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폰타 매그너스가 뛰어난 사업가라 는 것은 분명했다.
그와 손을 잡는다면 분명 내 목표 는 훨씬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단 삼 할의 비율이라고 하더라도 독립 할 자금쯤은 순식간에 모을지도 몰 랐다.
하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 었다.
답이야 어디에나 있다. 반드시 입
담 더러운 사기꾼과 함께해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매그너스 남작이 허리를 숙였다. 납품하지 않겠다는 내 말이 무서워 사과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에 겐 별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 저 세드릭에게 밉보일까 무서워 사 과하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두고 보자고.
나는 다짐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매그너스 남작이 오늘을 떠올리며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리라고.
“그럼 전 이만, 먼저 실례하겠습니 다.”
나는 세드릭을 향해 예법에 맞을 정도로만 인사했다.
그대로 테라스를 떠나려는데, 누군 가의 발걸음이 바로 뒤에 바짝 따라 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죠?”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자, 뒤따라 오던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숙여 속 삭였다.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그걸 물으려고 따라온 거야?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세드릭이 묘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괜찮으신 것 같군요.”
“방금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망신당한 건 매그너스 남작이지, 제가 아니니까 요.”
“지당한 말씀이시긴 합니다만.”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세드릭이 수 긍했다.
설마, 진짜 내가 걱정돼서 따라온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순순히 용건을 밝히라 는 눈빛이었다. 세드릭이 그제야 본
론을 꺼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 까?”
“……왜요? 전하께서도 사업 제안 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사업 제안……? 정말 그자와 동업 할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뇨, 일방적으로 제안받은 거예 요. 걷어찬 건 방금 전하께서도 보 셨을 거고요.”
세드릭이 더 기묘한 표정을 지었 다. 잠시 그가 낯선 것을 맞닥뜨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침묵은 잠깐이었다. 세드릭 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아니, 따지고 싶은 거랄까.”
“……전하께서 제게요?”
살벌한 소리였다. 에반스 공작이 내게 뭔가 따질 것이 있다니.
이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었 던가? 설마, 그럴 리가. 세드릭과는 몇 주 전 마지막 만남 이후 스쳐
지나간 적조차 없었다.
긴장하고 있는데, 세드릭이 예상 밖의 단어를 꺼냈다.
“아닉시아 향.”
“……예?”
“납품이 왜 이렇게 늦는 겁니까.”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불평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세드 릭에게 아닉시아 향을 납품하기로 약속한 기간은 한 달마다였다. 지난 번 아닉시아 향을 보냈던 날로부터 그새 한 달이 지났던가?
아니, 절대 아니었다. 내가 그 중 요한 일을 잊었을 리 없었다. 잊었 다간 수도가 풍비박산날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잊어.
나는 황당함을 숨기고 항변했다.
“아직 한 달 안 지났잖아요, 공작 님. 제 기억이 맞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요.”
“한 달이 안 지났다고?”
세드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날 닦달한 거 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 안 지났어요.”
“그럼 기간을 좀 줄이죠.”
“ 네?”
“이 주에 한 번으로.”
갑작스럽고 황당한 요구에 나는 눈 을 끔뻑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향수는 한 달 치를 함께 드릴 예정이에요. 굳이 기간을 줄일 이유가 없어요.”
“그 한 달 치 벌써 다 썼습니다.”
“네?”
벌써 다 썼다고? ……그 양을?
분명 향수는 한 달 치보다 조금 더 넉넉히 담았었다.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용법에 맞게 제대로 사용하신 것 맞아요? 벌써 다 쓰셨을 리가 없는 데?”
“조금 남발한 것 외엔 용법에 맞게 사용했습니다.”
용법을 안 지켰다는 얘기잖아!
나는 순간 덜컥 겁에 질렸다. 아닉 시아 향에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하지만, 세드릭은 특 이 체질을 지녔다. 그가 향을 과용 한다면 어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 길지도 몰랐다.
“괜찮으세요? 이상한 곳은 없으시 고요? 심장 박동이 빠르다든가, 잠 이 잘 안 온다든가!”
세드릭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딱히
휴, 그렇다면 다행이고.
다행히도 세드릭의 몸에 무슨 문제 가 생긴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안도 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세드릭이 덧 붙였다.
“뭘 먹어도 허기가 지고, 오감이 예민해진 것 같은 느낌이라면 있긴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원작 소설에선 세드릭의 폭주에 대
해 그리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더라, 하는 식 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먹어도 허기가 지 고 몸이 예민해졌다니…… 듣기만 해도 불길했다. 꼭 폭주의 전조 증 상 같아서.
‘설마, 지금 간당간당한 상태인 건 아니겠지.’
나는 두려운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 다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남자가 무 시무시한 생화학 병기로 보였다. 혹
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라거나.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나 저나, 들어보니 상태가 좀 안 좋으 신 것 같은데요. 그간 무슨 일이 있 으셨나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만……
세드릭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덧붙였다.
“주말마다 당신을 만나러 가지 않 게 된 것만 빼면.”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런 대답 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건 공작님 상태랑은 아무 연관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 아무튼. 향은 오늘 돌아가자마 자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럼 괜찮 으시 겠죠?”
세드릭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그러더니 문득,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물건은 소포로 보내시는 겁니까?”
“네? 그야…… 그렇죠. 저번에도 그랬으니까요.”
세드릭이 또다시 침묵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공기가 간지러워 내가 먼저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먼저 말했
다.
“저희 계약에 대한 것 말입니다 만.”
“네.”
아리엘 윈스턴은 한 달 주기로 세 드릭 에반스에게 아닉시아 향을 반 드시 제공한다. 는 골자의 그 계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목을 좀 바꿀 수 있겠습니까?”
“네? 무슨 항목이요?”
계약 내용은 채울 것도, 뺄 것도 없이 아주 완벽하고 심플했다. 내 물음표에 세드릭이 묘한 미소를 지 으며 대답했다.
“조건을 하나만 더 추가하죠. 향수 는 레이디께서 직접 내게 건네주는 걸로.”
“……예?”
“내가 레이디께 가도 좋고, 레이디 께서 내게 와주셔도 좋고. 그거야 그때그때 사정에 맞추는 걸로 하고, 아무튼 향수와 대금은 직접 거래하
는 걸로 합시다.”
“실례지만, 전흐!'. 왜 굳이 그런 항 목이 필요하죠?”
굳이 번거롭게 면대면으로 만나 거 래해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물음에 세드릭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시험?”
“막무가내라면 미안합니다. 대신 추가로 금액을 더 지불하죠.”
“전하. 아시겠지만 저흰 막 이별
스캔들을 겪은 사이예요. 거래를 위 해서라곤 해도 단둘이 함께 있는 모 습이 괜히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라 도 하면……
“열 배로 드리겠습니다.”
순간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아리엘은 지금껏 세드릭에게서 재 룟값 이상의 대금을 받지 않았었다. 사랑하는 남자 상대로 장사를 하고 싶진 않은 심정이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아닉시아 향은 재료비만 따 져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그것의 열 배라니. 한 달, 아니. 이젠 이 주
지. 이 주마다 재료비 열 배의 수익 을 올리면……-
쨍그랑, 쨍그랑. 금화 쌓이는 소리 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황금의 유혹에 넘어가고만 나는 고 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하. 어차피 이 주에 한 번이니까요.”
“거래 성사로군요.”
“거래 성사예요.”
세드릭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 다. 결과가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
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는 단어에 나는 순간 굳 었다.
그렇지. 내 입으로 오늘 돌아가자 마자 향수를 보내겠다고 했었으니, 당장 내일 찾아가야 하는구나.
이 걸어 다니는 생화학 병기와 내 일 또 마주할 생각을 하니 속이 얹 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이니까 괜찮겠지. 향수 만 건네주면 될 테니까.
나는 꾸벅 예법에 맞춰 인사했다-세드릭은 완벽히 우아하고 귀족적인 몸짓으로 답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내 앞으로 우편 한 통이 와 있었다.
발신인은 세드릭 에반스였다.
[오늘 네 시경,〈로스텔라〉에서 뵈 었으면 합니다.
어려우시면 제가 윈스턴 저로 찾아가겠습니다.]
강직한 듯 유려한 필체였다. 글씨 체에서 세드릭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쪽지를 전달한 집사가 발신인을 보 았는지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지 만 무시했다.
오랜만에 향수를 만들지 않고 푹 쉬던 나는,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외출 채비를 하고 저택 밖을 나섰 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마첼란 지구, 로스텔라.”
마부가 말고삐를 흔들었다. 마차가 움직이면서 부드럽게 덜컹거렸다.
그러나 그런 속도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마첼란 지구에 들어서자마 자 마차는 채 몇 바퀴조차 움직이지 를 못했다.
나는 초조한 손짓으로 품속에서 회 중시계를 꺼냈다. 아직은 늦지 않았 지만, 이 속도라면 약속 시간에 늦 을지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창밖으로 고개 를 내밀었다.
“세상에, 무슨 날인가? 웬 사람이 이렇게……?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도도, 마차가 다니는 차도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축제라도 열리는 날인가?’
날을 잘못 잡았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이 속도라면 차라리 걷는 게 낫겠 는걸. 하지만 다행히 약속 시간 직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마부 의 비명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