다.
몰래 사진 찍는 거, 여기서도 큰 범죄겠지? 죗값만큼 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쯧쯧 혀를 차던 나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이 나 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발을.
“……레이디, 맨발로 달리셨던 겁 니까?”
“아…… 아하하. 구두 신고는 달리 기가 힘들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하아.”
한숨을 쉰 세드릭이 팔을 내밀었 다.
“ 업히십시오.”
“네에?”
“저기 제 마차가 있습니다. 거기까 지 업혀 갑시다.”
“아, 아뇨! 구두 신으면 돼요!”
“발에 생채기가 났는데.”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어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나는 황급히 구두를 신었다. 살짝 쓰라리긴 했지만 걸을 만했다. 뭐가 됐든 세드릭의 등에 업히는 것보단 나았다. 남자주인공의 등이라니, 너
무 황송해서 악몽을 꿀 것 같잖아.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자, 얼른 가죠! 마차가 어디라고 하셨죠?”
세드릭이 또 작게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황급히 마차 를 향해 걸어갔다.
쏘 #
〈로스텔라〉는 아주 한적하고 고풍 스러운 장소였다.
“와…… 세상에.”
나는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굉장 히 신기한 살롱이었다. 겉보기엔 그 다지 커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입 구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아주 널 찍했다. 한가운데엔 분수까지 설치 되어 있을 정도였다.
손님들도 심상치 않았다. 몇 번 신 문에서 얼굴을 본 적 있는 유력가들 이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높으신 분들은 이런 곳에서 만나 나 보네.’
별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살롱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얼른 나와 세드릭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랜만에 찾아 주셨네요. 식사도 함께하시겠어요?”
“아니.”
고개를 저은 세드릭이 문득 나를
쳐다보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사실 안 했다. 시간이 애매해서.
짧게 만나고 헤어질 테니 식사는 다녀와서 할 생각이었다.
순간 멈칫한 나를 보곤 세드릭이 주인에게 말했다.
“식사도 2인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2인분이라니. 나는 세드릭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미 식사해서 거절한 거 아니었 나? ……설마 나 혼자 먹기 민망할 까 봐 배려하는 건가.
음,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배 려할 리가.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도 배가 고파 진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주인이 안 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 물과 꽃으로 가득한, 마치 작은 정 원처럼 아름다운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