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반갑습니다, 남작님.”
“이야.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훨 씬 더 아름다우시군요. 그 어떤 꽃 다발도 레이디 앞에선 빛을 잃을 것 같습니다.”
“구닥다리 대사네요, 매그너스 경.”
“저희 아리엘 님은 세련된 걸 좋아 하세요.”
남작이 입을 열자마자, 악녀 군단 이 병아리처럼 한 마디씩을 보탰다. 나는 소녀들에게 쉿, 하고 검지를 올려 보였다. 소녀들이 금방 합죽이 처럼 조용해졌다. 매그너스 남작에 대한 경계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지 만.
“죄송해요, 남작님. 뭐라고 하셨 죠?”
“아, 하하…… 굉장히 재기 넘치는 레이디들이시로군요. 흠, 흠. 사실 계속 레이디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 를요?”
“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서요.”
“ 뭔가요?”
“여기서는 좀……, 카테고리만 살 짝 말씀드리자면, 사업 얘기입니다.”
“사업?”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웬 이상한 사람 이 붙었나 하고 지나쳤겠지만, 상대 는 매그너스 남작이었다. 사업의 신 동이라 불리는.
그는 젊은 나이에 여러 획기적인 사업으로 한미했던 매그너스 남작가
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었다.
개중 가장 유명한 것은 뷰티 살롱. 실력 있는 미용사와 디자이너가 항 시 상주하는 살롱은 영애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난 일단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기 로 했다.
“테라스로 자리를 옮기시는 건 어 떠신지요? 레이디.”
“흠…… 좋아요.”
따라오려는 소녀들을 물린 나는 매 그너스 남작과 함께 테라스로 향했
다.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이라, 테라스에는 인적이 없었다.
“여기까지 모셨으니, 단도직입적으 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매그너스 남작이 눈을 반짝였다.
“레이디의 조향 실력에 관심이 있 습니다. 어떠십니까, 저와 함께 사업 을 통해 판을 넓혀 보시는 것은?”
“……사업이라.”
내가 그 단어를 신중히 되뇌자, 매
그너스 남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아시다시피 지금 사교계가 레이디의 향수에 대 해 긍정적인 소문으로 가득합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그 게 바로 지금이고요.”
“그 기회를, 남작님과 함께 잡아보 자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이 향수 사업을 본격적으로 굴려 보시 죠. 생산 인력도, 납품책도 이미 모 두 구상해 놓았습니다.”
“그러신가요? 빠르시네요.”
“후후, 제가 누구입니까.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손댄 사 업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 니다. 장담하지요. 레이디의 향수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 다.”
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했다.
언제까지고 나와 리나 단둘이서 향 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나 혼자 발 품 팔면서 향수 영업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었다.
동업 파트너가 되겠다는 매그너스 남작의 이야기는 분명 매력적이었 다. 그러나, 그는 아직 가장 중요한 걸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 비율은요?”
“예?”
“저를 위해 자선사업을 하시겠다는 이야긴 아니실 테죠. 제 향수 판매 를 도와주시는 대신 원하시는 수익 비율이 있으실 텐데요?”
“아,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계약서 를 보면서 하시죠. 근처에 수하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가시죠, 레이
디/’
매그너스 남작이 나를 어디론가로 에스코트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발을 딱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비율부터 말씀해주세요. 그게 가 장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아, 물론이죠, 레이디. 하하, 확실 하신 성격이시구나.”
매그너스 남작이 활짝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비율은 칠대삼이 어떠십니까?”
“제가 칠인 거겠죠?”
이 남작이 귀찮은 납품이나 영업을 확실히 해결해 준다면, 삼 할의 이 익을 떼어주는 건 그리 손해가 아니 었다. 일단 나는 향수만 만들 줄 알 뿐, 사업적인 면에서는 초보자에 불 과하니까.
매그너스 남작이 더 활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삼이 레이디 쪽이십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생산비용은 물 론이고 기타 제반 비용 모두 백 퍼 센트 저희 부담으로……
“협상 결렬이네요. 실례합니다. 안 녕히 계세요.”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돌았 다.
파트너가 되진 않더라도 웬만하면 예의를 차리려고 했지만, 이런 사기 꾼을 상대로는 그조차도 아까웠다. 칠 대 삼은 무슨 칠 대 삼.
나는 빠르게 발을 놀려 이 말만 번지르르한 도둑놈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턱, 어깨를
잡혔다.
“하, 하하. 왜 이러십니까, 레이디.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아주 좋은 기 회인데요.”
당신에겐 좋은 기회겠죠. 전도유망 한 사업 아이템을 쪽쪽 빨아먹을 좋 은 기회.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무표정 속 으로 숨겼다.
매그너스 남작이 입에 기름을 칠한 듯 청산유수로 말했다.
“비율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이 사업을 거대한 규모로 키워낼 테 니, 비율이 어떻든 레이디께선 어마 어마한 부를 거머쥐시게 될 겁니 다!”
“제 능력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 요, 남작님. 하지만 역시 저는 아직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 준비는 되 지 않았나 봐요.”
나는 생긋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매그너스 남작이 황당한 얼굴을 했 다.
“단숨에 비율부터 물어보신 분이 무슨…… 레이디, 그러지 마시고 제 게 한 시간만 할애해 주십시오. 제 계획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시면 분명 매력을 느끼실 겁니다.”
“정말 죄송해요. 오늘은 선약이 있 어서요. 그럼 이만.”
“레이디! 알겠습니다, 육 대 사! 아니, 레이디께서 원하는 비율만큼 저희 조정해보도록 하죠!”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처음부터 이런 태도로 나왔다면 생 각을 해 보았겠지만, 매그너스 남작
은 이미 시커먼 속내를 다 드러낸 뒤였다. 이제와서 아무리 나를 현혹 하려 해봤자 한참 늦었다.
“죄송합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서 그럼 저는 이만……
“레이디! 선금도 두둑이 드리겠습 니다! 오만 비스! 오만 비스는 어떠 십……?
“매그너스 남작님!”
마지막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 다.
귀청을 찢을 듯한 외침에 나는 깜
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 다.
맙소사. 나는 곧 조그맣게 입을 벌 렸다.
아까 떼어놓고 왔던 소녀들이 구둣 발로 내달리며 이리로 달려오고 있 었다.
“저희 아리엘 님께서 거절하셨잖아 요!”
“싫다는 레이디에게 계속해서 춤을 청하는 건 신사의 자세가 아닌 걸로 압니다만!”
소녀들이 분기탱천해서 매그너스 남작을 쏘아붙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업 이야기에 대해서 듣지는 못한 듯했다. 소녀들 은 매그너스 남작이 내게 데이트를 청하려다가 퇴짜를 맞은 것으로 알 고 있는 듯했다.
“이만 아리엘 님을 놓아주세요, 남 작님!”
소란에 테라스 너머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매그너스 남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이거 일이 생각보다 커지겠는 걸. 나는 얼른 나서 이 사태를 수습 하려 했다.
“정말 실망이군요, 레이디 윈스턴.”
매그너스 남작이 분노한 눈으로 나 를 노려보았다.
“하기야, 당신 같은 여자와 동업할 생각을 한 내가 어리석었던 거겠 지.”
남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러나 그 말은 분명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구차하게 굴다 공작에게 버림받은 주제에, 뻔뻔함도 모르고 자숙 없이 나다니는 여자인데.”
순간 장내가 싸늘해졌다.
소녀들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굳 었다. 루나가 매그너스 남작을 노려 보며 입을 뗀 순간이었다.
“미안하지만, 남작.”
뜻밖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 다.
“소문이 와전된 것 같군.”
기다란 인영이 불쑥 매그너스 남작 앞으로 모습을 드리웠다. 순간 남작 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정적 속에서 불청객이 입가에 호선 을 그었다.
“버림받은 건 내 쪽이라서.”
매혹적인 미소에 턱없이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고, 공작님.”
매그너스 남작이 얼른 고개를 조아 렸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기 까진 어쩐 일로……『
“글쎄. 온 귀족들이 모이는 날인데, 나는 끼면 안 되나?”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매그너스 남작이 쩔쩔맸다.
난데없는 인물의 등장에 무도회장 이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 시 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세드릭 에 반스는 지독하리만치 여유로워 보였 다.
그가 매그너스 남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자네가 레이디 윈스턴에게
뱉었던 무례한 언사 말인데.”
“히, 힉. 저, 저는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라……/
“정정을 해주려는 건데 뭘 그렇게 떨고 그러나. 사실관계가 틀렸네. 버 린 쪽이 레이디 윈스턴이고, 버림받 은 쪽이 나야/
웅성웅성.
무도회장이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 졌다. 다들 방금 들은 이야기가 믿 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톡톡, 팔짱 낀 팔을 검지로 두드렸다. 묘한 짜증이 치밀어올랐
다.
패트리샤도 그렇고, 다들 내가 말 할 땐 코웃음만 치더니 세드릭이 말 하니 이제야 믿는 꼴이 못마땅했다.
“그, 그랬, 그랬었군요. 송구합니다, 전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뭐, 어찌 되었든 자네가 방금 레 이디에게 지껄인 헛소리가 무척이나 무례한 언사였음에는 변함이 없고.”
“마,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이십니 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매그너스 남작이 더듬거리며 연신
사과했다. 세드릭의 등장에 너무 놀 라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있는 듯 했다.
남작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돌 아보았다.
“레, 레이디. 사죄드립니다. 방금 제가 저지른 망언에 대해서는 부 디……/
“아뇨, 듣고 싶지 않네요.”
나는 굳은 얼굴로 남작의 말을 끊 었다.
세드릭의 위세에 눌려 반강제적으
로 받는 사과였다. 그까짓 사과 아 닌 사과에 기분이 풀릴 리 없었다.
“그리고, 매그너스 남작님. 확실히 말씀드리죠. 당신과는 어떤 사업이 든 함께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요.”
매그너스 남작이 눈을 끔뻑거렸다.
“제게 천운이 따라 향수 사업을 확 장하게 되더라도, 남작님이 운영하 시는 살롱에는 단 한 개도 남품할 일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