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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0화 (10/153)

〈10화〉

“더군다나 다른 영식도 아니고, 그 전도유망하신 로빈 공이 아리엘 양 을, 추행이요? 어머, 황당해라. 자의 식 과잉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닌가 요?”

패트리샤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비 웃자, 그녀의 무리들이 똑같이 그 동작을 따라했다. 아이돌 군무처럼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촌극에 언제까 지 어울려줘야 할까.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 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충 넘어가긴 그 른 것 같고, 뭐라 반격을 해야 할 텐데……, 그 잘나고 전도유망하신 로빈 공이 우리 집 데릴사위로 팔려 오기 위해 선 자리에 나왔던 거라고 까발릴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 다.

“로빈 공과 식사라도 함께 한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분수도 모르고

감히 공께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다 니……

“없는 죄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패트리샤 양?”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와 패트리샤는 동시에 고개를 돌 렸다. 뜻밖의 인물이 거기 서 있었 다.

백금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 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샤를로트 제노스. 아까까지만 해도 저 멀리서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 던 그녀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나와 마찬가지로 패트리샤도 샤를 로트의 등장에 깜짝 놀랐는지 더듬 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샤를로트 양. 좋 은 오후……/

“’없는 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쭸어요. 설마 패트리샤 양께서는 아리엘 양이 로빈 마르셀에게 무고 한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샤를로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 긋나긋했지만 막힘이 없었다. 패트

리샤가 당황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 리 굴리더니 대답했다.

“그, 그럼요. 제가 로빈 공과 친분 이 있어서 아는데, 그분께선 절대 그런 짓을 할 분이……

“실례지만, 그 날 현장에 함께 계 셨었나요, 패트리샤 양?”

“네? 아뇨, 그 자리엔 없었지 만……?

“현장에 계시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이만큼이나 확신에 차 계신 건지 궁 금하군요. 로빈 마르셀은 곧 재판에 송치될 거예요. 그리고 기소인은 세 드릭 에반스 공이시죠. 아리엘 양이

아니라.”

“……예?”

패트리샤가 입을 딱 벌렸다.

홀이 한바탕 웅성거렸다. 샤를로트 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파괴력이 대 단했다.

나 역시 놀란 눈으로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딱히 나와 친분도 없는 그녀가 나를 두둔하고 나서줄 줄이 야. 심지어 세드릭의 이름까지 꺼내 면서 말이다.

소란 속에서 샤를로트가 한 점 흔 들림 없는 눈으로 패트리샤를 노려

보았다.

“패트리샤 양이 먼저 친우를 운운 하셨기에 말해 보자면, 제 ‘친우’인 에반스 공께서도 무고한 자에게 죄 를 뒤집어씌울 악인은 아니십니다.”

“세, 세, 세드릭 님이…… 그, 그런 말은 저는 못 들었……/

“신기하군요. 이렇게나 가십을 좋 아하시는 분이 그 이야기는 듣지 못 하셨다니.”

패트리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 하얘졌다. 샤를로트가 마지막 쐐기

를 박았다.

“당신이 아리엘 양을 의심하는 건, 아리엘 양께도 무례일뿐더러, 에반 스 공의 공정성을 의심한다는 뜻도 됩니다. 에반스 공께 정식으로 탄원 을 요청하시겠어요?”

“저, 저, 저는……-”

우물거리던 패트리샤가 도움을 요 청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무리들은 이미 몇 발짝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나를 두고 수군거리던 시선들 역시

지금은 패트리샤를 향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패트리샤가 울상을 지었다.

“아, 아리엘 양. 죄, 죄송해요. 저 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긴 뭘 몰라. 패트리 샤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이 사 건에 세드릭이 끼어 있다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벌벌 떨며 내 눈치를 보는 패트리샤를 내려다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나약하고 한심해

서야 싸울 의욕도 들지 않았다.

“됐어요, 사과하지 말아요.”

“아리엘 양, 전 정말……/

“그냥 오늘 일은 서로 오물 밟은 셈 치고 넘어가도록 해요.”

“아리엘 양!”

“정말 미안하시다면, 이만 물러가 주시길 바라요. 조금 피곤해서.”

패트리샤가 울상인 얼굴로 화닥닥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대놓고 사람을 망신주던 사 람들이, 세드릭의 이름 하나에 벌벌 떨며 물러나다니. 나는 다시금 이곳 이 불공평한 귀족 사회라는 것을 깨 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샤를로트가 말을 걸었다.

“아리엘 양, 괜찮으세요?”

아.

나는 샤를로트에게로 고개를 돌렸 다.

샤를로트가 부드럽고 걱정 어린 눈

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패트리 샤를 향하던 얼음장 같은 눈빛은 온 데간데 없었다.

“감사해요, 샤를로트 양.”

“아니에요. 안 그래도 그 날 레스 토랑 사건에 대해 듣고 엄청 분통 터쳤었거든요. 부끄러움도 모르고 대낮에 레이디를 희롱하다니, 정신 나간 인간!”

샤를로트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지금은 괜찮

으신가요?”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나는 샤를로트 몰래 눈을 반짝였 다.

구태여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 무도 회에 참석한 건 모두 샤를로트 때문 이었다.

샤를로트 제노스. 제노스 후작이 늘그막에 낳은 금지옥엽 같은 막내 딸

제노스 후작은 이 나라의 재상, 즉 권력의 중심축에 서 있는 자였다. 자연스레 후작의 아픈 손가락인 샤

를로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많은 인간들이 줄을 섰다.

게다가 샤를로트 본인의 선하고 활 달한 성품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이 상적인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사교계의 여왕이란, 곧 유 행의 선두주자라는 단어와 일맥상통 했다.

나는 샤를로트 몰래 킁킁 코로 냄 새를 들이마셨다.

파티장에 오기 전 손목과 목 뒤에 꼼꼼히 뿌린 향수의 향이 아직 은은 히 남아 있었다.

“놀라서 그런가, 조금 덥네요.”

나는 생긋 웃으며 쥘부채를 펼쳐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무렇게나 흔 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철 저히 각도가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어라.”

계획이 놀랄 만큼 맞아떨어졌다.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샤를로 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례지만, 향이 무척 좋아요, 영 애. 향수를 뿌리신 건가요?”

역시.

나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샤를로트는 원작에서도 종종 등 장하는 레귤러 캐릭터였는데, 등장 할 때마다 ‘섬세하고 민감하다’는 묘사가 빠지질 않았었다.

게다가 그녀는 꽃꽂이가 취미였다. 수도에서 이름난 실력자이기도 했 다.

“아, 네. 알아봐 주시니 감사하네

요. 오늘 처음 개봉한 향수랍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너무 좋아요. 꼭 진짜 생화 향기 같은걸요.”

신기하다는 듯 샤를로트가 눈을 빛 냈다. 나는 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 리에 힘을 주며 부채를 더욱 팔랑팔 랑 흔들었다. 샤를로트가 몽롱한 얼 굴을 했다.

“라일락 향이네요. 제가 제일 좋아 하는 꽃인데…… 향수로 이만큼이나 생화 향기를 재현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나는 기쁘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물론, 라일락 향을 재현한 건 다분 히 의도적이었다. 샤를로트는 라일 락을 좋아했다. 아예 라일락으로만 가득한 화원을 따로 둘 정도였다.

“감사해요. 처음 만들어본 향이라 아직 확신이 없었거든요.”

“네? 세상에. 영애께서 직접 만드 신 향수라고요?”

샤를로트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

다.

“어머나, 신기해라. 빈말이 아니라 정말 향이 너무 좋아요. 라일락 정 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 걸 요!”

나는 하하 웃었다. 이제 미리 준비 한 회심의 대사를 건넬 차례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너무 기 쁘네요. 안 그래도 어제 만들다 남 은 걸 조금 가지고 왔는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한 병 드려도 괜

찮을까요?”

“어머나.”

샤를로트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얼 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 졌다.

“호의는 정말 감사하지만…… 죄송 해요. 사실 저는 향수를 뿌리지 못 하는 체질이랍니다. 알레르기가 있 어서요.”

“네? 알레르기요?”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샤를로 트가 슬픈 얼굴을 했다.

“정확히는 알코올 알레르기라고 해 야겠죠. 남들이 뿌린 향수를 맡는 것 정도는 괜찮은데, 몸에 직접 뿌 리면 빨갛게 반점이 올라오곤 해 요.”

“어머나, 그럴 수가…… 힘드시겠 어요, 영애.”

“네에. 향수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 도 억울하고, 술을 못 하는 것도 억 울하고. 하지만 이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죠.”

시무룩한 얼굴로 샤를로트가 미소 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여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 다. 주변에서도 약한 탄식 소리가 들렸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잠 시 샤를로트에게 홀린 정신을 다잡 았다.

“어머,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짝 손뼉을 쳤다. 샤를로트가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러세요, 영애?”

“잠깐 잊고 있었네요. 이 향수를 만들 때, 일부러 알코올을 안 넣었 거든요!”

“네?”

샤를로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알코올이 없는 향수도 있나요?”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시험해 본 거예요. 다행히 결과가 좋았답니 다!”

“어머, 정말 알코올이 없는 향수라 면……

샤를로트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 았다. 나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영애께서 쓰셔도, 괜찮지 않을까 요?”

“네, 네! 알코올이 없다면 확실히 괜찮을 것 같아요!”

샤를로트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올라왔다.

“괜찮으시면 지금 뿌려보시겠어 요?”

“그래도 될까요?”

나는 대답 대신 손가방 안에서 향 수병을 꺼냈다. 샤를로트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 려는 악동처럼 그녀가 눈을 빛냈다.

“여길 이렇게 쥐고, 분사하시면 돼 요.”

“와, 이런 건 처음이라서…… 어디 에 뿌리면 되죠? 손목이었던가요?”

“일단은 무난하게 손목에 뿌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초심자시니까 요.”

샤를로트가 긴장한 얼굴로 향수병 을 쥐었다.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지만, 표 정을 숨긴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창대한 계획, 그 첫 계단에 발 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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