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요즘 사교계를 주름잡는 트렌드가 무엇인지 아는가?
우아한 레이스도, 이국의 보석도 아니다. 주렁주렁한 다이아몬드는 더더욱 아니었다.
지금 사교계는 통째로 어떤 꽃의 향기에 푹 빠져있었다.]
“후후후.”
나는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라일락 꽃잎을 빻았다.
예상한 그대로의, 아니. 예상을 훨 씬 웃도는 성공이었다.
계획대로 샤를로트는 내가 선물한 향수에 흠뻑 중독되었다. 생전 처음 으로 뿌려보는 향수가 마음에 든 모 양인지 어딜 가든 내 향수를 사용하 고 다녔다.
라일락 향기가 순식간에 그녀의 트 레이드 마크가 된 것이다.
샤를로트 제노스는 모두가 우러러 보는 사교계의 여왕. 그녀의 트레이 드 마크는 곧 선망의 대상이 되었 다. 너나 할 것 없이 샤를로트의 새 로운 취향을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거기서부턴 일사천리였다.
라일락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야 돌 멩이처럼 많겠지만, 샤를로트 제노 스가 사용하는 향수를 만드는 조향 사는 오직 나. 아리엘 윈스턴이 유 일했으니까.
덕분에 나는 지금 쏟아지는 주문의 홍수 속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뭐, 쏟아진다고는 해도, 아직
그렇게까지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지 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아가씨,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 세요?”
리나가 걱정 어린 물음을 건넸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는 무슨. 이게 다 돈인데. 나 는 지치지 않는 활기로 꽃잎을 빻았 다. 꽃가루가 번쩍이는 금가루로 보 였다.
“리나는 좀 쉬어. 요즘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한다, 그치.”
“아니에요, 아가씨. 덕분에 집안일 에서 해방됐는데요. 뭐.”
“그래도, 이게 보통 노동이 아닌 데미안, 보너스는 넉넉히 넣어 줄게.”
“어머나, 감사합니다! 헤헤.”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 향수를 만 드는 인력은 나와 리나, 단 둘뿐이 었다. 고마운 리나에겐 고생한 만큼 수익을 뭉텅이로 떼어 줄 생각이었 다.
‘그나저나, 문제긴 하네. 언제까지 우리 둘이서만 고생할 수도 없고.’
들어올 돈 생각만 하면 하루종일 꽃잎만 빻아도 힘들지 않았지만, 문 제는 내 몸이 하나라는 거였다. 만 들 수 있는 향수의 양엔 한계가 있 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 하단 말이지.’
하지만 리나만큼 믿을만한 인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 저택의 하 인들은 모두 내가 아닌 아버지의 수 족이었다. 그들을 귀중한 조향실에 발 들이게 할 순 없었다.
‘고민이긴 한데…… 뭐, 일단은 식 사부터 하자.’
리나를 데리고 조향실을 나선 나 는, 복도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렸다.
집사였다. 그러고 보니 집사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 어 그에게 다가갔다.
“집사, 잘됐네요. 할 말이 있어요.”
“죄송하지만, 아가씨.”
하지만 집사가 뜬금없는 소리로 내 말을 막았다.
“이번 달부터 용돈을 드리기 어려 울 것 같습니다.”
“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게 웬 자다 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그게 무슨 소리죠? 웬 용돈?”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드리는 용돈 을 일절 끊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 번 혼을 냈는데도 칠렐레팔렐레 정 신을 못 차리는군. 강경책이 필요하 겠어.’ 라고요. 그대로 읊어 드렸습 니다.”
“……나, 참.”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 강경책이 내 용돈을 끊는 거라고 하시던가요?”
“네. 아가씨께서 영양가 없는 무도 회나 살롱에 그만 출입하고, 조향실 도 폐쇄하고, 주인님께서 주선하시 는 영식과의 만남에만 집중하시면 그때 다시 용돈을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특히, 향수와 관련된 일에는 앞으 로 한 푼도 주실 수 없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하하. 그러셨군요.”
나는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요즘 백작이 물고 오는 선 자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향수 영업에 힘 쓰느라 온갖 무도회와 살롱에 출입 했더니 그게 무척이나 고까웠던 모 양이었다.
치사하게 돈을 갖고 협박하다니.
하지만 다행히도 이젠 내게 별 상 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하시라고 전해 주 세요.”
“……예?”
“슬슬 독립할 생각이긴 했는데, 아 버지 덕분에 경제적 독립을 먼저 이 루게 됐네요. 잘 됐어요.”
집사가 충격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왜, 용돈을 끊겠다고 하면 백작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 릴 줄 알았던 걸까?
“이야기 끝이죠? 아, 배고파라. 오 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나는 부러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 갔다.
그나저나 마음에 드네, 경제적 독 립이란 단어.
나는 아까 아무렇게나 뱉었던 단어 를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이대로 향수 사업이 순조롭게 확장 되기만 한다면, 독립도 불가능한 일 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나를 도와준 샤를로트 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사용인 마리엔느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샤를로트인가?’
첫 만남 이후 나와 샤를로트는 부 쩍 친해졌다. 인맥도 별로 없는 내 가 여기저기 온갖 살롱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녀 덕분이었 다.
마리엔느가 내게 우편물을 건넸다. 값비싼 금박이 잔뜩 새겨진, 무척이 나 호화로운 카드 봉투였다.
‘이건
“어머, 아가씨! 황실에서 온 초대
장이네요!”
어느새 다가온 리나가 호들갑을 떨 었다.
나는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거기 엔 연말을 맞아 황궁 연회가 개최될 예정이니 참가해 달라는 문구가 적 혀 있었다.
연말 황실 연회는 웬만한 유력가의 무도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행사였다.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참가하실 거죠, 아가씨?”
“물론이지.”
나는 빙긋 웃었다. 이런 어마어마 한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사교계에 여왕이 존재하듯이, 무도 회에도 여왕이 있다면 그 주인공은 단연 황실 무도회가 아닐까.
황궁의 마차장 안으로 줄줄이 마차 들이 도착했다. 하나같이 내로라하 는 가문의 인장이 달린, 호화롭기 그지없는 마차들이었다.
그 마차들에서 영애와 영식들이 속 속들이 내렸다. 여기저기 유명인사 가 눈에 띄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역시 레이디 샤를로트였 다.
샤를로트를 발견한 내가 반갑게 다 가가려던 차였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
웬 꾀꼬리 같은 합창이 내 귀를 잡아챘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였지? 방금 웬 소녀 떼가 내 이 름을 부른 것 같은 환청이……,
“여기에요, 여기! 아리엘 님!”
“너무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환청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소녀 떼가 종종걸음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누구……/
“아이, 아리엘 님! 저희잖아요, 저
희!”
너희…… 가 누군데?
하나, 둘, 셋, 넷. 총 네 명의 소녀 들. 하나같이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 들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저들끼리 드레스 코드를 맞춘 건 지, 소녀들은 파스텔톤의 머리 리본 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 이 꽤나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경 계심이 풀렸다.
“그동안 저희한테 너무 소홀하셨어 요. 새 친구분 사귀셨다고 이제 저
희는 뒷전이신 거예요? 루나는 너무 슬퍼요!”
“야, 루나. 귀여운 척하지 마.”
“시끄러워. 죽을래, 에일린?”
두 소녀가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안 들릴 줄 아는 건지.
그나저나…… 루나와 에일린이라. 어쩐지 들어본 적 있는 듯한 이름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나와 에일린, 그리고 아리엘 윈스턴……,
‘아!’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으
생각났다. 루나와 에일린, 그리고 네 명의 소녀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소녀들을 하나씩 훑었다.
“루나, 에일린…… 릴리, 사샤?”
퐁퐁 떠오르는 이름들을 읊자, 소 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 다.
“저희 이름을 다 외우고 계셨군 요!”
“감동이에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 소녀들 역시 원작에 등장한 적 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리엘 윈스 턴의 친위대로.
그…… 소설에 보면 자주 나오는 그런 존재들 있잖은가. 소위 악녀 군단이라 불리는, 몰려다니며 여주 인공과 남주인공을 괴롭히는 조무래 기 악역들.
맙소사.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 그 런 역할을…… 아냐. 나는 얼른 정 신을 차렸다. 나 역시 악역이었던
몸이었다. 이런 악녀 군단과 가까이 지내봐야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미안, 얘들아. 오늘 좀 바빠서. 그 럼 이만……/
샤를로트, 샤를로트나 찾자.
그러나 그새 샤를로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허탈해하는 내게 악녀 군단이 찰싹 달라붙었다.
“같이 가요, 아리엘 님!”
소녀들이 순발력 있게 내 뒤를 따
라붙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네 명의 소녀 를 주렁주렁 매단 채 황궁에 입장해 야 했다.
“아리엘 님. 목마르지 않으세요?”
“아리엘 님! 카나페 갖다 드릴까 요?”
“아리엘 님, 저기 영식이 자꾸 아 리엘 님을 쳐다보는데요? 건방지 게.”
“처리하고 올까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샤를로트와 지내면서 나는 기존의 악녀 이미지를 조금씩 바꾸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샤를로트 덕분에 나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내 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나는 내 모습 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영락없 이 악녀와 그 추종자 무리였다. 사 람들은 내게 다가오기는커녕, 멀찍 이서 두려운 얼굴로 수군거릴 뿐이 었다.
‘이래서야 향수 영업을 할 수가 없 잖아.’
안 되겠다. 일단 얘들부터 치우고 봐야지.
그렇게 다짐한 순간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요즘 사교 계에 평판이 높으신 레이디 윈스턴 아니십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얼 굴도 제법 젊고 잘생긴 편이었지만,
어딘지 유들유들하고 느끼한 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뒤 악녀 군단들의 눈빛 공격을 뚫고 다가온 것만으로도 가 산점을 줄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걸친 채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성함이……/
“아, 이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 름은 폰타 매그너스입니다.”
매그너스라면…… 나는 고개를 끄 덕였다. 사업 수완으로 이름 높은 그 매그너스 남작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